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이탈리아 역사 79. 파르티잔 레지스탕스와 1945년 해방 - 민족해방위원회의 투쟁과 내전의 비극

SSSCH 2025. 6. 23.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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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9월 8일 휴전 협정 발표 이후 이탈리아는 새로운 형태의 전쟁에 휘말렸다. 독일군의 점령과 살로 공화국에 맞서 수많은 이탈리아인들이 무기를 들고 일어났다. 파르티잔(빨치산) 운동은 단순한 저항을 넘어 새로운 이탈리아의 건설을 위한 민족 해방 투쟁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이탈리아는 동족상잔의 내전을 경험해야 했다.

레지스탕스의 시작과 민족해방위원회 결성

휴전 협정 직후 혼란 속에서 이탈리아 각지에는 자발적인 저항 조직들이 생겨났다. 해산된 이탈리아군 병사들, 반파시즘 정치인들, 일반 시민들이 독일군과 파시스트들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산발적이고 조직화되지 않은 활동이었지만, 점차 체계적인 저항 운동으로 발전했다.

1943년 9월 9일 로마에서 민족해방위원회(CLN: Comitato di Liberazione Nazionale)가 결성되었다. 이는 이반오에 보노미를 중심으로 반파시즘 6개 정당이 연합하여 만든 조직이었다. 공산당(팔미로 톨리아티), 사회당(피에트로 네니), 행동당(우고 라 말파), 자유당(베네데토 크로체), 노동민주당, 기독민주당(알치데 데 가스페리)이 참여했다.

CLN의 목표는 명확했다. 독일 점령군과 파시스트 정권을 축출하고, 민주주의를 복원하며, 새로운 이탈리아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각 정당의 정치적 지향은 달랐다. 공산당과 사회당은 사회주의 혁명을 원했고, 자유당과 기독민주당은 온건한 개혁을 추구했다. 이러한 차이는 나중에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CLNAI(북부 이탈리아 민족해방위원회)가 결성되었다. 밀라노를 중심으로 한 이 조직은 실질적인 무장 투쟁을 지휘했다. 루이지 롱고(공산당), 레오 발리아니(행동당), 로돌포 모란디(사회당) 등이 핵심 인물이었다. CLNAI는 연합군이 도달하기 전까지 북부 해방을 위한 총지휘부 역할을 했다.

파르티잔 부대의 조직과 활동

파르티잔 부대는 정치적 성향에 따라 다양하게 조직되었다. 공산당 계열의 '가리발디 여단'이 가장 규모가 컸고 조직적이었다. 이들은 스페인 내전 경험자들과 소련에서 훈련받은 간부들이 이끌었다. 가리발디 여단은 엄격한 정치 교육과 군사 훈련을 통해 높은 전투력을 보여주었다.

행동당 계열의 '정의와 자유' 부대는 주로 지식인과 학생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규모는 작았지만 도시에서의 파괴 공작과 정보 수집에 뛰어났다. 가톨릭 계열의 부대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주로 농촌 지역에서 활동했다. 자유주의 계열과 군주제 지지 부대들도 각각 활동 영역을 가지고 있었다.

1944년 말까지 파르티잔 수는 약 25만 명에 달했다. 이들은 주로 알프스와 아펜니노 산맥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게릴라 전술을 구사했다. 독일군의 보급선을 차단하고, 통신 시설을 파괴하며, 협력자들을 처단했다. 특히 철도 파괴 작전은 독일군의 북부 이탈리아 방어에 큰 타격을 주었다.

여성들도 레지스탕스에 적극 참여했다. 약 7만 명의 여성이 다양한 형태로 저항 운동에 가담했다. 이들은 정보 수집, 무기 운반, 부상자 치료, 선전 활동 등을 담당했다. 일부는 직접 무기를 들고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 여성 파르티잔들의 활동은 전후 여성 해방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독일군의 잔혹한 보복과 민간인 학살

독일군은 파르티잔 활동에 대해 극도로 잔혹한 보복을 가했다. 알베르트 케셀링 원수가 지휘하는 독일 C집단군은 '테러에는 테러로' 대응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독일군 1명이 죽으면 이탈리아인 10명을, 부상당하면 5명을 처형한다는 명령이 내려졌다.

