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프랑스 역사 20. 발루아 왕조의 중앙집권 완성과 후계 위기, 그리고 근세 프랑스 국가의 탄생

SSSCH 2025. 7. 5.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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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3년 카스티용 전투에서 영국군을 최종 격파한 뒤, 프랑스는 완전히 새로운 나라로 거듭났다. 백년전쟁의 승리자 샤를 7세와 그의 후계자들은 단순히 영토를 회복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전쟁을 통해 얻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근대적 중앙집권 국가의 기초를 완성했다. 하지만 발루아 왕조의 찬란한 성과는 16세기 말 앙리 3세가 후계자 없이 암살당하면서 급작스럽게 막을 내렸다. 이는 단순한 왕조 교체를 넘어 프랑스 역사의 한 시대가 완전히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극적인 전환점이었다.

샤를 7세의 국가 재건과 개혁

백년전쟁에서 승리한 샤를 7세(재위 1422-1461)는 즉시 전후 재건에 착수했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경제를 회복하고 무너진 행정 체계를 재정비하는 것이었다. 샤를 7세는 이를 위해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다.

군사 개혁이 가장 중요했다. 샤를 7세는 1445년 칙령으로 유럽 최초의 상비군인 '코뢰르 회사(Compagnies d'ordonnance)'를 창설했다. 이는 봉건적 군역제를 대체하는 혁명적 변화였다. 상비군은 왕에게만 충성하는 전문 군인들로 구성되었고, 이들의 급여는 왕실이 직접 지급했다.

재정 개혁도 병행되었다. 상비군 유지를 위해 안정적인 세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샤를 7세는 '타이유(taille)'라는 직접세를 정규화했다. 이제 왕은 삼부회의 동의 없이도 세금을 걷을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왕권 강화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행정 개혁을 통해 중앙집권화도 가속화되었다. 지방에 파견되는 관료들의 권한이 확대되었고, 지방 영주들의 독립성은 크게 제한되었다. 파리 고등법원의 권한도 강화되어 전국적으로 통일된 법 적용이 가능해졌다.

이런 개혁들로 프랑스는 중세적 봉건 국가에서 근세적 절대주의 국가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왕은 더 이상 '동급자 중의 제1인자(primus inter pares)'가 아니라 절대적 주권자가 되었다. 이는 유럽 정치사에서 매우 중요한 선례가 되었다.

루이 11세의 교활한 통치술

샤를 7세의 아들 루이 11세(재위 1461-1483)는 아버지의 개혁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는 '거미왕(l'Universelle Aragne)'이라는 별명처럼 교활한 외교술과 치밀한 정치 감각으로 프랑스의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루이 11세의 가장 큰 업적은 부르고뉴 공국의 병합이었다. 부르고뉴 공작 샤를 돌담공은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 사이의 독립 왕국 건설을 꿈꿨다. 하지만 1477년 낭시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그의 야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루이 11세는 즉시 부르고뉴 공국의 대부분을 프랑스에 병합했다.

이 과정에서 루이 11세는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했다. 그는 스위스, 로렌, 알자스 등과 동맹을 맺어 부르고뉴를 포위했다. 동시에 부르고뉴 내부의 분열을 부추겨 샤를 돌담공을 고립시켰다. 군사력보다는 정치적 책략을 통해 승리를 거둔 것이다.

프로방스와 앙주의 합병도 중요한 성과였다. 1481년 프로방스 백작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루이 11세는 이 지역을 프랑스에 병합했다. 이로써 프랑스는 지중해에 직접적인 출구를 확보했다. 앙주 지역도 비슷한 방식으로 왕령에 편입되었다.

루이 11세는 또한 경제 발전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상업과 수공업을 장려했고, 도로와 교량 건설에 투자했다. 리옹을 금융 중심지로 육성하고, 실크 산업을 도입하기도 했다. 이런 정책들로 프랑스 경제는 백년전쟁의 상처에서 완전히 회복되었다.

샤를 8세와 이탈리아 전쟁의 시작

루이 11세의 아들 샤를 8세(재위 1483-1498)는 프랑스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는 1494년 이탈리아 침공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반세기 넘게 계속될 이탈리아 전쟁의 서막이었다.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공에는 여러 동기가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나폴리 왕국에 대한 안주 왕가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더 깊은 이유는 강력해진 프랑스의 팽창 욕구와 이탈리아의 부에 대한 탐욕이었다.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인 이탈리아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다.

1494-1495년의 첫 번째 이탈리아 원정에서 프랑스군은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불과 몇 개월 만에 이탈리아 반도를 종단하며 나폴리를 점령했다. 이탈리아의 분열된 도시국가들은 프랑스의 강력한 군사력에 속수무책이었다.

하지만 성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베네치아, 교황령, 신성로마제국, 스페인이 연합해 '리그 오브 베니스'를 결성하고 프랑스에 맞섰다. 샤를 8세는 결국 이탈리아에서 철수해야 했다. 이는 앞으로 계속될 이탈리아에서의 복잡한 국제전의 전조였다.

