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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역사 25. 루이 15세 시대의 영광과 쇠락 - 섭정 정치부터 7년전쟁까지, 계몽사상의 싹틈과 재정 파탄의 그림자

섭정 시대의 시작과 오를레앙 공작의 통치1715년 9월 1일 루이 14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왕위를 계승한 루이 15세는 겨우 5세의 어린아이였다. 루이 14세의 유언에 따라 메느 공작이 어린 왕의 후견인이 되고 섭정회의가 국정을 담당하기로 했지만,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가 파리 파를르망을 통해 이 유언을 무효화하고 단독 섭정이 되었다. 이는 태양왕이 그토록 억압했던 고등법원과 대귀족들의 정치적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오를레앙 공작은 루이 14세의 조카로서 지적이고 개방적인 성격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즉시 증조부의 억압적 정책들을 완화하기 시작했다. 바스티유 감옥에서 정치범들이 석방되었고, 망명했던 위그노들에게 귀국이 허용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궁정이 베르사유에서 파리로 다시 돌아온 것이..

History/Europe 2025.08.08

프랑스 역사 24. 루이 14세의 대외 전쟁과 재정 위기 - 네덜란드 전쟁부터 스페인 왕위계승전쟁까지, 태양왕 말년의 시련과 절대왕정의 한계

유럽 패권을 향한 야망과 대외 정책의 전환1670년대에 들어서면서 루이 14세의 대외 정책은 더욱 공격적이고 팽창주의적으로 변했다. 초기의 신중한 영토 획득 정책에서 벗어나 유럽 전체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는 프랑스의 국력이 절정에 달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베르사유 체제의 유지와 왕의 영광 과시를 위한 필연적 선택이기도 했다.루이 14세는 "자연 국경" 이론을 내세워 라인강까지의 영토 확장을 정당화했다. 그의 전쟁 장관 루부아 후작과 요새 건축가 보방은 체계적인 국경 요새 시스템을 구축하여 확장된 영토를 보호하고자 했다. 보방의 요새들은 당시 유럽 최고 수준의 군사 기술을 보여주었으며, 프랑스의 방어력을 크게 높였다.하지만 이러한 팽창 정책은 필연적으..

History/Europe 2025.08.08

프랑스 역사 23. 태양왕 루이 14세의 절대왕정과 베르사유 체제 - 왕권신수설부터 궁정문화까지, 프랑스 문화 황금기의 완성

어린 태양왕의 등장과 마자랭의 섭정1643년 5월 14일, 겨우 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루이 14세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72년) 통치한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즉위 초기에는 아버지 루이 13세와 리슐리외 추기경이 구축한 절대왕정 체제가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 어린 왕을 대신해 섭정을 맡은 모후 안 도트리슈와 재상 쥘 마자랭 추기경은 귀족들의 반발과 민중의 불만에 맞서야 했다.마자랭은 리슐리외의 제자이자 후계자로, 이탈리아 출신의 뛰어한 외교관이었다. 그는 스승의 정책을 계승하여 왕권 강화와 합스부르크 견제를 지속했지만,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많은 프랑스인들의 반감을 샀다. 특히 30년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군사비 지출과 가혹한 세금 징수는 국민들의 원성을 불러일으켰다.어린 루이 14세는 ..

History/Europe 2025.08.08

프랑스 역사 22. 루이 13세와 리슐리외 추기경의 절대왕정 건설 - 삼총사의 시대 속에서 완성된 중앙집권 체제와 합스부르크 견제 정책

어린 왕의 즉위와 섭정 정치의 혼란1610년 5월 14일 아버지 앙리 4세의 갑작스러운 암살로 왕위에 오른 루이 13세는 당시 겨우 9세의 어린아이였다. 프랑스 왕실법에 따라 왕비 마리 드 메디시스가 섭정을 맡았지만, 그녀는 프랑스 정치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이탈리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많은 귀족들의 불신을 샀다. 앙리 4세가 그토록 공들여 구축한 안정적인 통치 체제는 순식간에 흔들리기 시작했다.마리 드 메디시스는 고인이 된 남편의 정책을 뒤바꾸며 친(親)합스부르크 정책을 추진했다. 1615년 루이 13세를 오스트리아의 안 도트리슈와, 루이의 누이 엘리자베트를 스페인 왕자(훗날 펠리페 4세)와 결혼시키는 이중 정략결혼을 성사시켰다. 이는 앙리 4세가 평생에 걸쳐 견제하려 했던 합스부르크 세력과의 화해를 ..

History/Europe 2025.08.08

프랑스 역사 21. 부르봉 왕조의 기원과 재정·궁정 문화 확립 - 앙리 4세와 낭트 칙령을 통한 근세 프랑스 국가체제의 토대

발루아 왕조 단절과 부르봉 가문의 등장1589년 8월 2일, 광신적인 가톨릭 수도사 자크 클레망의 단검에 찔린 앙리 3세가 세상을 떠나면서 프랑스 역사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카페 왕조의 직계 후손인 발루아 가문이 단절되면서, 왕위는 혈연상 가장 가까운 친척인 나바르 왕 앙리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부르봉 가문 출신인 앙리 4세의 즉위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위그노(프랑스 칼뱅파 개신교도)였으며, 가톨릭 교도들이 다수를 차지하던 프랑스에서 개신교 왕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부르봉 가문은 원래 카페 왕조의 방계 혈통으로, 13세기 성왕 루이 9세의 막내아들 로베르 드 클레르몽에서 시작되었다. 클레르몽의 후손들은 부르봉 지방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왔고, 16세기에 들어서는 나바르 왕국까..

