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이탈리아 역사 75. 아체르보 선거법과 국가 구제 독재: 무솔리니가 합법적 수단으로 독재 체제를 구축하는 과정

SSSCH 2025. 6. 21.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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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10월 권력을 장악한 무솔리니는 여전히 많은 제약에 직면해 있었다. 연립정부에서 파시스트는 소수였고, 의회에서도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했다. 국왕과 기존 엘리트들은 언제든 그를 해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솔리니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는 점진적이고 교묘한 방법으로 반대 세력들을 하나씩 제거해나갔다. 1923년 아체르보 선거법 통과와 1924년 마테오티 사건은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분수령이 됐다. 무솔리니는 합법성의 외피를 유지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독재 체제를 구축해갔다. 이는 20세기 권위주의 정치의 전형적인 패턴이 됐다.

초기 연립정부와 점진적 권력 장악

무솔리니의 첫 번째 내각은 겉보기에는 연합정부였다. 22명의 각료 중 파시스트는 단 4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자유주의자, 민족주의자, 가톨릭 인민당 출신이었다. 이는 기존 정치 세력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의도적 전략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파시스트들도 결국 정상적인 정치를 할 것"이라고 안도했다.

하지만 무솔리니는 핵심 부처들을 확실히 장악했다. 그 자신이 총리 겸 내무장관을 맡았고, 이는 전국의 경찰과 지방 행정을 통제한다는 의미였다. 또한 알도 오비니가 사법장관이 되어 법원과 검찰을 장악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재정 문제였는데, 알베르토 데 스테파니를 재무장관으로 임명하여 경제 정책을 맡겼다.

무솔리니는 처음에는 의외로 온건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유지했고, 교회와도 화해 제스처를 보였다. 또한 의회 정치를 존중한다고 공언했다. 이러한 태도는 보수 세력들의 의구심을 누그러뜨렸다. 『코리에레 델라 세라』 같은 주요 언론들도 "무솔리니가 현실적인 정치인으로 변모하고 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동시에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조직을 지속적으로 강화했다. 1923년 1월 '자발적 국가보안대(MVSN)'를 창설하여 스쿠아드리스티들을 정식 국가 기구에 편입시켰다. 이는 겉으로는 "질서 유지"를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파시스트들만의 사병을 국가가 공식 인정한 것이었다. 검은셔츠들이 이제 국가 예산으로 급여를 받는 준군사조직이 된 것이다.

아체르보 선거법과 선거 제도 개편

무솔리니가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는 의회에서의 약세였다. 1922년 당시 파시스트들은 35명의 의원밖에 없었고, 이는 전체 535석 중 6.5%에 불과했다. 이 상태로는 안정적인 정치 기반을 구축할 수 없었다. 무솔리니는 선거법 개정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1923년 7월 무솔리니는 아체르보 선거법을 의회에 제출했다. 이 법안의 핵심은 "다수 프리미엄" 제도였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정당 연합이 자동으로 하원 의석의 3분의 2(400석)를 가져가고, 나머지 3분의 1(135석)만 다른 정당들이 비례대표로 나눠 갖는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사실상 다수당 독재를 보장하는 제도였다.

아체르보 선거법은 자유주의 의원 조반니 아체르보의 이름을 땄지만, 실제 설계자는 무솔리니와 그의 측근들이었다. 이들은 이 법안을 "정치적 안정을 위한 필수 조치"라고 포장했다. 기존의 비례대표제로는 안정적인 다수파 형성이 어렵고, 이탈리아가 계속 정치적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법안 통과 과정은 험난했다. 사회주의당과 공산당은 당연히 강력히 반대했고, 가톨릭 인민당 내에서도 반대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무솔리니는 교묘한 정치 공작을 펼쳤다. 우선 자유주의 원로들을 설득했다. 안토니오 살란드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올란도 같은 인물들이 "현실적 필요"를 인정하며 법안을 지지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국왕의 지지였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강력한 정부"를 원했고, 아체르보 법이 정치적 안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국왕의 지지 의사가 알려지자 많은 우파 의원들이 입장을 바꿨다. 결국 1923년 7월 15일 하원에서 235표 대 139표로 통과됐고, 상원에서도 165표 대 41표로 승인됐다.

1924년 총선과 파시스트의 압승

아체르보 법이 통과되자 무솔리니는 즉시 총선 준비에 들어갔다. 1924년 4월 6일 실시된 선거에서 파시스트들은 사상 최고의 승리를 거뒀다. '국가목록(Lista Nazionale)'이라는 이름으로 출마한 파시스트 연합은 전체 유효표의 64.9%를 얻었다. 아체르보 법에 따라 자동으로 400석을 배정받아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 선거는 결코 자유롭거나 공정하지 않았다. 파시스트들은 국가 기구를 총동원하여 선거에 개입했다. 내무부가 장악한 경찰이 야당 후보들을 감시하고 집회를 방해했다. 특히 남부 지역에서는 노골적인 폭력과 협박이 자행됐다. 많은 사회주의 후보들이 스쿠아드리스티들의 습격을 받았고, 선거 당일에도 투표소 주변에서 위협이 계속됐다.