이탈리아 원정은 프랑스 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귀족들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에 매료되었고, 이를 프랑스로 가져왔다. 건축, 미술, 문학 등 모든 분야에서 이탈리아의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루이 12세의 계속된 이탈리아 정책

샤를 8세의 사촌 루이 12세(재위 1498-1515)는 이탈리아 정책을 계속 추진했다. 그는 밀라노 공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1499년 두 번째 이탈리아 침공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어 더 체계적으로 접근했다.

루이 12세는 처음에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밀라노를 점령하고 나폴리도 스페인과 분할 통치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곧 스페인과의 갈등이 시작되었고, 이탈리아는 프랑스와 스페인 간의 대결장이 되었다.

1503년 체리놀라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스페인군에게 패배하면서 나폴리에서 철수해야 했다. 하지만 루이 12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탈리아 정책을 추진했다. 1508년에는 캉브레 동맹을 결성해 베네치아를 공격하기도 했다.

루이 12세 시대에는 내정에서도 중요한 발전이 있었다. 조르주 당부아즈 추기경의 주도로 행정 개혁이 추진되었다. 지방 행정의 효율성이 높아졌고, 사법 제도도 개선되었다. '인민의 아버지(Père du Peuple)'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루이 12세는 선정을 베풀었다.

경제적으로도 이 시기는 번영기였다. 이탈리아와의 교역이 확대되면서 프랑스 상인들이 큰 이익을 얻었다. 농업 생산량도 증가했고, 인구도 꾸준히 늘어났다. 프랑스는 이제 유럽의 강대국으로 확실히 자리잡았다.

프랑수아 1세의 화려한 치세

루이 12세의 사위이자 조카인 프랑수아 1세(재위 1515-1547)는 발루아 왕조의 절정기를 이끌었다. 그는 젊고 카리스마 넘치는 군주로서 프랑스를 유럽 정치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프랑수아 1세는 즉위하자마자 이탈리아 재침공을 결정했다. 1515년 마리냐노 전투에서 스위스 용병들을 격파하고 밀라노를 탈환했다. 이 승리로 25세의 젊은 왕은 일약 유럽의 주목을 받는 군주가 되었다.

하지만 진짜 도전자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샤를 5세였다. 1519년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선출된 샤를 5세는 스페인,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남이탈리아를 모두 지배하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프랑스는 사방이 합스부르크 영토로 둘러싸인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

1521년부터 시작된 프랑수아 1세와 샤를 5세 간의 대결은 유럽 전체를 전쟁터로 만들었다.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수아 1세는 참패를 당하고 직접 포로가 되는 굴욕을 당했다. 마드리드 조약으로 부르고뉴를 포기해야 했지만, 귀국 후 즉시 조약을 파기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프랑수아 1세는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했다.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어 샤를 5세를 동서양에서 협공했다. 독일의 개신교 제후들과도 손을 잡아 황제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이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외교였다.

르네상스 문화의 꽃

프랑수아 1세 시대는 프랑스 르네상스 문화의 절정기이기도 했다. 왕은 이탈리아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비롯한 예술가들을 초청했다. 퐁텐블로 궁전을 건설하고 루브르 궁을 개축하는 등 대규모 건축 사업을 추진했다.

문학 분야에서도 큰 발전이 있었다. 플레이아드 시파가 등장해 프랑스어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피에르 드 롱사르, 조아생 뒤 벨레 등이 고전적 전통과 프랑스적 특성을 결합한 새로운 문학을 창조했다.

교육과 학문도 발달했다. 1530년 콜레주 드 프랑스가 설립되어 인문학 연구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스어, 히브리어, 수학 등 새로운 학문 분야가 도입되었다. 인쇄술의 보급으로 책의 출판과 유통도 크게 늘어났다.

종교 개혁의 영향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칼뱅주의가 프랑스에 전파되면서 종교적 갈등의 씨앗이 뿌려졌다. 프랑수아 1세는 처음에는 관용적이었지만, 점차 개신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앙리 2세와 합스부르크와의 최종 대결

프랑수아 1세의 아들 앙리 2세(재위 1547-1559)는 아버지의 정책을 계승하면서도 더욱 체계적으로 추진했다. 그는 합스부르크와의 최종 대결을 위해 모든 힘을 집중했다.

앙리 2세의 가장 중요한 동맹자는 오스만 제국이었다. 술레이만 대제와의 협력으로 지중해와 헝가리에서 합스부르크를 압박했다. 또한 독일의 개신교 제후들을 지원해 샤를 5세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1552년에는 메츠, 툴, 베르됭 등 독일 내의 프랑스어 사용 도시들을 점령했다. 이는 프랑스의 동쪽 국경을 라인 강쪽으로 확장하는 중요한 성과였다. 샤를 5세가 메츠 탈환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1556년 샤를 5세가 퇴위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합스부르크 제국이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로 분할되었고, 이는 프랑스에게 유리한 변화였다. 앙리 2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탈리아에서 최후의 공세를 감행했다.