History/Europe 2025.08.08

프랑스 역사 20. 발루아 왕조의 중앙집권 완성과 후계 위기, 그리고 근세 프랑스 국가의 탄생

1453년 카스티용 전투에서 영국군을 최종 격파한 뒤, 프랑스는 완전히 새로운 나라로 거듭났다. 백년전쟁의 승리자 샤를 7세와 그의 후계자들은 단순히 영토를 회복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전쟁을 통해 얻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근대적 중앙집권 국가의 기초를 완성했다. 하지만 발루아 왕조의 찬란한 성과는 16세기 말 앙리 3세가 후계자 없이 암살당하면서 급작스럽게 막을 내렸다. 이는 단순한 왕조 교체를 넘어 프랑스 역사의 한 시대가 완전히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극적인 전환점이었다.샤를 7세의 국가 재건과 개혁백년전쟁에서 승리한 샤를 7세(재위 1422-1461)는 즉시 전후 재건에 착수했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경제를 회복하고 무너진 행정 체계를 재정비하는 것이었다. 샤를 ..

History/Europe 2025.07.05

프랑스 역사 19. 잔 다르크의 기적과 오를레앙 해방, 그리고 백년전쟁 대역전의 드라마

1429년 5월 8일 일요일 아침, 오를레앙 성벽에서 영국 국기가 내려지고 프랑스 백합 문장이 다시 펄럭였다. 7개월 동안 계속된 포위 공격을 뚫고 도시가 해방된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 승리가 더욱 놀라운 것은 그것을 이끈 인물 때문이었다. 17세의 시골 처녀 잔 다르크가 신의 계시를 받았다며 나타나 불과 4일 만에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오를레앙을 해방시킨 것이다. 이 사건은 단순한 군사적 승리를 넘어 프랑스 전체에 희망의 불씨를 지폈고, 백년전쟁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았다.프랑스 최대 위기의 시대1420년 트루아 조약으로 프랑스는 사실상 멸망 직전까지 몰렸다. 정신병을 앓던 샤를 6세는 자신의 아들 도팽 샤를(훗날 샤를 7세)을 상속에서 제외하고 영국 왕 헨리 5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프랑스 왕국은 ..

History/Europe 2025.07.05

프랑스 역사 18. 백년전쟁의 서막과 크레시-푸아티에 대패, 장궁이 바꾼 중세 전쟁의 패러다임

1337년 11월, 프랑스 왕 필리프 6세가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의 가스코뉴 영지를 몰수한다고 선언했을 때, 그 누구도 이 분쟁이 100년 넘게 지속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날부터 시작된 백년전쟁은 단순한 영토 분쟁을 넘어 중세 유럽의 정치 지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특히 1346년 크레시 평원과 1356년 푸아티에에서 벌어진 두 번의 결정적 패배는 프랑스 기사도의 자존심을 산산이 부수었고, 영국 장궁병들이 중세 전쟁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것을 온 유럽에 각인시켰다.백년전쟁 개전의 복합적 배경백년전쟁의 표면적 원인은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였다. 1328년 샤를 4세가 아들 없이 죽자, 프랑스 왕위는 발루아 가문의 필리프 6세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이 이사벨..

History/Europe 2025.07.05

프랑스 역사 17. 흑사병의 공포와 자크리 농민 봉기, 그리고 14세기 사회 대변혁의 시대

14세기 중엽 프랑스는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재앙 중 하나를 맞이했다. 1347년부터 시작된 흑사병은 불과 몇 년 만에 프랑스 인구의 3분의 1을 앗아갔고, 살아남은 자들마저 절망과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이 대재앙은 단순히 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데 그치지 않았다. 천년 동안 이어져 온 봉건 질서를 뿌리째 흔들었고, 1358년 자크리라 불리는 대규모 농민 봉기를 촉발시켰으며, 프랑스 사회 전체를 근본적으로 재편시켰다.죽음의 그림자, 흑사병의 도래1347년 10월, 지중해 무역로를 따라 온 배들이 흑해에서 출발해 유럽 각지로 퍼져나갔다. 이 배들은 곡물과 향신료만 싣고 온 것이 아니었다. 배 안에는 페스트균에 감염된 쥐들과 벼룩들이 숨어 있었고, 이들이 유럽 대륙에 전례 없는 재앙을 가져왔다.흑사..

History/Europe 2025.07.05

프랑스 역사 16. 필리프 4세의 교황권과 템플 기사단 도전, 그리고 근대 국가 재정 체계의 출발점

13세기 말 프랑스 왕국은 중세 유럽의 판도를 뒤흔들 거대한 변화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필리프 4세(재위 1285-1314)라는 한 명의 왕이 교황권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유럽 최고의 금융 세력이었던 템플 기사단을 무너뜨리며, 동시에 근대적 조세 제도의 기초를 닦아낸 것이다. 이 모든 일이 3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프랑스에서 벌어졌다.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와의 충돌필리프 4세가 왕위에 오를 당시, 교황청은 여전히 중세 유럽의 절대적 권위로 군림하고 있었다. 특히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재위 1294-1303)는 세속 권력에 대한 교회의 우위를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필리프 4세는 이런 전통적 질서에 정면으로 맞섰다.갈등의 시작은 성직자에 대한 과세 문제였다. 필리프 4세는 지속적인 전쟁 비용을 충..

History/Europe 2025.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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