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프랑스 역사 16. 필리프 4세의 교황권과 템플 기사단 도전, 그리고 근대 국가 재정 체계의 출발점

SSSCH 2025. 7. 5. 23:13
반응형

13세기 말 프랑스 왕국은 중세 유럽의 판도를 뒤흔들 거대한 변화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필리프 4세(재위 1285-1314)라는 한 명의 왕이 교황권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유럽 최고의 금융 세력이었던 템플 기사단을 무너뜨리며, 동시에 근대적 조세 제도의 기초를 닦아낸 것이다. 이 모든 일이 3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프랑스에서 벌어졌다.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와의 충돌

필리프 4세가 왕위에 오를 당시, 교황청은 여전히 중세 유럽의 절대적 권위로 군림하고 있었다. 특히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재위 1294-1303)는 세속 권력에 대한 교회의 우위를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필리프 4세는 이런 전통적 질서에 정면으로 맞섰다.

갈등의 시작은 성직자에 대한 과세 문제였다. 필리프 4세는 지속적인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프랑스 내 성직자들에게도 세금을 부과하려 했다. 이에 대해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는 1296년 교서 '클레리코스 라이코스(Clericis Laicos)'를 발표해 세속 권력이 교회의 허락 없이 성직자에게 과세하는 것을 금지했다.

필리프 4세의 대응은 즉각적이고 강력했다. 그는 프랑스에서 로마로 향하는 모든 금은의 반출을 금지했다. 교황청의 주요 수입원을 차단한 것이다. 이 경제적 압박은 효과적이었고, 교황은 결국 프랑스 왕이 국가 방위를 위해 성직자에게 과세할 수 있다고 양보했다.

하지만 진짜 폭풍은 이제 시작이었다. 1301년 필리프 4세가 교황의 특사 베르나르 사세를 반역죄로 체포하면서 양측의 갈등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교황은 1302년 교서 '우남 상탐(Unam Sanctam)'을 발표해 "모든 인간은 구원을 위해 로마 교황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아나니 사건과 교황권의 굴복

필리프 4세는 이제 마지막 카드를 꺼내들었다. 1303년 9월 7일, 왕의 측근 기욤 드 노가레와 콜로나 가문의 시치오 콜로나가 이끄는 무력 집단이 교황의 여름 별장이 있던 아나니를 습격했다. 이들은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를 체포해 프랑스로 끌고 가려 했다.

아나니 사건은 중세 유럽사의 분수령이 되었다. 비록 교황은 며칠 후 석방되었지만, 충격으로 인해 한 달 뒤 사망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이 교황권의 세속적 권위에 치명적 타격을 입혔다는 점이다. 중세 내내 황제와 왕들이 교황 앞에서 무릎을 꿇던 시대는 끝났다.

필리프 4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305년 프랑스 출신의 클레멘스 5세를 교황으로 옹립한 뒤, 1309년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이전시켰다. 이른바 '아비뇽 유수(Babylonian Captivity)'의 시작이었다. 70년 동안 교황청은 프랑스 왕의 영향권 아래 머물렀고, 이는 교황권의 독립성에 결정적 손상을 입혔다.

템플 기사단의 몰락

필리프 4세의 또 다른 표적은 템플 기사단이었다. 1119년 십자군 전쟁 중 순례자 보호를 위해 창설된 이 기사단은 200년 동안 유럽 최대의 금융 세력으로 성장했다. 파리의 템플 기사단 본부는 사실상 유럽의 중앙은행 역할을 했고, 각국 왕들이 이들에게 빚을 지고 있었다.

