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10월 28일 새벽, 수만 명의 검은셔츠가 로마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극적인 정치적 쿠데타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 "진군"은 실제로는 거의 총성 없이 이뤄진 정치적 연극에 가까웠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밀라노에서 안전하게 기다리며 전개 상황을 지켜보았고, 결국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국왕의 부름을 받아 총리가 됐다. 3년 전 겨우 4,795표를 얻었던 정치 신인이 이제 유럽의 한 강국을 통치하게 된 것이다. 로마 진군은 민주주의가 어떻게 내부로부터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가 됐다.
1922년 정치적 위기와 파시스트의 기회
1922년 들어 이탈리아 정치는 완전한 교착 상태에 빠졌다. 루이지 파크타 내각이 무너진 후 의회에서는 안정적인 다수파를 구성할 수 없었다. 자유주의 세력은 분열됐고, 사회주의당과 인민당(가톨릭)은 서로 연합하지 못했다. 더욱이 파시스트들의 의회 진출로 기존 정치 균형이 완전히 깨진 상태였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파시스트들은 체계적으로 권력 장악을 준비하고 있었다. 1922년 여름부터 이탈로 발보, 미켈레 비안키, 체사레 마리아 데 베키 등 파시스트 지도부는 "로마로의 진군" 계획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목표는 무력시위를 통해 정부를 압박하고 무솔리니를 총리로 임명하도록 강요하는 것이었다.
파시스트들에게는 여러 유리한 조건들이 있었다. 우선 지방에서의 권력 기반이 확고했다. 에밀리아-로마냐, 토스카나, 움브리아 등 중북부 지역은 이미 파시스트들이 실질적으로 통제하고 있었다. 또한 군대와 경찰 내에도 파시스트 동조자들이 상당수 있었다. 많은 장교들이 "강력한 정부"를 원하고 있었고, 파시스트들의 반사회주의 노선에 동감하고 있었다.
경제계의 지지도 중요한 요소였다. 북부 대기업들은 파업과 노동 분규에 지쳐있었고, 파시스트들이 "질서"를 회복해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피아트의 조반니 아녤리, 안살도의 피오 페리 등 주요 기업인들은 파시스트들에게 자금을 제공했다. 이들은 무솔리니가 "합리적인 독재자"가 되어 경제를 안정시킬 것이라고 믿었다.
나폴리 대회와 최후통첩
1922년 10월 24일 나폴리에서 열린 파시스트 전국대회는 로마 진군의 전야제였다. 4만 명의 파시스트들이 나폴리에 집결하여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무솔리니는 연단에서 "우리는 정부가 되거나 아니면 무력으로 정부를 장악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는 기존 정치권에 대한 공개적인 최후통첩이었다.
나폴리 대회에서 파시스트들은 구체적인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의회 해산, 새로운 선거법 제정, 파시스트 주도의 새 정부 구성 등이 핵심 내용이었다. 만약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혁명적 행동"에 나서겠다고 위협했다. 이는 사실상 헌법 질서에 대한 도전장이었다.
대회 기간 동안 파시스트들은 자신들의 힘을 과시했다. 검은셔츠 부대들이 나폴리 시내를 행진했고, 파시스트 깃발이 곳곳에 걸렸다. 정부군은 이를 저지하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일부는 파시스트들과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는 무솔리니에게 "정부에 저항할 물리적 힘이 거의 없다"는 확신을 줬다.
무솔리니는 나폴리에서 은밀히 보수 정치인들과 접촉했다. 안토니오 살란드라, 시드니 손니노 같은 자유주의 원로들은 파시스트들과의 연립을 고려하고 있었다. 이들은 파시스트들을 "주니어 파트너"로 활용할 수 있다고 계산했다. 하지만 무솔리니는 이미 "동등한 파트너십"이 아닌 "주도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로마 진군의 실제 과정
10월 27일 밤, 파시스트들은 마침내 행동에 나섰다. 사전에 정해진 계획에 따라 3개 방향에서 로마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북쪽에서는 발보가 이끄는 부대가, 동쪽에서는 데 베키의 부대가, 남쪽에서는 데 보노 장군의 부대가 각각 로마를 향해 이동했다. 총 3만여 명의 파시스트들이 참여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제 진군의 모습은 매우 어설펐다. 파시스트들의 무기는 대부분 곤봉이나 구식 소총이었고, 조직도 체계적이지 못했다. 비까지 내려서 진군 부대들은 진흙투성이가 됐다. 많은 파시스트들이 중도에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만약 정부군이 진지하게 저항했다면 쉽게 진압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문제는 정부의 대응이었다. 루이지 파크타 총리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려 했다. 하지만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국왕이 계엄령 서명을 거부했다. 국왕은 "내전을 피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파시스트들의 힘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또한 일부 왕실 측근들이 파시스트들과 은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의혹도 있었다.
