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10월 3일, 이탈리아군이 에티오피아 국경을 넘으며 아프리카의 마지막 독립국 중 하나를 침공했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에게 이 전쟁은 단순한 식민지 확장을 넘어서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로마 제국의 영광을 되살리려는 제국주의적 야심과 국내 경제 위기를 돌파하려는 정치적 계산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침공의 배경과 무솔리니의 제국 건설 의지
무솔리니는 집권 초기부터 '이탈리아 제국'의 건설을 공공연히 선언해왔다. 1920년대 후반부터 리비아에서의 저항을 잔혹하게 진압하며 식민 통치를 강화했고, 1930년대 들어서는 더욱 공격적인 팽창 정책을 추진했다. 에티오피아는 이러한 제국주의적 야심의 핵심 목표였다.
1896년 아도와 전투에서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기억은 여전히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상처로 남아있었다. 무솔리니는 이 '민족적 굴욕'을 씻어내는 것이야말로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사명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1929년 세계 대공황 이후 심화된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대외 팽창을 통한 돌파구 마련이 절실했다.
에티오피아 침공의 직접적인 계기는 1934년 12월 발생한 '발발 사건'이었다.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와 에티오피아 국경 지역인 발발에서 양국 군대가 충돌하면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무솔리니는 이 사건을 빌미로 에티오피아에 대한 대규모 군사 작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전쟁의 전개와 화학무기 사용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 침공을 위해 막대한 군사력을 동원했다. 약 50만 명의 병력과 최신 무기, 그리고 공군력까지 투입되었다. 반면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지휘하는 군대는 대부분 전통적인 무기로 무장한 상태였다.
전쟁 초기 이탈리아군은 순조롭게 진격했다. 에밀리오 데 보노 장군이 지휘하는 북부군은 아디스그라와 막달레를 점령했고, 로돌포 그라치아니 장군의 남부군도 소말릴란드에서 진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에티오피아군의 게릴라 전술과 험준한 지형으로 인해 진격 속도가 예상보다 더뎠다.
무솔리니는 전쟁의 조기 종결을 위해 피에트로 바돌리오를 새로운 총사령관으로 파견했다. 바돌리오는 더욱 잔혹한 전술을 구사했는데, 특히 국제법으로 금지된 독가스를 대량으로 사용했다. 머스터드 가스가 살포된 지역에서는 민간인까지 무차별적으로 피해를 입었다.
1936년 5월 5일, 이탈리아군은 마침내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를 점령했다.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영국으로 망명했고, 무솔리니는 5월 9일 이탈리아 제국의 성립을 선포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이탈리아 국왕이자 에티오피아 황제라는 이중 칭호를 얻게 되었다.
국제연맹의 제재와 이탈리아의 고립
에티오피아 침공은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에티오피아는 국제연맹의 정식 회원국이었고, 이탈리아의 침공은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었다.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국제연맹 총회에서 직접 연설하며 국제사회의 도움을 간절히 호소했다.
국제연맹은 1935년 10월 이탈리아에 대한 경제 제재를 결의했다. 52개국이 참여한 이 제재는 무기 금수 조치, 이탈리아로의 수출 금지, 이탈리아산 제품 수입 금지 등을 포함했다. 특히 석유 금수 조치가 논의되면서 이탈리아 경제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
하지만 제재의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미국은 국제연맹 회원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제재에 참여하지 않았고, 독일과 일본 등도 이탈리아와의 거래를 계속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영국과 프랑스가 전면적인 제재에는 소극적이었다는 점이다. 수에즈 운하 봉쇄나 석유 완전 금수 같은 결정적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다.
스페인 내전 개입과 추축국 형성
에티오피아 전쟁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의 국제적 고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무솔리니는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동맹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36년 7월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이탈리아는 프랑코의 반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이탈리아는 스페인 내전에 약 7만 명의 병력과 대량의 무기를 지원했다. 이는 독일과 함께 파시스트 진영의 연대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1936년 10월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베를린-로마 추축'을 형성했고, 이는 훗날 제2차 세계대전의 추축국 동맹으로 발전하게 된다.
