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정 시대의 시작과 오를레앙 공작의 통치
1715년 9월 1일 루이 14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왕위를 계승한 루이 15세는 겨우 5세의 어린아이였다. 루이 14세의 유언에 따라 메느 공작이 어린 왕의 후견인이 되고 섭정회의가 국정을 담당하기로 했지만,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가 파리 파를르망을 통해 이 유언을 무효화하고 단독 섭정이 되었다. 이는 태양왕이 그토록 억압했던 고등법원과 대귀족들의 정치적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오를레앙 공작은 루이 14세의 조카로서 지적이고 개방적인 성격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즉시 증조부의 억압적 정책들을 완화하기 시작했다. 바스티유 감옥에서 정치범들이 석방되었고, 망명했던 위그노들에게 귀국이 허용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궁정이 베르사유에서 파리로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이는 상징적으로 절대왕정의 엄격함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분위기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섭정은 "다원정치(polysynodie)" 체제를 도입했다. 루이 14세가 소수의 대신들과 함께 독단적으로 결정했던 것과 달리, 각 분야별로 위원회를 구성하여 귀족들에게 실질적인 권력을 분배했다. 외교위원회, 재정위원회, 전쟁위원회 등이 설치되었고, 고등 귀족들이 이를 주도했다. 이는 사실상 귀족정치의 부활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실험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귀족들은 행정 경험이 부족했고, 서로 다른 이해관계로 인해 효율적인 정책 결정이 어려웠다. 결국 1718년 기존의 대신 제도가 부분적으로 복구되었고, 실무에 능한 관료들이 다시 중용되기 시작했다.
로 시스템의 실험과 실패
섭정 시대의 가장 극적인 사건은 존 로(John Law)의 금융 개혁이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이 경제학자는 혁신적인 화폐 이론을 바탕으로 프랑스의 재정 위기를 해결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금과 은에 의존하는 기존 화폐 체제 대신 지폐와 신용 화폐를 통해 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716년 로는 왕립은행(Banque Générale)을 설립하여 지폐 발행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성공적이었다. 지폐는 금화보다 사용하기 편리했고, 상업 거래가 활발해졌다. 1717년에는 서인도회사를 설립하여 루이지애나 식민지 개발을 추진했다. 미시시피 강 유역의 풍부한 자원과 무한한 가능성이 선전되면서 회사 주식에 대한 투기 열풍이 일어났다.
1719-1720년에는 "미시시피 버블"이라고 불리는 주식 투기 광풍이 절정에 달했다. 서인도회사 주식 가격은 몇 개월 사이에 수십 배로 올랐고, 파리의 로 거리에는 주식을 사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하루아침에 갑부가 된 사람들이 속출했고, 귀족들도 투기에 뛰어들었다. "미요네르(millionnaire)"라는 단어가 이 시기에 처음 등장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1720년 버블이 터지면서 상황은 급반전되었다. 루이지애나 식민지의 실상이 선전과 달리 초라하다는 것이 밝혀지자 주식 가격이 폭락했다. 수많은 투자자들이 파산했고, 프랑스 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다. 로는 급히 프랑스를 떠나야 했고, 그의 금융 개혁은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로 시스템의 실패는 프랑스 사회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지폐에 대한 불신이 생겨 이후 오랫동안 금속 화폐만이 신뢰받았다. 또한 투기와 주식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형성되어, 프랑스의 자본주의 발전이 영국보다 뒤처지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루이 15세의 친정과 플뤼리 추기경
1723년 루이 15세가 13세가 되면서 공식적으로 성인식을 치르고 친정을 시작했지만, 실제로는 플뤼리 추기경이 실권을 장악했다. 안드레-에르쿨 드 플뤼리는 루이 15세의 가정교사였던 인물로, 온화하고 신중한 성격으로 왕의 절대적인 신뢰를 얻었다. 그는 1726년부터 1743년 죽을 때까지 17년간 사실상의 재상 역할을 했다.
플뤼리의 치세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고 평화로웠다. 그는 로 시스템의 후유증을 치유하고 재정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했다. 국채를 정리하고 세수를 늘려 균형 예산을 달성했다. 대외 정책에서도 신중함을 보여 불필요한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유지했다.