1559년 카토-캉브레지 조약으로 60년 넘게 계속된 이탈리아 전쟁이 마침내 끝났다. 프랑스는 이탈리아에서 철수했지만, 메츠, 툴, 베르됭과 칼레를 확보했다. 이는 충분히 만족할 만한 결과였다.

종교전쟁의 전조와 왕조의 위기

하지만 앙리 2세의 갑작스러운 죽음(1559)으로 프랑스는 새로운 위기에 직면했다. 마상 시합 중 눈에 창조각이 박혀 사망한 것이다. 그의 세 아들 프랑수아 2세, 샤를 9세, 앙리 3세가 차례로 왕위를 계승했지만, 모두 단명했거나 후계자를 남기지 못했다.

프랑수아 2세(재위 1559-1560)는 겨우 16세에 즉위해 1년 반 만에 사망했다. 그의 치세는 기즈 가문이 실권을 장악했고, 개신교도들의 반발이 커졌다. 앙부아즈 음모 사건에서 보듯이 종교적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샤를 9세(재위 1560-1574)는 10세에 즉위해 어머니 카타리나 드 메디치가 섭정을 맡았다. 이 시기에 본격적인 종교전쟁이 시작되었다. 1562년 바시 대학살 사건을 계기로 가톨릭과 위그노(프랑스 개신교도) 간의 내전이 발발했다.

앙리 3세(재위 1574-1589)는 가장 오래 재위했지만, 그의 치세는 종교전쟁이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가톨릭 동맹과 위그노 간의 대립이 극심해졌고, 왕권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 1588년 파리의 바리케이드 사건에서는 왕이 수도에서 쫓겨나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발루아 왕조의 종료와 역사적 의미

1589년 8월 1일, 앙리 3세가 자크 클레망이라는 도미니크회 수사에게 암살당하면서 발루아 왕조는 막을 내렸다. 그는 결혼했지만 후계자가 없었고, 형제들도 모두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266년간 계속된 발루아 왕조의 직계가 단절된 것이다.

발루아 왕조의 종료는 단순한 왕조 교체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이는 중세적 질서가 완전히 끝나고 근세적 질서가 시작되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발루아 왕조는 백년전쟁 승리, 중앙집권화 완성, 르네상스 문화 도입 등을 통해 근대 프랑스의 기틀을 마련했다.

특히 상비군 창설과 조세권 확립은 절대왕정의 물질적 기초가 되었다. 부르고뉴, 프로방스, 브르타뉴 등의 병합으로 프랑스는 현재와 거의 비슷한 영토를 확보했다. 이탈리아 전쟁을 통해서는 유럽 정치의 주도권을 놓고 합스부르크와 경쟁하는 강대국이 되었다.

문화적으로도 발루아 왕조의 유산은 컸다. 르네상스 문화의 도입으로 프랑스는 유럽 문화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프랑스어의 지위도 크게 향상되어 외교와 학술의 공용어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발루아 왕조 말기의 종교전쟁은 왕권의 한계도 보여주었다. 아무리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해도 종교적 분열 앞에서는 무력했다. 이는 후대 부르봉 왕조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겨졌다.

결론

발루아 왕조의 266년 역사는 프랑스가 중세 봉건 국가에서 근세 절대주의 국가로 변모하는 과정이었다. 샤를 7세가 백년전쟁 승리로 시작한 국가 재건 사업은 루이 11세의 영토 확장, 프랑수아 1세의 문화적 르네상스로 이어졌다. 이들의 노력으로 프랑스는 유럽 최강의 통일 국가가 될 수 있었다.

특히 중앙집권화의 완성은 발루아 왕조의 가장 큰 업적이었다. 상비군과 관료제, 조세 제도의 확립으로 왕은 봉건 영주들을 완전히 압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후에 루이 14세가 절대왕정을 완성하는 데 결정적 토대가 되었다.

국제적으로도 발루아 왕조는 프랑스를 유럽 정치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합스부르크와의 경쟁을 통해 유럽의 세력 균형을 유지했고, 오스만 제국과의 동맹 같은 파격적 외교로 새로운 국제 질서를 만들어갔다.

하지만 종교전쟁으로 인한 왕조의 종료는 중앙집권화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종교적 관용과 사회적 통합이라는 새로운 과제가 제기된 것이다. 이는 곧 등장할 부르봉 왕조가 풀어야 할 숙제였다.

발루아 왕조의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프랑스 역사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 문화 강국으로서의 자부심, 유럽 정치에서의 주도적 역할 등은 모두 이 시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발루아 왕조는 진정한 의미에서 근대 프랑스의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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