언론 통제도 심각했다. 파시스트들은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언론사들에게는 특혜를 주고, 비판적인 매체들에게는 압박을 가했다. 『아반티!』 같은 사회주의 신문들은 인쇄소가 습격당하거나 배급이 방해받았다. 반면 무솔리니의 『일 포폴로 디탈리아』나 친파시스트 언론들은 막대한 자금 지원을 받아 선전전을 벌였다.

선거 결과는 파시스트들에게 완전한 승리였다. 반대파는 크게 분열됐다. 사회주의당은 22석, 공산당은 19석에 그쳤고, 가톨릭 인민당도 39석으로 크게 의석을 잃었다. 자유주의 세력들은 사실상 붕괴됐다. 이제 무솔리니는 의회에서 압도적인 다수를 바탕으로 마음대로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게 됐다.

마테오티 사건과 정치적 위기

하지만 선거 직후 무솔리니에게 큰 위기가 닥쳤다. 1924년 5월 30일 사회주의당 의원 지아코모 마테오티가 의회에서 선거 부정을 폭로하는 연설을 했다. 마테오티는 구체적인 증거들을 제시하며 "이번 선거는 사기"라고 규탄했다. 그는 특히 남부 지역의 폭력과 협박, 투표 조작 사례들을 상세히 열거했다.

마테오티의 연설은 국내외에 큰 충격을 줬다. 그는 용기 있는 정치인으로 존경받고 있었고, 그의 주장들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의심하고 있던 내용들이었다. 무솔리니는 크게 분노했고, 측근들에게 "저런 자는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나중에 큰 화근이 됐다.

1924년 6월 10일 마테오티가 실종됐다. 그는 로마 시내에서 괴한들에게 납치당했고, 두 달 후 시신으로 발견됐다. 수사 결과 납치범들은 모두 파시스트 조직원들이었고,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들이 무솔리니의 직접 지시를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었다. 비록 무솔리니의 직접 관여는 입증되지 않았지만, 그의 측근들이 연루된 것은 분명했다.

마테오티 사건은 이탈리아 전체를 뒤흔들었다. 파시즘에 대해 관대했던 중산층들도 "이것은 너무 지나쳤다"며 비판하기 시작했다. 야당들은 '아벤티노 언덕' 분리를 선언하며 의회 보이콧에 들어갔다. 이는 고대 로마에서 평민들이 귀족에 맞서 분리한 사건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파시즘에 대한 상징적 저항이었다.

국왕도 큰 고민에 빠졌다. 왕실 측근들 중 일부는 "무솔리니를 해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해외에서도 비판이 쏟아졌다. 영국과 프랑스 언론들은 "이탈리아가 문명국가의 수준에서 벗어났다"고 혹독하게 비판했다. 무솔리니의 정치적 입지가 크게 흔들렸다.

1925년 1월 3일 연설과 독재 선언

마테오티 사건으로 곤경에 빠진 무솔리니는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섰다. 물러날 것인가, 아니면 더 강경하게 나아갈 것인가? 1924년 말까지 그는 망설였다. 하지만 결국 1925년 1월 3일 의회에서 역사적인 연설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 연설에서 무솔리니는 사실상 독재를 선언했다. 그는 "만약 파시즘이 하나의 범죄 조직이라면, 그리고 만약 모든 폭력이 특정한 역사적, 정치적 분위기의 산물이라면, 그 분위기를 만든 정치적, 도덕적 책임은 나에게 있다"고 말했다. 이는 마테오티 살해에 대한 간접적인 책임 인정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이탈리아는 강력한 정부를 원한다. 나는 그것을 제공할 것이다. 48시간 안에 상황이 완전히 정리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는 사실상 반대파에 대한 전면적 탄압 예고였다. 무솔리니는 "합법성"이라는 외피를 완전히 벗어던지고 노골적인 독재자의 면모를 드러낸 것이다.

이 연설은 이탈리아 의회 민주주의의 종료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무솔리니는 이제 더 이상 기존 정치 세력들과 타협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파시스트당을 국가와 동일시하기 시작했고, 자신을 "국가의 화신"으로 포장했다. 1월 3일 연설 이후 이탈리아는 사실상 일당독재 체제로 접어들었다.

야당 탄압과 언론 통제 강화

1925년 1월 3일 연설 이후 파시스트들은 약속대로 반대파에 대한 전면적 탄압에 나섰다. 우선 아벤티노 분리에 참여한 야당 의원들의 의원직을 박탈했다. 이는 의회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이었지만, 파시스트 다수파는 이를 강행했다.