경제 정책에서는 중상주의를 계속 유지하면서도 일부 규제를 완화했다. 곡물 거래가 부분적으로 자유화되었고, 도로 건설에 투자하여 국내 상업을 활성화했다. 특히 1738년에는 코르베(corvée)라는 부역 제도를 도입하여 농민들이 도로 건설에 의무적으로 참여하도록 했다.
루이 15세는 이 시기에 "사랑받는 왕(Louis le Bien-Aimé)"이라고 불렸다. 그는 외모가 준수하고 매력적이었으며, 사냥과 수공예를 즐기는 평범한(?) 취미를 가진 왕으로 인기를 끌었다. 1725년 폴란드의 마리 레크친스카와 결혼하여 10명의 자녀를 두었고, 초기에는 모범적인 가정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였다.
폴란드 왕위계승전쟁과 외교적 성공
1733년 폴란드 왕 아우구스트 2세가 죽으면서 유럽에 새로운 국제 위기가 발생했다. 폴란드 의회는 전왕 스타니스와프 레크친스키를 새 왕으로 선출했는데, 그는 바로 루이 15세의 장인이었다. 하지만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아우구스트 3세를 지지하며 군대를 파견했다.
프랑스는 장인을 지원할 명분이 있었지만, 플뤼리 추기경은 신중한 전략을 선택했다. 폴란드에 직접 군대를 보내는 대신, 라인 지역과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를 공격하는 우회 전략을 택했다. 이는 프랑스의 전통적인 합스부르크 견제 정책의 연장이었다.
전쟁은 프랑스에게 예상외로 성공적이었다. 베르윅 공작이 라인 지역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퇴했고, 이탈리아에서도 프랑스-사르디니아 연합군이 우세를 점했다. 특히 1734년 파르마와 구아스탈라 전투에서 거둔 승리는 프랑스군의 명성을 크게 높였다.
1738년 빈 조약으로 전쟁이 끝났을 때, 프랑스는 상당한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스타니스와프는 폴란드 왕위를 포기하는 대신 로렌 공작령을 받았고, 그의 사후에는 로렌이 프랑스에 편입되기로 했다. 또한 프랑스는 나폴리와 시칠리아에서 합스부르크 세력을 축출하고 부르봉 계열의 돈 카를로스를 왕으로 세우는 데 성공했다.
이 전쟁은 루이 15세 치세의 최대 외교적 성공이었다. 프랑스는 큰 희생 없이도 영토를 확장하고 유럽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플뤼리 추기경의 신중한 전략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과 균형외교
1740년 오스트리아의 카를 6세가 죽고 딸 마리아 테레지아가 즉위하자, 유럽에 다시 큰 위기가 닥쳤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실레지아를 침공하면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는 유럽 세력 판도를 근본적으로 바꾼 중요한 전쟁이었다.
초기에 프랑스는 중립을 유지하려 했지만, 점차 프로이센과 연합하여 오스트리아를 견제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1741년 프랑스는 프로이센, 바이에른, 사보이와 동맹을 맺고 오스트리아에 선전 포고했다. 이는 전통적인 반합스부르크 정책의 연속이었다.
전쟁 초기에는 프랑스가 우세했다. 모리츠 원수가 보헤미아를 점령했고,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베르트가 신성로마황제로 선출되어 카를 7세가 되었다. 벨-일 원수는 프라하를 점령하는 등 성과를 거두었다. 플랑드르에서도 삭스 원수가 영국-오스트리아-네덜란드 연합군과 맞서며 선전했다.
하지만 전세는 점차 불리해졌다. 1743년 플뤼리 추기경이 죽으면서 프랑스의 외교 정책에 혼란이 생겼고, 영국이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연합군의 전력이 강화되었다. 1745년 폰트누아 전투에서 삭스 원수가 연합군을 크게 물리쳤지만, 이는 일시적인 성공에 그쳤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해외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북미와 인도에서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해군력에서 우세한 영국이 점차 주도권을 장악해 가고 있었다. 루이스부르그 요새가 함락되고, 인도에서도 프랑스의 영향력이 위축되었다.
