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이탈리아 역사 78. 1943년 무솔리니 실각과 바돌리오 전환 - 파시즘의 몰락과 연합군 상륙의 혼란

SSSCH 2025. 6. 23. 23:29
반응형

1943년 7월 25일 저녁, 20년 넘게 이탈리아를 지배해온 베니토 무솔리니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에 의해 해임되었다. 파시즘의 창시자이자 독재자였던 무솔리니는 왕궁을 나서는 순간 카라비니에리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는 이탈리아 현대사의 가장 극적인 전환점 중 하나였으며, 동시에 새로운 혼란의 시작이기도 했다.

파시즘 체제의 내부 균열과 그란 파시스모 회의

1943년 상반기 이탈리아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시칠리아 상륙을 앞둔 연합군의 폭격이 이탈리아 본토를 강타했고, 북아프리카에서는 마지막 저항선이 무너지고 있었다. 5월 13일 튀니지의 추축군이 항복하면서 25만 명의 독일-이탈리아군이 포로가 되었다. 이탈리아 국민들의 전쟁에 대한 염증은 극에 달했다.

파시스트 대평의회(Gran Consiglio del Fascismo) 내부에서도 무솔리니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디노 그란디 백작, 갈레아초 치아노 외상, 지우제페 보타이 교육장관 등 파시즘 초기부터 함께해온 고위 간부들이 무솔리니의 전쟁 지휘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이들은 무솔리니가 히틀러에게 너무 종속되어 이탈리아의 국익을 망치고 있다고 판단했다.

7월 19일 로마가 연합군의 대규모 폭격을 받은 사건은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산 로렌초 성당과 베라노 묘지가 폭격당하면서 수백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무솔리니가 폭격 현장을 방문했을 때 분노한 로마 시민들이 "바스타! 바스타!(그만! 그만!)"라고 외치며 항의했다. 파시즘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완전히 무너진 순간이었다.

그란디는 7월 16일부터 동지들과 함께 무솔리니 축출 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그들의 목표는 파시즘 체제를 유지하면서 무솔리니만 제거하고, 독일과의 별도 강화를 통해 이탈리아를 구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너무 늦은 계산이었다.

7월 24일-25일의 결정적 48시간

7월 24일 오후 5시, 파시스트 대평의회가 소집되었다. 이는 1939년 이후 처음 열리는 회의였다. 무솔리니는 전쟁 상황을 보고하며 독일과의 연대를 강조했지만, 참석자들의 표정은 차갑기만 했다. 그란디가 준비한 결의안이 상정되었다. "정부의 모든 기능을 국왕 폐하에게 돌려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격론이 밤새 계속되었다. 무솔리니는 자신의 20년 통치를 변호했지만, 한때 충성스러웠던 동지들은 더 이상 그의 편이 아니었다. 새벽 2시 40분, 표결이 실시되었다. 28명 중 19명이 그란디의 결의안에 찬성했다. 치아노, 보타이, 데 보노 원수 등이 모두 무솔리니를 배신했다.

무솔리니는 충격을 받았지만 겉으로는 침착함을 유지했다. "여러분은 나의 시체에 대해 투표했다"라고 말한 뒤 회의를 종료했다. 하지만 대평의회의 결의는 법적 구속력이 없었다. 진짜 결정권은 국왕에게 있었다.

7월 25일 오후 5시, 무솔리니는 국왕의 소환을 받고 왕궁으로 향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20분간의 짧은 면담에서 무솔리니에게 사임을 요구했다. "나의 친애하는 두체, 상황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 군대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병사들은 더 이상 싸우려 하지 않는다." 국왕의 말은 냉정했다.

바돌리오 정부의 출범과 이중 게임

무솔리니가 체포된 직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피에트로 바돌리오 원수를 새 총리로 임명했다. 바돌리오는 에티오피아 전쟁의 영웅이었지만 그리스 침공의 실패로 1940년 말 사임했던 인물이었다. 76세의 고령인 그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군인으로 여겨졌다.

바돌리오 정부는 처음부터 모순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독일과의 동맹을 유지한다고 선언하면서도, 비밀리에는 연합군과 별도 강화를 추진했다. "전쟁은 계속된다"라는 공식 발표와 함께 파시스트 당만 해산시켰다. 이러한 이중 게임은 곧 치명적인 결과를 낳게 된다.