1944년 3월 23일 로마에서 발생한 비아 라사엘라 사건은 이러한 보복의 대표적 사례였다. GAP(애국행동단) 소속 파르티잔들이 독일 경찰 부대를 공격해 33명을 사살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독일군은 이틀 후 아르데아티네 석굴에서 335명의 이탈리아인을 학살했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파르티잔과는 무관한 일반인들이었다.

산타안나 디 스타차마 학살(1944년 8월 12일)은 더욱 참혹했다. 독일 SS부대가 토스카나의 작은 마을을 습격해 560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여성, 어린이, 노인 할 것 없이 무차별 살육이 자행되었다. 이는 파르티잔 활동에 대한 집단 보복이었지만, 실제로는 무고한 농민들만 희생되었다.

마르차보토 학살(1944년 9월-10월)에서는 1,830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독일군은 보복을 넘어 이탈리아인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려 했다. 하지만 이러한 잔혹 행위는 오히려 더 많은 이탈리아인들을 레지스탕스로 내몰았다. 독일군에 대한 증오가 깊어질수록 저항 의지도 더욱 강해졌다.

살로 공화국군과 내전의 양상

파르티잔들이 맞서 싸운 상대는 독일군만이 아니었다. 무솔리니의 살로 공화국은 자체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공화국 국민수비대(GNR), 베르살리에리 부대, 흑셔츠 민병대 등이 파르티잔 토벌에 나섰다. 이들은 독일군보다도 더 잔혹하게 동족을 학살했다.

특히 악명 높았던 것은 레나토 리치 소령이 지휘한 부대였다. 이들은 '검은 악마들'이라 불리며 파르티잔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학살했다. 피에몬테와 리구리아 지역에서 자행된 학살의 상당 부분이 이들의 소행이었다. 같은 이탈리아인끼리 벌인 이러한 내전은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상처로 남았다.

일부 지역에서는 파르티잔들이 사실상 해방구를 건설하기도 했다. 1944년 여름 발 도시올라의 '오시올라 공화국'과 알바 공화국 등이 그 예였다. 이들 지역에서는 파르티잔들이 자치 정부를 구성하고 새로운 사회 질서를 실험했다. 하지만 독일군의 대대적인 소탕 작전으로 오래가지는 못했다.

내전의 성격은 지역마다 달랐다. 북부 공업 지대에서는 계급 갈등의 성격이 강했고, 농촌 지역에서는 지주와 소작농 간의 갈등이 두드러졌다. 일부 지역에서는 종교적 대립도 나타났다. 이러한 복합적 갈등이 해방 후 정치적 혼란의 배경이 되었다.

연합군의 진격과 파르티잔의 역할

1944년 6월 4일 로마가 해방된 후 연합군의 북진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독일군은 고딕선에서 완강히 저항했고, 연합군의 진격은 예상보다 더뎠다. 이 시기 파르티잔들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 이들은 연합군의 정보 수집을 돕고, 독일군의 후방을 교란했으며, 지역 해방에 직접 참여했다.

1944년 가을부터 파르티잔 활동이 절정에 달했다. 알렉산더 연합군 사령관은 겨울 동안 공세를 중단한다고 발표했지만, 파르티잔들은 활동을 계속했다. 이는 큰 희생을 수반했다. 겨울 산악전에서 많은 파르티잔들이 동사하거나 독일군의 토벌 작전에 희생되었다.

1945년 봄 최후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4월 9일 연합군이 포 강 일대에서 대공세를 개시하자, CLNAI도 4월 19일 밀라노에서 총봉기를 선언했다. 수만 명의 파르티잔들이 도시로 내려와 독일군과 파시스트들을 공격했다. 토리노, 제노바, 베네치아 등 주요 도시들이 연합군 도착 전에 파르티잔들에 의해 해방되었다.

밀라노는 4월 25일 완전히 해방되었다. 이날은 후에 이탈리아 해방절로 지정되었다. 파르티잔들은 도시의 주요 시설을 점령하고 질서를 유지했다. 공장과 사회 기반 시설을 파괴로부터 보호하는 것도 이들의 중요한 임무였다. 독일군은 철수하면서 모든 것을 파괴하려 했지만, 파르티잔들의 활약으로 많은 시설이 보존되었다.