1748년 엑스라샤펠 조약으로 전쟁이 끝났을 때, 프랑스는 기대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정복했던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현재의 벨기에)를 반환해야 했고, 해외 식민지에서도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반면 프로이센은 실레지아를 확실히 차지하며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했다.
퐁파두르 부인과 궁정 문화의 변화
1745년 루이 15세의 생애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부르주아 출신의 잔 안투아네트 푸아송(퐁파두르 후작부인)이 왕의 공식 애첩이 된 것이다. 퐁파두르 부인은 단순한 애첩이 아니라 18년간 루이 15세의 정치적, 문화적 조언자 역할을 했다. 그녀의 영향력은 궁정뿐만 아니라 프랑스 전체의 문화와 정치에 미쳤다.
퐁파두르 부인은 뛰어난 교양과 예술적 감각을 가진 여성이었다. 그녀는 화가, 음악가, 작가, 철학자들을 후원했으며, 베르사유에 새로운 문화적 분위기를 조성했다. 부셰, 샤르댕 같은 화가들이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고, 볼테르 같은 계몽사상가들과 교류했다.
그녀의 영향으로 프랑스 장식 예술이 크게 발달했다. 루이 15세 양식이라고 불리는 로코코 스타일이 완성된 것도 이 시기였다. 우아하고 섬세한 곡선, 파스텔 톤의 색채, 꽃과 조개껍질을 모티프로 한 장식이 특징인 이 양식은 유럽 전체로 퍼져나갔다.
정치적으로도 퐁파두르 부인의 영향력은 상당했다. 그녀는 외교 정책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 오스트리아와의 관계 개선을 적극 지지했다. 이는 전통적인 프랑스 외교 정책의 대전환을 가져온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하지만 퐁파두르 부인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부르주아 출신이 왕의 애첩이 되어 국정에 개입한다는 것에 대한 반감이 컸고, 그녀의 사치스러운 생활에 대한 비판도 끊이지 않았다. "오 폼파두르!"라는 비아냥거리는 표현이 유행할 정도였다.
외교 혁명과 7년전쟁
1756년 프랑스 외교사에서 "외교 혁명"이라고 불리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2세기 동안 지속되었던 반합스부르크 정책을 포기하고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은 것이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성사된 이 동맹은 유럽 전체의 세력 균형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외교 혁명의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있었다. 먼저 프로이센이 새로운 위협으로 부상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프로이센은 실레지아를 차지하며 독일에서 오스트리아와 맞서는 강국이 되었고, 이는 프랑스에게도 잠재적 위협이었다. 둘째로 영국과의 식민지 경쟁이 심화되었다. 북미와 인도에서 벌어지는 프랑스-영국 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유럽에서 영국을 고립시킬 필요가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퐁파두르 부인 사이의 서신 교환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두 여성은 개인적인 친분을 쌓았고, 이는 양국 관계 개선의 상징이 되었다. 또한 프랑스 외무장관 베르니 신부와 오스트리아의 카우니츠 공자가 정교한 외교 협상을 통해 동맹의 구체적인 조건들을 만들어갔다.
1756년부터 시작된 7년전쟁은 사실상 최초의 세계 대전이었다. 유럽에서는 프랑스-오스트리아-러시아가 프로이센-영국과 맞섰고, 북미에서는 프렌치-인디언 전쟁이, 인도에서는 카르나틱 전쟁이 동시에 벌어졌다. 이는 단순한 영토 분쟁이 아니라 글로벌 패권을 놓고 벌인 총력전이었다.