사회주의당과 공산당 조직들이 대대적으로 해체됐다. 당 사무실들이 습격당했고, 지도부들이 체포되거나 해외로 망명했다. 필리포 투라티 같은 온건 사회주의 지도자들도 결국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1926년 11월 체포되어 감옥에서 『옥중수고』를 쓰게 됐다.

언론에 대한 통제도 강화됐다. 1925년 7월 신문법이 제정되어 모든 신문의 편집장은 정부 승인을 받아야 했다. 검열 제도가 부활했고, 정부에 비판적인 기사를 쓰면 즉시 발행 정지 처분을 받았다. 『코리에레 델라 세라』의 편집장 루이지 알베르티니도 결국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지방 자치도 사실상 폐지됐다. 선출직 시장들이 모두 해임되고 중앙정부가 임명하는 '포데스타(시정관)'로 교체됐다. 이들은 모두 파시스트당원이거나 친파시스트 인사들이었다. 지방의회도 해산되고 파시스트들만으로 구성된 자문기구로 대체됐다. 이탈리아의 민주적 지방자치 전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조합국가 체제의 구축

무솔리니는 단순히 반대파를 탄압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국가 체제를 구축하려 했다. 그 핵심이 바로 '코르포라치오네(조합국가)' 시스템이었다. 이는 자본가와 노동자가 국가의 중재 하에 협력한다는 명분으로 만들어진 제도였다.

1926년 4월 '로카르노 법'이 제정되어 파업권이 사실상 폐지됐다. 동시에 사용자의 직장 폐쇄권도 제한됐다. 대신 정부가 임명하는 조합 간부들이 노사 분규를 중재한다는 것이었다. 겉으로는 "계급 협력"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노동자들의 권익을 심각하게 제약하는 제도였다.

조합국가 체제는 파시즘의 핵심 이데올로기 중 하나가 됐다. 무솔리니는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이라고 선전했다. 개인의 이익보다는 국가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계급 갈등 대신 민족 단결을 추구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리는 나중에 나치 독일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기업들이 가장 큰 혜택을 봤다. 파업이 금지되면서 노동 비용이 크게 절약됐고, 정부의 각종 특혜도 받을 수 있었다. 피아트, 몬테카티니, 일바 같은 대기업들은 파시즘 체제 하에서 오히려 더 성장했다. 반면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은 계속 하락했다.

새로운 헌법 질서와 파시스트 국가

1925-1926년 사이에 이탈리아의 헌법 질서는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1925년 12월 '두체 법'이 통과되어 무솔리니의 지위가 '각료회의 의장'에서 '정부 수반'으로 격상됐다. 이제 그는 국왕에게만 책임을 지고, 의회에 대한 책임은 없어졌다. 사실상 의원내각제에서 대통령제로 바뀐 것이다.

1926년에는 특별법원이 설치되어 정치범들을 재판했다. 이 법원은 민간인이 아닌 군인들로 구성됐고, 변호권도 크게 제한됐다. 사형제도 부활하고 정치범에 대한 유배형도 도입됐다. 지중해의 작은 섬들이 정치범 유배지로 사용됐는데, 안토니오 그람시도 한때 이곳에 수감됐다.

비밀경찰 조직인 'OVRA'도 창설됐다. 이들은 반파시즘 활동을 감시하고 탄압하는 역할을 했다. 도청과 미행, 밀고 등 모든 수단이 동원됐다. 일반 시민들도 정치적 발언을 조심해야 했고, 가족 간에도 서로를 의심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교육 제도도 파시즘화됐다. 1926년 모든 교과서가 국정화되고 파시스트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내용으로 바뀌었다. 교사들은 정기적으로 파시즘에 대한 충성 맹세를 해야 했고, 반대하는 교사들은 해임됐다. 대학교수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베네데토 크로체 같은 저명한 철학자들도 탄압받았다.

결론

1922년부터 1926년까지 4년간 무솔리니는 교묘하고 점진적인 방법으로 이탈리아를 완전한 독재국가로 바꿔놓았다. 그는 처음에는 합법성의 외피를 유지하며 기존 엘리트들과 협력했지만, 점차 그들을 제거하거나 굴복시켰다. 아체르보 선거법은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도구였다.

마테오티 사건은 무솔리니에게 위기이자 기회였다.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반신반의" 하던 태도를 버리고 완전한 독재자로 변신했다. 1925년 1월 3일 연설은 이탈리아 민주주의의 공식적인 종료를 알리는 것이었다. 이후 불과 1년 만에 이탈리아는 일당독재 체제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파시즘의 성공 요인은 폭력과 합법성의 교묘한 결합이었다. 무솔리니는 결코 무모한 모험가가 아니라 계산적이고 실용적인 정치인이었다. 그는 기존 제도를 완전히 파괴하지 않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개조했다. 이러한 "합법적 독재" 모델은 나중에 많은 권위주의 정권들이 모방하게 됐다. 이제 무솔리니는 진정한 "두체"가 되어 이탈리아를 자신의 의지대로 개조해나갈 준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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