국왕의 계엄령 거부로 파크타 내각은 총사퇴했고, 이탈리아는 사실상 정부 공백 상태가 됐다. 이 순간 파시스트들은 "승리"를 확신했다. 로마 시내에서는 파시스트 동조자들이 거리로 나와 환호했고, 정부 청사들이 하나씩 파시스트들의 손에 넘어갔다. 경찰도 저항하지 않았고, 오히려 파시스트들과 악수를 나누는 모습까지 보였다.
무솔리니의 신중한 계산
정작 무솔리니는 이 극적인 순간에 로마에 있지 않았다. 그는 밀라노의 『일 포폴로 디탈리아』 신문사 사무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는 매우 계산된 행동이었다. 만약 로마 진군이 실패할 경우, 자신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고 변명할 수 있었다. 반대로 성공할 경우에는 "지혜로운 지도자"로 부각될 수 있었다.
무솔리니는 동시에 여러 옵션을 열어두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살란드라 같은 보수 정치인들과 연립 협상을 진행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파시스트들의 "혁명"을 지원했다. 이러한 이중 전략은 그의 정치적 감각을 보여준다. 그는 결코 모험을 좋아하는 혁명가가 아니라 기회주의적인 정치인이었다.
10월 29일 오후, 국왕으로부터 로마로 오라는 전보가 도착했다. 무솔리니는 침착하게 야간 열차표를 예약했다. 그는 검은셔츠가 아닌 평범한 정장을 입고 로마로 향했다. 이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그는 "혁명가"가 아닌 "정치인"으로서 권력을 잡으려 했다. 이러한 모습은 보수 세력들을 안심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로마에 도착한 무솔리니는 곧바로 퀴리날레 궁으로 향했다. 국왕과의 면담은 매우 짧았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무솔리니에게 조건 없이 총리직을 제안했다. 39세의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역사상 최연소 총리가 됐다. 그는 즉석에서 수락했지만, 겉으로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이는 연출된 것이었다.
국왕의 결정적 역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역할은 파시즘 집권에서 결정적이었다. 국왕이 계엄령을 승인했다면 로마 진군은 쉽게 진압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파시스트들의 요구에 굴복했다. 이는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우선 국왕은 파시스트들의 실제 힘을 과대평가했다. 정보 기관들이 파시스트 세력을 실제보다 과장해서 보고했고, 국왕은 이를 믿었다. 또한 내전에 대한 공포도 있었다. 국왕은 러시아 혁명 때 니콜라이 2세의 운명을 기억하고 있었고, 이탈리아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다.
정치적 계산도 중요했다. 국왕과 측근들은 의회 정치의 혼란에 지쳐있었다. 자유주의 정치인들은 안정적인 정부를 구성하지 못했고, 사회주의자들은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파시스트들이 "강력한 정부"를 만들어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왕실은 무솔리니를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했다.
개인적 성격도 영향을 미쳤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본래 우유부단하고 갈등을 피하려는 성향이 강했다. 키도 작고(155cm) 체구도 왜소해서 "동전 임금"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였다. 이런 인물이 역사적 순간에 결단력 있는 선택을 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그는 "흐름에 따라가는" 선택을 했다.
보수 세력의 치명적 오판
로마 진군 성공에는 보수 세력들의 협력이 결정적이었다. 안토니오 살란드라, 시드니 손니노 같은 자유주의 원로들은 파시스트들과 손을 잡으면 이들을 "길들일"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보수파가 히틀러를 "활용"하려 했던 것과 유사한 착각이었다.
이들의 계산은 이런 것이었다. 파시스트들은 아직 정치 경험이 부족하고 조직도 미숙하다. 따라서 연립정부에서 주도권을 잡고 이들을 서서히 체제 내로 편입시킬 수 있다. 동시에 파시스트들의 반사회주의 에너지를 활용하여 좌파 세력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안정적인 우파 정치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러한 계산은 완전히 틀렸다. 무솔리니는 처음부터 "주니어 파트너"가 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이미 파시스트당의 절대적 지도자였고, 전국적인 조직력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그는 정치적 본능이 뛰어났고, 권력 투쟁에서 매우 교활했다. 보수 정치인들은 "늙은 여우"와 협상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굶주린 늑대"를 상대하고 있었다.
