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이탈리아 역사 77. 제2차 세계대전 참전과 북아프리카 패전 - 무솔리니의 치명적 오판과 그리스 전선의 재앙

SSSCH 2025. 6. 23.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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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6월 10일, 무솔리니는 독일의 프랑스 침공이 거의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영국과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다. "나는 이탈리아 국민에게 선언한다. 우리는 플루토크라시와 반동적 서구 민주주의에 맞서 싸운다"라고 외친 무솔리니의 연설은 이탈리아를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의 길로 이끌었다. 이 결정은 이탈리아 현대사상 가장 치명적인 오판 중 하나였다.

참전 결정의 배경과 무솔리니의 계산착오

무솔리니의 참전 결정은 갑작스럽게 내려진 것이 아니었다.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을 때, 이탈리아는 '비교전국'(non belligeranza) 상태를 선언했다. 이는 중립이 아니라 독일을 지지하되 당장 전쟁에는 참여하지 않겠다는 애매한 입장이었다.

1940년 봄 독일의 서부 전선 대공세가 연일 승리를 거두자 무솔리니의 계산이 바뀌기 시작했다. 노르웨이 점령, 덴마크와 네덜란드의 항복, 벨기에의 붕괴, 그리고 마지노선의 돌파까지 독일군의 전진은 거침없어 보였다. 무솔리니는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 판단했고, 승리의 과실을 나눠 가지려면 지금이라도 참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외무장관 갈레아초 치아노를 비롯한 많은 고위 관료들이 참전을 반대했다. 이탈리아군의 준비 상태가 불충분하고, 경제력으로는 장기전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실제로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 전쟁과 스페인 내전 개입으로 이미 국력이 상당히 소모된 상태였다. 하지만 무솔리니는 "나에게 필요한 것은 수천 명의 전사자뿐이다. 그래야 평화회의 테이블에 앉을 수 있다"라며 단기전 승리에 대한 확신을 드러냈다.

초기 전투와 예상과 다른 현실

참전 직후 이탈리아군은 프랑스 남부 국경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알프스 전선에서의 이탈리아군 공세는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프랑스군은 이미 독일과의 전투로 대부분의 병력이 북쪽으로 이동한 상태였지만, 소수의 수비대만으로도 이탈리아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6월 21일 프랑스가 독일과 휴전협정을 체결할 때까지 이탈리아군이 점령한 프랑스 영토는 미미했다.

지중해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이탈리아 해군은 지중해 최강을 자부했지만, 영국 해군과의 첫 교전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1940년 7월 9일 칼라브리아 해전에서 이탈리아 함대는 영국 함대와 맞서 싸웠지만 결정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더욱 심각한 타격은 11월 11일 밤 타란토 군항 기습으로 이어졌다.

타란토 기습은 이탈리아 해군에게 치명적이었다. 영국의 HMS 일러스트리어스호에서 출격한 21대의 소드피시 복엽기가 타란토 군항을 기습 공격했다. 이탈리아 전함 3척이 침몰하거나 대파되었고, 이탈리아 해군력의 절반이 한 순간에 무력화되었다. 이 공격은 나중에 진주만 공격의 모델이 될 정도로 항공모함 기반의 새로운 해전 양상을 보여줬다.

그리스 침공과 예상치 못한 재앙

무솔리니는 독일이 영국 본토 항공전에 집중하는 동안 독자적인 성과를 거두고 싶어했다. 1940년 10월 28일, 이탈리아는 알바니아를 거점으로 그리스를 침공했다. 무솔리니는 "우리가 독일의 라인란트를 점령하는 것처럼 그리스를 점령하겠다"며 히틀러에 대한 의도적인 견제 의식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리스 침공은 처음부터 잘못 계획된 작전이었다. 이탈리아군은 겨울 산악전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고, 그리스군의 저항 의지를 완전히 과소평가했다. 이오안니스 메탁사스 총리가 이끄는 그리스 정부는 이탈리아의 최후통첩을 단호히 거부했고, 그리스 국민들은 조국 수호를 위해 일치단결했다.