7년전쟁의 전개와 프랑스의 고전
7년전쟁에서 프랑스는 두 개의 전선에서 동시에 싸워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유럽에서는 프로이센을 상대로, 해외에서는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야 했다. 이는 프랑스의 자원을 분산시키는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유럽 전선에서는 초기에 일부 성과를 거두었다. 1757년 하스텐베크 전투에서 데스트레 원수가 하노버군을 물리쳤고, 로스바하 전투 직전까지는 프랑스군이 우세를 점하는 듯했다. 하지만 로스바하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참패를 당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프랑스군의 문제는 지휘관들의 무능과 군사 제도의 후진성에 있었다. 귀족 출신의 장군들은 전술적 감각이 부족했고, 병참 체계도 비효율적이었다. 반면 프리드리히 대왕은 혁신적인 전술과 엄격한 군사 훈련을 통해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연이은 승리를 거두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해외 전선이었다. 영국은 우세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프랑스의 해외 영토를 차례로 공격했다. 1759년은 프랑스에게 "기적의 해(Annus Mirabilis)"가 아니라 "재앙의 해"였다. 캐나다의 퀘벡이 함락되고, 인도에서는 플라시 전투 패배로 벵골 지역을 상실했다. 서인도제도의 과들루프도 영국군에게 점령되었다.
해전에서도 프랑스는 계속 패배했다. 1759년 키베론 만 해전에서 콘플랑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호크 제독의 영국 함대에게 궤멸당했다. 이로써 프랑스는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했고, 해외 식민지에 대한 지원이 불가능해졌다.
쇼아죈 공작의 개혁 시도와 좌절
전쟁 중인 1758년 쇼아죌 공작이 외무장관에 임명되면서 프랑스 정부는 대대적인 개혁을 시도했다. 에티엔 프랑수아 드 쇼아죌은 유능하고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정치가로, 프랑스의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한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쇼아죌의 개혁은 다방면에 걸쳐 있었다. 먼저 군사 개혁을 추진했다. 포병대를 강화하고, 군사 기술자를 양성했으며, 병참 체계를 개선했다. 해군 재건에도 힘써서 새로운 전함들을 건조하고, 해군 사관학교를 설립했다.
경제 정책에서는 중상주의의 일부 규제를 완화했다. 곡물 무역을 자유화하고, 길드 제도의 독점권을 축소했다. 또한 식민지 개발에 민간 자본의 참여를 확대하여 경제 활력을 높이고자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재정 개혁이었다. 전쟁 비용으로 인해 국가 부채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수입원을 확보해야 했다. 쇼아죌은 교회와 귀족의 면세 특권에 도전하여 모든 계층이 세금을 부담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자 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은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파를르망은 새로운 세금에 반대했고, 교회는 면세 특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귀족들도 기존 특권을 지키기 위해 단결했다. 결국 쇼아죌은 1761년 실각하고 말았다.
파리 조약과 프랑스 제1제국의 종언
1763년 파리 조약으로 7년전쟁이 끝났을 때, 프랑스는 참담한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 캐나다와 루이지애나(미시시피강 동쪽)를 영국에 넘겨주었고, 인도에서는 몇 개의 상업 거점만 남게 되었다. 2세기 동안 구축해온 프랑스 제1제국이 사실상 붕괴된 것이다.
영토 상실보다 더 심각한 것은 국제적 위상의 추락이었다. 루이 14세 시대 유럽의 패권국이었던 프랑스는 이제 영국에 뒤처지는 2류 국가로 전락했다. 영국은 7년전쟁의 승리로 북미와 인도에서 압도적 우위를 확보했고, 산업혁명의 기반 위에서 글로벌 패권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프랑스 국내에서도 충격은 컸다. 볼테르는 "캐나다는 몇 에이커의 눈밭에 불과하다"며 위안하려 했지만, 국민들의 실망감은 컸다. 특히 상인들과 선주들은 식민지 무역의 상실로 큰 타격을 받았다. 낭트, 보르도, 마르세유 같은 항구 도시들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재정 위기도 심각했다. 7년전쟁으로 인한 전쟁 비용은 천문학적이었고, 식민지 상실로 세수는 줄어들었다. 국가 부채는 이미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달했고, 이자 지급만으로도 국가 예산의 절반을 차지했다.
계몽사상의 확산과 사회 변화
18세기 중반 프랑스에서는 계몽사상이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볼테르, 몽테스키외, 디드로, 달랑베르 등의 철학자들이 이성과 과학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했다. 특히 1751년부터 출간되기 시작한 『백과전서』는 인류의 모든 지식을 체계화하려는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계몽사상가들은 기존의 절대왕정과 교회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했다.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은 권력 분립론을 통해 절대왕정의 대안을 제시했고, 볼테르는 종교적 관용과 언론의 자유를 주장했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인민 주권론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사상들은 살롱 문화를 통해 확산되었다. 파리의 귀족 부인들이 주최하는 살롱에서 철학자들과 문인들, 정치가들이 모여 새로운 사상을 토론했다. 제프랭 부인, 뒤 데팡 부인, 레스피나스 양 등이 주최한 살롱들은 계몽사상의 산실이 되었다.