필리프 4세 역시 템플 기사단에 막대한 부채를 지고 있었다. 영국과의 전쟁과 플랑드르 정복 전쟁으로 인한 재정 위기는 날로 심각해졌다. 왕은 템플 기사단의 부를 손에 넣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1307년 10월 13일 금요일, 프랑스 전역에서 동시에 템플 기사단원들이 체포되었다. 이날이 바로 '13일의 금요일'이 불길한 날로 여겨지게 된 역사적 기원이다. 필리프 4세는 템플 기사단원들을 이단, 신성모독, 동성애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

고문을 통해 자백을 받아낸 왕은 1312년 교황 클레멘스 5세로부터 템플 기사단 해산 명령을 받아냈다. 1314년 3월 18일, 마지막 총장 자크 드 몰레가 파리의 세느 강 한복판 유대인 섬에서 화형당했다. 그는 화형대에서 "교황과 왕이 1년 안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저주했는데, 실제로 클레멘스 5세는 한 달 뒤, 필리프 4세는 8개월 뒤 사망했다.

근대적 조세 제도의 탄생

필리프 4세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근대적 조세 제도의 기초를 닦은 것이다. 중세 봉건 체제에서 왕의 수입은 주로 직할령에서 나오는 수익과 봉신들의 봉건적 의무 이행에 의존했다. 하지만 지속적인 전쟁과 늘어나는 행정 비용은 이런 전통적 수입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필리프 4세는 1295년부터 전례 없는 조세 정책을 시행했다. 그는 전국의 모든 계층에게 소득의 일정 비율을 세금으로 거두는 '십분의 일세(décime)'를 부과했다. 성직자에게는 교회 수입의 10분의 1을, 귀족과 평민에게는 소득의 20분의 1을 요구했다.

이 새로운 조세 제도는 중세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보여준다. 왕은 더 이상 봉건적 관계에만 의존하지 않고, 직접 신민들에게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했다. 이는 근대 국가의 핵심 요소 중 하나인 조세권의 확립이었다.

삼부회 소집과 여론 동원

필리프 4세는 또한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동원했다. 1302년 그는 프랑스 역사상 최초로 삼부회(États généraux)를 소집했다. 성직자, 귀족, 평민(부르주아)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인 이 회의는 교황과의 갈등에서 왕을 지지하는 명분을 제공했다.

삼부회는 단순한 자문기관이 아니었다. 왕은 이를 통해 자신의 정책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고, 반대 세력을 고립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 특히 교황권과의 갈등에서 프랑스 교회조차 왕을 지지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필리프 4세는 또한 체계적인 선전 활동을 벌였다. 왕실의 법학자들은 로마법과 교회법을 연구해 왕권의 우위를 뒷받침하는 이론을 개발했다. 이들은 "왕은 자신의 왕국에서 황제"라는 원칙을 내세우며 교황권의 간섭을 배격했다.

화폐 개혁과 경제 정책

재정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필리프 4세는 화폐 개혁도 단행했다. 그는 여러 차례 화폐의 순도를 낮추고 명목 가치를 높이는 평가절하를 실시했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왕실 수입을 늘렸지만, 장기적으로는 인플레이션을 유발했다.

당시 사람들은 필리프 4세를 '위조화폐왕(le Faux-Monnayeur)'이라고 비난했다. 단테는 『신곡』에서 그를 지옥에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화폐 정책은 근대 국가의 통화 주권 확립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필리프 4세는 또한 상업 활동을 통제하고 세수를 늘리기 위해 다양한 경제 정책을 시행했다. 그는 이탈리아 상인들에게 특별세를 부과하고, 유대인들의 재산을 몰수했으며, 외국 상인들의 활동을 제한했다. 이런 정책들은 단기적 수입 증대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장기적으로는 프랑스 경제의 국제 경쟁력을 약화시켰다.

행정 개혁과 관료제 발전

필리프 4세 시대의 또 다른 특징은 중앙집권적 행정 체제의 발전이었다. 왕은 전국 각지에 관료들을 파견해 직접 통치했다. 이들 관료들은 대부분 법학을 공부한 전문가들로, 전통적인 봉건 귀족과는 다른 새로운 계층을 형성했다.