무솔리니의 최후와 파시즘의 종언

도망치던 무솔리니는 4월 27일 코모 호수 근처 돈고에서 공산당 파르티잔들에게 붙잡혔다. 그는 독일군 호송대에 섞여 스위스로 도망치려 했지만, 발터 아우디시오 지휘관이 이끄는 가리발디 52여단에 발각되었다. 함께 잡힌 애인 클라라 페타치와 함께 총살당했다.

4월 29일 무솔리니와 클라라 페타치, 그리고 다른 파시스트 간부들의 시신이 밀라노 로레토 광장에 거꾸로 매달렸다. 분노한 군중들이 시신에 침을 뱉고 돌을 던졌다. 이는 파시즘에 대한 20년간 억압받았던 민중의 분노가 폭발한 장면이었다. 동시에 무솔리니의 죽음은 파시즘의 완전한 종언을 상징했다.

무솔리니의 죽음을 둘러싸고는 여러 논란이 있었다. 누가 직접 총살을 집행했는지, 왜 그 자리에서 즉결 처형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죽음이 파르티잔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는 이탈리아인들이 스스로 파시즘을 청산했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졌다.

독일군도 빠르게 붕괴되었다. 5월 2일 카시미르 폰 자우켄 장군이 CLNAI에 항복했다. 이로써 이탈리아에서의 전쟁이 완전히 끝났다. 독일 전체의 항복보다 6일 빠른 항복이었다. 이는 파르티잔들의 맹활약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해방과 새로운 갈등의 시작

해방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전쟁이 끝나자 파르티잔들 사이의 정치적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공산당은 혁명을 통한 사회주의 건설을 원했고, 온건파들은 점진적 개혁을 추구했다. 무기를 소지한 파르티잔들의 존재는 정치적 불안 요소가 되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해방 직후 무분별한 복수가 이어졌다. 파시스트 협력자들과 그 가족들이 민중 재판에 의해 처형되었다. '삼각 처형'이라 불린 이러한 사적 복수는 수천 명의 희생자를 낳았다.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지만, 대략 1만 2천 명에서 2만 명 정도가 해방 직후 복수의 희생양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북부 지역에서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들이 트리에스테와 이스트리아 반도를 점령하면서 이탈리아계 주민들을 대량 학살했다. '포이베'라 불린 이 사건에서 수천 명의 이탈리아인들이 카르스트 지형의 깊은 구덩이에 던져져 죽었다. 이는 새로운 민족 갈등의 시작이었다.

경제적 문제도 심각했다.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와 공장, 끊어진 교통망, 극심한 인플레이션 등이 해방된 이탈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백만 명의 난민과 실업자들이 거리를 배회했다. 파르티잔들 중 상당수가 일자리를 찾지 못해 사회 불안 요소가 되었다.

레지스탕스의 역사적 의의와 한계

이탈리아 레지스탕스는 유럽 전체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조직적인 저항 운동 중 하나였다. 25만 명의 파르티잔이 활동했고, 이 중 4만 5천 명이 전사했다. 이들의 희생으로 이탈리아는 외국 점령군을 축출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할 수 있었다. 파르티잔 운동은 새로운 이탈리아 공화국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레지스탕스는 또한 사회 변화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 여성의 정치 참여, 노동자의 권리 신장, 남북 간 연대 강화 등이 이루어졌다. 특히 여성들의 대거 참여는 전후 여성 참정권 획득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계급과 지역을 초월한 연대 경험은 새로운 민주주의의 기초가 되었다.

하지만 레지스탕스에는 한계도 있었다. 정치적 분열로 인한 내부 갈등, 일부 지역에서의 과도한 보복, 그리고 해방 후 무기 반납 문제 등이 그것이다. 특히 공산당의 영향력 확대에 대한 서방의 우려는 냉전 시대 이탈리아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레지스탕스가 이탈리아인들에게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었다는 점이다. 파시즘의 독재와 외국의 점령을 경험한 이탈리아인들은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는 전후 이탈리아 민주주의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이어진 레지스탕스는 이탈리아 현대사의 가장 영광스러운 페이지 중 하나다.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조국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쳤고, 그들의 희생으로 새로운 이탈리아가 탄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내전의 상처와 정치적 분열도 남겼다. 해방의 기쁨과 함께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었고, 이탈리아는 폐허에서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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