히틀러는 무솔리니의 실각 소식을 듣고 분노했다. 그는 즉시 '알라리히 작전'을 발동하여 이탈리아에 독일군을 대량 투입했다. 롬멜의 B집단군이 북부 이탈리아로 이동했고, 하인리히 폰 피티노프 장군의 제10군이 중부 이탈리아에 배치되었다. 독일은 이탈리아의 배신에 대비한 준비를 철저히 했다.

이탈리아 국민들은 무솔리니의 실각을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로마, 밀라노, 나폴리 등 주요 도시에서 자발적인 축제가 벌어졌다. 사람들은 파시즘의 상징물들을 부수고 무솔리니의 초상화를 찢었다. "피니토 라 게라!(전쟁이 끝났다!)"라는 외침이 거리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이러한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시칠리아 상륙과 이탈리아군의 붕괴

무솔리니 실각 15일 전인 7월 10일, 연합군은 '허스키 작전'을 개시하여 시칠리아에 상륙했다. 몽고메리의 영국 제8군과 조지 패튼의 미군 제7군이 동시에 시칠리아 남동쪽 해안에 상륙했다. 이는 사상 최대 규모의 상륙 작전이었다.

시칠리아 방어를 담당한 이탈리아 제6군은 허약한 저항만 보인 채 붕괴되었다. 알프레도 구촌니 장군이 지휘하는 이탈리아군은 장비도 부족하고 사기도 땅에 떨어진 상태였다. 많은 이탈리아 병사들이 자발적으로 항복했고, 일부는 탈영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반면 독일군의 저항은 완강했다. 한스 후베 장군의 제14기갑군단은 시칠리아 동북부에서 치열하게 맞섰다. 특히 에트나 산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는 연합군에게 예상보다 큰 손실을 입혔다. 하지만 8월 17일 메시나가 함락되면서 시칠리아 전체가 연합군의 손에 넘어갔다.

시칠리아 전역은 이탈리아군의 전투 의지가 완전히 무너졌음을 보여주었다. 13만 명의 이탈리아군이 포로가 되었지만, 6만 명의 독일군은 대부분 메시나 해협을 건너 본토로 철수에 성공했다. 이는 연합군의 실수이기도 했지만,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의 전투력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비밀 강화 협상과 카시빌레 협정

바돌리오 정부는 시칠리아 함락 직후부터 연합군과의 비밀 협상을 본격화했다. 7월 말부터 중간자를 통해 접촉이 시작되었고, 8월에는 조제페 카스텔라노 장군이 리스본을 거쳐 연합군과 직접 협상에 나섰다. 이탈리아 측은 조건부 항복을 제안했지만, 연합군은 무조건 항복만을 요구했다.

협상 과정에서 이탈리아의 딜레마가 드러났다. 독일군이 이탈리아 전역에 배치되어 있는 상황에서 성급한 항복은 독일의 즉각적인 보복을 초래할 수 있었다. 바돌리오는 연합군의 로마 공수 작전을 요구했지만, 연합군은 이를 거부했다. 이탈리아군의 전투력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9월 3일, 마침내 카시빌레에서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탈리아는 무조건 항복을 수용했고, 독일에 대해서는 적대 행위를 중단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협정은 비밀로 유지되었다. 바돌리오는 연합군의 이탈리아 본토 상륙과 동시에 발표하기로 합의했다.

협정 내용은 이탈리아에게 가혹했다. 모든 이탈리아군의 무장 해제, 연합군에 대한 기지 제공, 전쟁 포로 송환 등이 포함되었다. 사실상 이탈리아의 주권을 포기하는 내용이었지만, 바돌리오 정부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9월 8일 발표와 정부의 도주

9월 8일 오후 6시 30분, 아이젠하워 연합군 최고사령관이 라디오를 통해 이탈리아의 항복을 발표했다. 2시간 후 바돌리오도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휴전을 알렸다. "이탈리아 정부는 아이젠하워 장군과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는 간단한 발표였다.

하지만 정작 이탈리아군에게는 구체적인 지시가 내려지지 않았다. 독일군과 싸워야 하는지, 항복해야 하는지, 아니면 중립을 지켜야 하는지 아무도 몰랐다. 이러한 혼란은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국왕과 바돌리오가 9월 9일 새벽 로마를 도망쳤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독일군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브린디시로 피신했다. 수도의 최고 지휘부가 사라진 상황에서 이탈리아군은 완전히 무너졌다.

