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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역사 79. 파르티잔 레지스탕스와 1945년 해방 - 민족해방위원회의 투쟁과 내전의 비극

1943년 9월 8일 휴전 협정 발표 이후 이탈리아는 새로운 형태의 전쟁에 휘말렸다. 독일군의 점령과 살로 공화국에 맞서 수많은 이탈리아인들이 무기를 들고 일어났다. 파르티잔(빨치산) 운동은 단순한 저항을 넘어 새로운 이탈리아의 건설을 위한 민족 해방 투쟁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이탈리아는 동족상잔의 내전을 경험해야 했다.레지스탕스의 시작과 민족해방위원회 결성휴전 협정 직후 혼란 속에서 이탈리아 각지에는 자발적인 저항 조직들이 생겨났다. 해산된 이탈리아군 병사들, 반파시즘 정치인들, 일반 시민들이 독일군과 파시스트들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산발적이고 조직화되지 않은 활동이었지만, 점차 체계적인 저항 운동으로 발전했다.1943년 9월 9일 로마에서 민족해방위원회(CLN: Comitat..

History/Europe 2025.06.23

이탈리아 역사 78. 1943년 무솔리니 실각과 바돌리오 전환 - 파시즘의 몰락과 연합군 상륙의 혼란

1943년 7월 25일 저녁, 20년 넘게 이탈리아를 지배해온 베니토 무솔리니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에 의해 해임되었다. 파시즘의 창시자이자 독재자였던 무솔리니는 왕궁을 나서는 순간 카라비니에리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는 이탈리아 현대사의 가장 극적인 전환점 중 하나였으며, 동시에 새로운 혼란의 시작이기도 했다.파시즘 체제의 내부 균열과 그란 파시스모 회의1943년 상반기 이탈리아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시칠리아 상륙을 앞둔 연합군의 폭격이 이탈리아 본토를 강타했고, 북아프리카에서는 마지막 저항선이 무너지고 있었다. 5월 13일 튀니지의 추축군이 항복하면서 25만 명의 독일-이탈리아군이 포로가 되었다. 이탈리아 국민들의 전쟁에 대한 염증은 극에 달했다.파시스트 대평의회(Gran Consiglio del..

History/Europe 2025.06.23

이탈리아 역사 77. 제2차 세계대전 참전과 북아프리카 패전 - 무솔리니의 치명적 오판과 그리스 전선의 재앙

1940년 6월 10일, 무솔리니는 독일의 프랑스 침공이 거의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영국과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다. "나는 이탈리아 국민에게 선언한다. 우리는 플루토크라시와 반동적 서구 민주주의에 맞서 싸운다"라고 외친 무솔리니의 연설은 이탈리아를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의 길로 이끌었다. 이 결정은 이탈리아 현대사상 가장 치명적인 오판 중 하나였다.참전 결정의 배경과 무솔리니의 계산착오무솔리니의 참전 결정은 갑작스럽게 내려진 것이 아니었다.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을 때, 이탈리아는 '비교전국'(non belligeranza) 상태를 선언했다. 이는 중립이 아니라 독일을 지지하되 당장 전쟁에는 참여하지 않겠다는 애매한 입장이었다.1940년 봄 독일의 서부 전선 대..

History/Europe 2025.06.23

이탈리아 역사 76. 에티오피아 침공과 국제 고립 - 무솔리니의 제국주의적 야심과 국제연맹 제재의 파장

1935년 10월 3일, 이탈리아군이 에티오피아 국경을 넘으며 아프리카의 마지막 독립국 중 하나를 침공했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에게 이 전쟁은 단순한 식민지 확장을 넘어서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로마 제국의 영광을 되살리려는 제국주의적 야심과 국내 경제 위기를 돌파하려는 정치적 계산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침공의 배경과 무솔리니의 제국 건설 의지무솔리니는 집권 초기부터 '이탈리아 제국'의 건설을 공공연히 선언해왔다. 1920년대 후반부터 리비아에서의 저항을 잔혹하게 진압하며 식민 통치를 강화했고, 1930년대 들어서는 더욱 공격적인 팽창 정책을 추진했다. 에티오피아는 이러한 제국주의적 야심의 핵심 목표였다.1896년 아도와 전투에서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기억은 여전히..

History/Europe 2025.06.23

이탈리아 역사 75. 아체르보 선거법과 국가 구제 독재: 무솔리니가 합법적 수단으로 독재 체제를 구축하는 과정

1922년 10월 권력을 장악한 무솔리니는 여전히 많은 제약에 직면해 있었다. 연립정부에서 파시스트는 소수였고, 의회에서도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했다. 국왕과 기존 엘리트들은 언제든 그를 해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솔리니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는 점진적이고 교묘한 방법으로 반대 세력들을 하나씩 제거해나갔다. 1923년 아체르보 선거법 통과와 1924년 마테오티 사건은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분수령이 됐다. 무솔리니는 합법성의 외피를 유지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독재 체제를 구축해갔다. 이는 20세기 권위주의 정치의 전형적인 패턴이 됐다.초기 연립정부와 점진적 권력 장악무솔리니의 첫 번째 내각은 겉보기에는 연합정부였다. 22명의 각료 중 파시스트는 단 4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자유주의자, 민족주의자, 가..

History/Europe 2025.06.21

이탈리아 역사 74. 1922년 로마 진군과 파시즘의 집권: 무솔리니가 권력을 장악하는 극적인 순간

1922년 10월 28일 새벽, 수만 명의 검은셔츠가 로마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극적인 정치적 쿠데타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 "진군"은 실제로는 거의 총성 없이 이뤄진 정치적 연극에 가까웠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밀라노에서 안전하게 기다리며 전개 상황을 지켜보았고, 결국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국왕의 부름을 받아 총리가 됐다. 3년 전 겨우 4,795표를 얻었던 정치 신인이 이제 유럽의 한 강국을 통치하게 된 것이다. 로마 진군은 민주주의가 어떻게 내부로부터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가 됐다.1922년 정치적 위기와 파시스트의 기회1922년 들어 이탈리아 정치는 완전한 교착 상태에 빠졌다. 루이지 파크타 내각이 무너진 후 의회에서는 안정적인 다수파를 구..

History/Europe 2025.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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