파리의 왕실 정부는 더욱 체계적으로 조직되었다. 재정을 담당하는 부서, 사법을 관할하는 부서, 행정 업무를 처리하는 부서가 분화되었다. 이는 근대 국가 행정부의 원형이 되었다.

필리프 4세는 또한 법률 체계를 정비했다. 로마법의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성문법의 권위가 높아졌다. 왕실 법원의 관할권이 확대되었고, 지방 영주들의 사법권은 점차 축소되었다. 이는 법의 통일성과 왕권의 우위를 확립하는 과정이었다.

대외 관계와 영토 확장

필리프 4세는 대외 정책에서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는 플랑드르 지역을 프랑스에 완전히 편입시키기 위해 지속적인 전쟁을 벌였다. 1302년 코르트레이크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플랑드르 시민군에게 패배하는 굴욕을 당했지만, 결국 1305년 아트레시 조약을 통해 플랑드르의 일부를 확보했다.

영국과의 관계에서는 가스코뉴 지역을 둘러싼 갈등이 계속되었다. 필리프 4세는 영국 왕 에드워드 1세와 여러 차례 충돌했지만, 결정적인 승부를 내지는 못했다. 이 갈등은 후에 백년전쟁의 씨앗이 되었다.

독일과의 관계에서 필리프 4세는 신성로마제국의 내분을 교묘히 이용했다. 그는 합스부르크 가문과 룩셈부르크 가문의 대립을 부추기며 프랑스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특히 1308년 하인리히 7세가 황제로 선출되는 과정에서 프랑스의 역할이 컸다.

사회 변화와 문화 발전

필리프 4세 시대는 프랑스 사회의 급격한 변화를 보여준다. 화폐 경제의 발달로 전통적인 봉건 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농촌에서는 화폐 지대가 현물 지대를 대신하는 경우가 늘어났고, 도시에서는 상공업이 더욱 발달했다.

파리는 이 시기 유럽 최대의 도시 중 하나로 성장했다. 인구가 20만 명을 넘어섰고, 상업과 수공업이 번성했다. 파리 대학은 유럽 최고의 학문 중심지로 인정받았으며,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콜라 철학이 절정에 달했다.

고딕 건축 양식도 이 시기에 완성되었다. 생트 샤펠과 노트르담 대성당의 완공은 프랑스 왕국의 경제적 번영과 문화적 성취를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궁정 문화도 발달해 기사도 문학과 궁정 음악이 꽃을 피웠다.

결론

필리프 4세의 30년 통치는 프랑스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그는 중세적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해 교황권의 세속적 권위를 무너뜨렸고, 템플 기사단이라는 거대한 금융 세력을 제거했다. 동시에 근대적 조세 제도와 중앙집권적 행정 체제의 기초를 닦았다.

그의 업적은 단순히 왕권 강화에 그치지 않았다. 삼부회 소집과 여론 동원, 체계적인 선전 활동은 근대 정치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화폐 개혁과 경제 정책은 국가의 경제 주권 확립에 기여했다.

물론 필리프 4세의 정책에는 부작용도 있었다. 과도한 조세 부담과 화폐 조작은 사회적 불안을 야기했고, 교황청과의 갈등은 유럽 기독교 세계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템플 기사단 숙청 과정에서 드러난 왕권의 자의성은 후대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필리프 4세의 치세는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그의 정책들은 후대 프랑스 왕들이 절대왕정을 완성하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특히 조세권 확립과 중앙집권적 행정 체제는 근대 국가의 핵심 요소로 자리 잡았다.

필리프 4세는 '미남왕(le Bel)'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지만, 그의 진정한 유산은 외모가 아니라 프랑스를 중세 봉건 국가에서 근대 중앙집권 국가로 변모시킨 정치적 업적에 있다. 그가 시작한 변화의 물결은 이후 프랑스 역사를 관통하며 흘러갔고, 결국 절대왕정과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어지는 장대한 역사의 출발점이 되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