그리스군의 반격은 이탈리아군에게 재앙이었다. 알렉산드로스 파파고스 장군이 지휘하는 그리스군은 11월부터 대반격을 개시했다. 이탈리아군은 알바니아 영토 깊숙이까지 밀려났고, 그리스군은 이탈리아군이 점령했던 알바니아 남부 영토의 4분의 1을 탈환했다. 발로나와 아르기로카스트로 같은 주요 도시들이 그리스군의 손에 넘어갔다.

이탈리아군의 패배는 보급과 장비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알바니아의 열악한 도로 사정으로 보급선이 늘어졌고, 혹독한 겨울 추위 속에서 이탈리아 병사들은 적절한 방한 장비도 없이 고생했다. 그리스군은 지형을 잘 알고 있었고, 영국으로부터 제한적이나마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북아프리카 전선의 개막과 초기 좌절

이탈리아는 리비아를 거점으로 북아프리카에서도 공세를 펼쳤다. 1940년 9월 로돌포 그라치아니 원수가 지휘하는 이탈리아 제10군이 이집트 침공을 개시했다. 4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한 이 공세는 처음에는 순조로워 보였다. 이탈리아군은 시디 바라니까지 진격하며 영국령 이집트 깊숙이 들어갔다.

하지만 영국군의 반격이 시작되자 상황은 급변했다. 아치볼드 웨이벌 장군이 지휘하는 영국군은 12월 9일 '컴패스 작전'을 개시했다. 불과 3만 6천 명의 영국군과 인도군, 오스트레일리아군이 이탈리아군을 상대로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이탈리아군의 방어선은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1941년 2월까지 이어진 영국군의 공세는 이탈리아군에게 재앙적 결과를 가져왔다. 이탈리아 제10군은 사실상 전멸했고, 13만 명이 포로로 잡혔다. 영국군은 키레나이카 전 지역을 탈환했고, 벵가지와 토브룩 같은 요충지를 점령했다. 이탈리아군은 엘 아게일라까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참패는 이탈리아군의 구조적 문제를 여실히 드러냈다. 장비의 노후화, 지휘관들의 무능함, 병참 체계의 붕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특히 이탈리아 전차는 영국의 마틸다 전차에 비해 현저히 열세였고, 대전차포도 부족했다. 무엇보다 장병들의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져 있었다.

독일군의 개입과 롬멜의 등장

이탈리아군의 연이은 패배는 히틀러를 당황시켰다. 독일은 발칸 반도와 북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를 구원하기 위해 직접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1941년 2월 에르빈 롬멜 장군이 이끄는 독일 아프리카 군단(DAK)이 리비아에 상륙했다. 롬멜은 후에 '사막의 여우'라 불리며 북아프리카 전선의 전설이 되었다.

그리스에서도 독일의 구원이 필요했다. 1941년 4월 6일 독일군이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동시에 침공하는 '마리타 작전'을 개시했다. 독일군의 전격전 앞에서 그리스군은 불과 3주 만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작전으로 독일은 소련 침공 계획인 '바르바로사 작전'을 6주나 연기해야 했다.

롬멜의 북아프리카 도착은 전선의 양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1941년 3월 24일부터 시작된 롬멜의 반격으로 영국군은 다시 이집트 국경까지 밀려났다. 토브룩만이 고립된 채 영국군의 손에 남았다. 이후 북아프리카는 롤러코스터 같은 공방전이 이어졌지만, 이탈리아군은 더 이상 주도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

엘 알라메인 전투와 결정적 패배

북아프리카 전선의 운명은 1942년 10월 23일 시작된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결정되었다.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이 지휘하는 영국 제8군은 롬멜의 독일-이탈리아 기갑군을 상대로 대공세를 펼쳤다. 이때 롬멜은 병가 중이었고, 게오르크 슈투메 장군이 임시로 지휘를 맡고 있었다.

영국군은 압도적인 물량으로 추축군을 압박했다. 전차 1,029대 대 547대, 항공기 750대 대 675대로 영국군이 우세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보급 상황이었다. 지중해에서 영국군의 제해권이 강화되면서 롬멜군의 보급선이 거의 차단된 상태였다. 연료와 탄약 부족으로 추축군은 제대로 된 기동전을 펼칠 수 없었다.