경제 사상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의사학파(Physiocrates)라고 불리는 경제학자들이 중상주의를 비판하고 자유무역을 주장했다. 프랑수아 케네의 『경제표』는 경제 순환의 원리를 최초로 체계화한 저작이었고, "자유방임(laissez-faire)"이라는 개념이 이 시기에 등장했다.
계몽사상의 영향으로 교육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예수회가 1764년 추방된 후 세속 교육이 확산되었고, 여성 교육에 대한 관심도 증가했다. 과학과 기술 교육을 중시하는 새로운 교육관이 형성되었다.
종교 정책의 변화와 예수회 추방
루이 15세 치세의 중요한 종교적 사건은 1764년 예수회 추방이었다. 예수회는 루이 14세 시대부터 프랑스 엘리트 교육을 담당해온 중요한 종교 집단이었지만, 18세기 들어 여러 논란에 휩싸였다. 얀센주의자들과의 신학적 대립, 마르티니크 식민지에서의 금융 스캔들, 그리고 계몽사상가들의 비판이 겹치면서 예수회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
예수회 추방의 직접적인 계기는 라발레트 신부 사건이었다. 마르티니크에서 상업 활동을 하던 이 예수회 신부가 파산하면서 막대한 부채가 드러났고, 이는 예수회 전체의 재정 투명성에 대한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파를르망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예수회의 헌장 자체가 프랑스 법과 모순된다고 선언했다.
루이 15세는 처음에는 예수회를 보호하려 했지만, 파를르망과 여론의 압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1764년 예수회는 공식적으로 해산되었고, 그들이 운영하던 100여 개의 학교가 폐쇄되었다. 이는 프랑스 교육사에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예수회 추방 이후 프랑스의 종교 정책은 더욱 세속화되었다. 교회의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되고, 종교적 관용이 확산되었다. 1787년에는 관용령을 통해 위그노들에게 시민권이 부분적으로 회복되었다.
마담 뒤바리와 궁정의 타락
1769년 퐁파두르 부인이 죽은 후, 루이 15세의 새로운 총애를 받은 여성은 마담 뒤바리였다. 잔 베쿠라는 본명의 그녀는 평민 출신으로 매춘부였다가 궁정에 들어온 인물이었다. 이는 프랑스 궁정사에서 전례 없는 일이었고, 귀족들과 국민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마담 뒤바리는 퐁파두르 부인과 달리 교양이나 정치적 능력이 부족했다. 그녀의 유일한 관심사는 사치와 향락이었고, 이는 궁정의 도덕적 권위를 크게 훼손시켰다. 왕실에 대한 국민들의 존경심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그녀와 관련된 각종 스캔들이었다. 뒤바리의 과거가 널리 알려지면서 왕실의 체면이 실추되었고, 그녀를 둘러싼 궁정 내 파벌 싸움도 격화되었다. 심지어 왕세자 루이(훗날 루이 16세)와 왕세자빈 마리 앙투아네트까지 이 갈등에 휘말렸다.
마담 뒤바리의 사치는 도를 넘었다. 베르사유에 새로운 별궁을 짓고, 값비싼 보석과 의상을 구입하는 데 막대한 비용을 들였다. 이는 재정 위기에 시달리던 프랑스 국민들의 분노를 자극했다. "왕은 사치를 하고 백성은 굶는다"는 말이 퍼지기 시작했다.