가톨릭 세력의 태도도 애매했다. 루이지 스투르초가 이끄는 인민당은 공식적으로는 파시즘에 반대했지만, 실제로는 효과적인 저항을 하지 못했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파시스트들의 반사회주의 노선을 지지했고, 교회 위계에서도 "질서 회복"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이러한 분열된 태도는 파시스트들에게 도움이 됐다.
군대와 경찰의 중립
로마 진군이 성공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중요한 요인은 군대와 경찰의 사실상 중립이었다. 많은 장교들이 파시스트들에게 동조하고 있었고, 일부는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특히 아르만도 디아즈 장군 같은 전쟁 영웅들이 파시스트들을 지지한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군대 내 파시스트 동조 현상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우선 많은 장교들이 전후 군비 축소와 예산 삭감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절름발이 승리"에 대한 분노도 있었다. 파시스트들이 "강한 이탈리아"를 약속하는 것은 이들에게 매력적이었다. 무엇보다 사회주의자들의 반군국주의와 평화주의가 군인들에게는 위협으로 느껴졌다.
경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지방에서 파시스트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이들과 유대감을 형성한 경찰관들이 많았다. 또한 파시스트들이 "법과 질서"를 강조하는 것이 경찰의 가치관과 부합했다. 무엇보다 정부의 명확한 지시가 없는 상황에서 경찰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랐다.
이러한 상황에서 로마 진군에 대한 물리적 저항은 거의 불가능했다. 파시스트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실제로 로마 시내에서는 경찰이 파시스트들과 악수하고 사진을 찍는 모습들이 목격됐다. 이는 상징적으로 구 체제의 항복을 의미했다.
새로운 정부의 출범
10월 30일 무솔리니는 공식적으로 총리에 임명됐다. 그의 첫 번째 내각은 의외로 "온건한" 구성이었다. 22명의 각료 중 파시스트는 4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자유주의자, 민족주의자, 가톨릭 등 기존 정치인들이었다. 이는 보수 세력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전략이었다.
하지만 핵심 부처는 파시스트들이 장악했다. 무솔리니 자신이 총리 겸 내무장관을 맡았고, 내무부는 전국의 경찰과 지방 행정을 통제하는 핵심 부서였다. 또한 공공사업부와 식민지부도 파시스트들이 맡았다. 이를 통해 파시스트들은 정부 기구의 핵심을 장악할 수 있었다.
무솔리니의 첫 의회 연설은 매우 도발적이었다. 그는 "나는 이 어둡고 음침한 의회당을 군막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는 파시스트들이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했다는 것을 공공연히 자랑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기존 정치 세력들에게 "저항하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했다.
하지만 의회는 무솔리니에게 신임투표를 해줬다. 306표 대 116표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는 파시스트들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자와 일부 가톨릭까지 무솔리니를 지지했다는 의미였다. 많은 의원들이 "안정된 정부"에 대한 기대감으로 파시스트들에게 기회를 주기로 한 것이다.
결론
1922년 로마 진군은 20세기 유럽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다. 이는 민주주의가 어떻게 내부로부터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가 됐다. 파시스트들은 폭력적 혁명보다는 기존 엘리트들과의 협력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이는 나중에 나치 독일에서도 비슷하게 반복될 패턴이었다.
로마 진군의 성공 요인은 복합적이었다. 파시스트들의 조직력과 폭력, 보수 세력의 오판과 협력, 국왕의 우유부단함, 군대와 경찰의 중립, 그리고 무엇보다 기존 민주주의 세력들의 분열과 무력함이 모두 작용했다. 특히 "파시스트들을 이용해서 통제할 수 있다"는 보수 엘리트들의 착각은 치명적이었다.
무솔리니는 이제 이탈리아의 총리가 됐지만, 아직 독재자는 아니었다. 그에게는 여전히 의회와 국왕, 그리고 연립 파트너들이라는 제약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권력 확대를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로마 진군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이제 무솔리니는 합법적 수단과 폭력을 교묘히 결합하여 완전한 독재 체제를 구축해나갈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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