로마에서는 카를로 칼비 디 베르골로 장군이 독일군에 저항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9월 10일 로마가 독일군에 점령되면서 이탈리아 중부와 북부는 사실상 독일의 점령지가 되었다. 이탈리아는 연합군이 점령한 남부와 독일군이 장악한 중북부로 분할되었다.

살로 공화국의 수립과 무솔리니의 복귀

9월 12일, 오토 스코르체니가 이끄는 독일 특수부대가 그란 사소에서 무솔리니를 구출했다. '오크 작전'이라 불린 이 구출 작전은 글라이더를 이용한 기습 작전이었다. 무솔리니는 히틀러를 만난 후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와 괴뢰 정부를 수립했다.

9월 23일, 무솔리니는 가르다 호수 연안의 살로에서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RSI) 수립을 선언했다. 이는 '살로 공화국'이라고 불렸다. 하지만 이는 독일의 완전한 괴뢰 정권이었다. 실질적인 권력은 모두 독일군 사령부에 있었고, 무솔리니는 히틀러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살로 공화국은 파시즘의 원점 회귀를 주장했다. 무솔리니는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계급을 비판하며 '사회화' 정책을 추진했다고 선전했다. 하지만 이는 공허한 구호에 불과했다. 독일군의 점령 하에서 이탈리아 북부의 자원과 노동력은 독일 전쟁 수행을 위해 수탈되었다.

이탈리아군의 해체와 국가 분열

휴전 협정 발표 후 이탈리아군은 급속히 해체되었다. 명확한 지휘 체계의 부재 속에서 각 부대는 제각각 다른 선택을 했다. 일부는 독일군에 항복했고, 일부는 연합군 쪽으로 넘어갔으며, 또 다른 일부는 무기를 버리고 해산했다.

60만 명의 이탈리아군이 독일군에 포로로 잡혔다. 이들은 '협력 거부자'(IMI: Internati Militari Italiani)라는 애매한 지위로 독일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정식 전쟁 포로도 아니고 민간인도 아닌 이들은 열악한 대우를 받으며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다.

일부 부대는 용감하게 저항했다. 9월 9일 케팔로니아 섬에서 아퀴 사단이 독일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9월 26일까지 저항한 끝에 전멸했다. 5천 명의 이탈리아 병사들이 전사했다. 이는 9월 8일 이후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였다.

도데카네스 제도에서도 비슷한 비극이 벌어졌다. 로도스 섬과 코스 섬의 이탈리아군이 영국군과 협력하여 독일군에 저항했지만, 결국 독일군의 반격으로 괴멸되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이탈리아군의 명예를 지켜주었지만, 동시에 국가 분열의 비극을 상징하기도 했다.

새로운 이탈리아의 모색과 혼란의 지속

바돌리오 정부는 브린디시에서 '이탈리아 왕국의 합법 정부'임을 주장했다. 연합군의 보호 하에 점차 남부 이탈리아를 장악해 나갔지만, 국민들의 신뢰는 땅에 떨어진 상태였다. 국왕의 도주는 왕정에 대한 치명적 타격이었다.

이탈리아는 '공동 교전국'(cobelligerent)이라는 애매한 지위를 얻었다. 정식 연합국은 아니지만 독일에 맞서 싸우는 동맹이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연합군의 점령지 관리를 돕는 역할에 불과했다. 주권 회복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정치적으로도 혼란이 지속되었다. 파시즘 붕괴 후 억압받았던 정치 세력들이 다시 등장했지만, 20년 넘게 지속된 독재의 후유증은 쉽게 치유되지 않았다. 공산당, 사회당, 자유당, 기독민주당 등이 활동을 재개했지만, 당면한 과제는 산적해 있었다.

1943년 하반기 이탈리아의 상황은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였다. 무솔리니의 실각으로 파시즘은 몰락했지만, 그 후유증은 오래도록 이탈리아를 괴롭혔다. 바돌리오 정부의 우유부단한 정책과 국왕의 도주는 새로운 혼란을 가중시켰다. 북부의 살로 공화국과 남부의 바돌리오 정부로 분열된 이탈리아는 더 이상 통일된 국가가 아니었다. 이러한 분열과 혼란은 앞으로 2년간 계속될 레지스탕스와 내전의 전조였으며, 새로운 이탈리아가 탄생하기까지의 고통스러운 진통의 시작이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