모페우 개혁과 파를르망의 저항
1770년 루이 15세는 르네 니콜라 샤를 오귀스탱 드 모페우를 수석 대신으로 임명하고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모페우 개혁은 절대왕정을 강화하고 재정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였다. 개혁의 핵심은 파를르망의 권한을 제한하고 새로운 사법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파를르망은 18세기 내내 왕권에 맞서는 주요 세력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세금에 반대하고, 종교 정책에 개입했으며, 때로는 업무를 거부하는 파업까지 벌였다. 모페우는 이러한 저항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1771년 1월 모페우는 기존 파를르망을 모두 해산시키고 새로운 "모페우 파를르망"을 설치했다. 새로운 법관들은 관직을 세습할 수 없었고, 급료를 받는 공무원이었다. 또한 재판 수수료를 없애 사법 접근성을 높였다. 이는 매우 진보적인 개혁이었다.
하지만 이 개혁은 엄청난 저항에 부딪혔다. 기존 법관들은 물론이고, 귀족과 성직자들도 반발했다. 심지어 볼테르 같은 계몽사상가들도 전통적인 중간 권력체의 소멸을 우려하며 개혁을 비판했다. 프랑스 전역에서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고, 왕권에 대한 저항이 확산되었다.
루이 15세의 죽음과 평가
1774년 5월 10일, 64세의 루이 15세가 천연두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프랑스 사회에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초기에 "사랑받는 왕"이라고 불렸던 그는 말년에는 "미움받는 왕"이 되어 있었다.
루이 15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긍정적 측면에서 보면, 그의 치세는 문화적으로 매우 풍요로웠다. 로코코 예술이 꽃피었고, 계몽사상이 발전했으며,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화가 유럽 전체로 확산되었다. 경제적으로도 전쟁 기간을 제외하면 상당한 성장을 이루었다.
또한 그는 개인적으로는 매력적이고 지적인 군주였다. 과학과 기술에 관심이 많았고, 직접 시계를 만들거나 자물쇠를 수리하는 것을 즐겼다. 외교에서도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고, 특히 폴란드 왕위계승전쟁에서의 승리는 뛰어난 외교적 성취였다.
하지만 부정적 평가가 더 강하다. 7년전쟁의 참패로 프랑스는 해외 제국을 상실했고, 국제적 위상이 크게 추락했다. 재정 위기는 갈수록 심화되었고, 이는 훗날 대혁명의 원인이 되었다. 개인적인 사생활의 문란함은 왕실의 도덕적 권위를 크게 훼손시켰다.
무엇보다 그는 시대가 요구하는 근본적 개혁을 추진할 의지가 부족했다. 모페우 개혁 같은 시도는 있었지만,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면 쉽게 포기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절대왕정 체제의 구조적 모순이 갈수록 심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론
루이 15세의 59년 치세는 프랑스 역사에서 전환기적 성격을 가진다. 루이 14세가 완성한 절대왕정 체제는 여전히 유지되었지만, 그 내적 모순과 한계가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 7년전쟁의 패배는 프랑스의 국제적 위상을 크게 떨어뜨렸고, 재정 위기는 국가 시스템 전체를 위협하는 수준에 달했다.
동시에 이 시기는 계몽사상의 발전과 함께 새로운 사회적 에너지가 축적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볼테르, 디드로, 루소 등의 사상가들이 제시한 새로운 정치·사회 이론들은 기존 체제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제기했다. 특히 인민 주권론, 권력 분립론, 종교적 관용론 등은 훗날 프랑스 대혁명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문화적으로도 이 시기는 매우 풍요로웠다. 로코코 예술의 섬세한 아름다움, 살롱 문화의 지적 세련됨, 그리고 계몽사상의 합리적 비판 정신이 조화를 이루어 독특한 18세기 프랑스 문명을 만들어냈다. 프랑스어는 유럽 외교와 문화의 공통어가 되었고, 프랑스 문화는 문명의 표준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 모든 문화적 성취의 이면에는 깊어가는 사회적 모순이 있었다. 화려한 궁정 문화와 민중의 빈곤 사이의 격차, 계몽사상이 추구하는 평등 이념과 신분제 사회의 현실 사이의 괴리, 그리고 경제 발전의 필요성과 구체제의 구조적 경직성 사이의 갈등이 갈수록 커져갔다. 루이 15세의 죽음과 함께 프랑스는 더욱 격동적인 시대로 접어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계몽의 빛이 밝을수록 구체제의 그림자는 더욱 짙어져 갔고, 변화를 갈망하는 새로운 세대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