11월 4일 롬멜이 전선에 복귀했지만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었다. 롤멜은 히틀러의 '최후까지 저항하라'는 명령을 어기고 후퇴를 결정했다. 이탈리아군은 기동력이 부족해 대부분 현지에서 포로가 되었다. 아리에테 기갑사단과 파올지아 보병사단 등 정예 부대들이 전멸했다.

엘 알라메인 패배는 추축국에게 결정적 타격이었다. 처칠은 "이것이 끝은 아니다. 끝의 시작도 아니다. 하지만 시작의 끝일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 전투 이후 독일과 이탈리아는 북아프리카에서 수세에 몰렸고, 1943년 5월 마침내 튀니지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전쟁 경제와 국민들의 고통

장기화되는 전쟁은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극심한 고통을 안겨줬다. 1940년 6월 참전 당시 무솔리니가 약속했던 '짧고 영광스러운 전쟁'은 끝없는 악몽이 되어버렸다. 배급제가 도입되었지만 식량 부족은 갈수록 심각해졌다. 1942년부터는 빵 배급량이 하루 150그램으로 줄어들었다.

공업 생산도 연합군의 폭격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1940년부터 시작된 영국 공군의 이탈리아 본토 폭격은 1942년 이후 더욱 격화되었다. 밀라노, 토리노, 제노바 같은 공업 도시들이 집중 폭격을 받았고, 민간인 사상자도 급증했다. 피아트, 안살도 같은 주요 군수업체들의 생산 능력이 크게 저하되었다.

이탈리아군의 사상자도 급증했다. 1943년까지 이탈리아군의 전사자는 20만 명을 넘어섰고, 포로는 100만 명에 달했다. 특히 소련 전선에 파견된 이탈리아 제8군은 1942-43년 겨울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거의 전멸했다. 알피니 군단의 참극은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정치적 균열과 파시즘에 대한 회의

연이은 군사적 패배와 경제적 어려움은 파시스트 정권의 기반을 흔들기 시작했다. 무솔리니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는 급격히 떨어졌고, 파시스트 당 내부에서도 불만이 커졌다. 특히 디노 그란디, 갈레아초 치아노 같은 고위 간부들이 무솔리니의 전쟁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1943년 들어 반전 시위가 이탈리아 각지에서 벌어졌다. 북부 공업 지대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섰고, 여성들은 식량 폭동을 일으켰다. "바스타 라 게라(전쟁은 이제 그만)"라는 구호가 담벼락에 나타났다. 경찰과 블랙셔츠조차 시위 진압에 소극적이었다.

왕실과 군부에서도 무솔리니에 대한 의구심이 커졌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오랫동안 무솔리니에게 맡겨뒀던 권력을 되찾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피에트로 바돌리오 원수를 비롯한 군 고위층도 무솔리니의 계속된 실정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들은 독일과 별도의 강화를 추진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지중해 전략의 실패와 교훈

이탈리아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과 북아프리카 패전은 여러 차원에서 교훈을 준다. 무엇보다 무솔리니의 전략적 판단 착오가 결정적이었다. 그는 독일의 승리를 확신했지만, 영국의 저항 의지와 미국의 참전 가능성을 완전히 오판했다. 또한 이탈리아의 군사적 역량을 과대평가했고,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경제적 부담을 간과했다.

지중해에서 이탈리아가 추구한 '우리의 바다'(Mare Nostrum) 전략도 현실성이 부족했다. 영국의 지브롤터-몰타-수에즈 연결선을 차단하려는 시도는 실패했고, 오히려 이탈리아가 지중해에서 고립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해군력만으로는 현대전을 주도할 수 없으며, 공군력과 보급 능력이 더욱 중요함을 보여주었다.

무솔리니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 결정은 이탈리아 현대사의 분수령이 되었다. 에티오피아 전쟁의 일시적 성공에 도취되어 내린 이 치명적 선택은 파시즘의 몰락과 이탈리아의 분할을 초래했다. 그리스 전선과 북아프리카에서의 연이은 패배는 이탈리아군의 한계를 드러냈을 뿐 아니라, 독일에 대한 종속을 심화시켰다. 결국 무솔리니가 꿈꾸었던 지중해 제국은 허상에 불과했으며, 현실은 파괴와 고통, 그리고 수치스러운 패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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