스페인 내전 개입은 이탈리아에게 막대한 비용을 부담시켰다. 에티오피아 전쟁으로 이미 약화된 경제가 더욱 악화되었고, 국제적 고립도 심화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탈리아의 지중해 진출을 견제하기 시작했고, 이는 무솔리니를 더욱 독일 쪽으로 밀어붙이는 결과를 낳았다.
제국 통치의 현실과 저항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제국(AOI)의 통치는 처음부터 어려움에 직면했다. 에티오피아 전 지역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고, 각지에서 저항 활동이 계속되었다. 특히 산악 지대에서는 게릴라 활동이 지속되어 이탈리아군을 괴롭혔다.
이탈리아는 제국 통치를 위해 대규모 개발 계획을 발표했다. 도로 건설, 농업 개발, 광산 개발 등 야심찬 계획들이 수립되었지만, 실제 성과는 미미했다. 더욱이 이러한 개발 사업에는 막대한 비용이 투입되어야 했고, 이는 이탈리아 본국의 재정을 더욱 압박했다.
식민 통치 과정에서 이탈리아는 극도로 잔혹한 방법을 사용했다. 1937년 아디스아바바에서 발생한 그라치아니 총독 암살 미수 사건 이후, 이탈리아군은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수천 명의 에티오피아인이 보복으로 살해되었고, 지식인과 성직자들이 집중적으로 탄압받았다.
경제적 파급효과와 국내 정치
에티오피아 전쟁과 국제 제재는 이탈리아 경제에 복합적인 영향을 미쳤다. 단기적으로는 전쟁 물자 생산으로 인한 경기 부양 효과가 있었지만, 장기적으로는 경제 구조를 더욱 취약하게 만들었다. 국제 제재로 인해 수입 원자재 가격이 상승했고, 이는 인플레이션을 가속화시켰다.
무솔리니는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을 '경제적 자립'(autarchia) 정책으로 극복하려 했다. 수입 대체 산업을 육성하고 국산품 사용을 강요했지만, 이는 오히려 경제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석유와 같은 전략 자원의 부족은 지속적인 문제로 남았다.
국내 정치적으로는 에티오피아 전쟁의 승리가 무솔리니의 지지율을 크게 높였다. 많은 이탈리아인들이 '제국'의 건설에 자부심을 느꼈고, 파시스트 정권의 위신이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이는 무솔리니로 하여금 더욱 공격적인 대외 정책을 추진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국제질서의 변화와 전쟁의 전조
에티오피아 전쟁은 1930년대 국제질서의 붕괴를 상징하는 사건 중 하나였다. 국제연맹의 집단 안보 체제가 실효성을 잃었음이 명확히 드러났고, 이는 다른 침략적 세력들에게 잘못된 신호를 보냈다. 일본의 중국 침공, 독일의 라인란트 재무장 등이 연이어 발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우유부단한 대응은 유럽의 세력 균형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특히 1935년 12월 영국과 프랑스가 비밀리에 추진한 '호어-라발 협정'이 폭로되면서 양국의 도덕적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 이 협정은 에티오피아 영토의 3분의 2를 이탈리아에게 할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무솔리니는 이러한 국제적 혼란 상황을 기회로 인식했다. 서방 민주주의 국가들의 약함을 확신한 그는 더욱 모험적인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는 궁극적으로 이탈리아를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어들이는 결과를 낳았다.
에티오피아 침공과 그에 따른 국제적 고립은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선택한 길의 치명적 결과였다. 제국주의적 야심을 추구하며 국제법을 무시한 대가로 이탈리아는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었고, 결국 히틀러의 독일과 운명을 함께하게 되었다. 이는 20세기 전반 유럽 정치사의 비극적 전개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곧 다가올 세계대전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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