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프랑스 역사 21. 부르봉 왕조의 기원과 재정·궁정 문화 확립 - 앙리 4세와 낭트 칙령을 통한 근세 프랑스 국가체제의 토대

SSSCH 2025. 8. 8. 0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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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루아 왕조 단절과 부르봉 가문의 등장

1589년 8월 2일, 광신적인 가톨릭 수도사 자크 클레망의 단검에 찔린 앙리 3세가 세상을 떠나면서 프랑스 역사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카페 왕조의 직계 후손인 발루아 가문이 단절되면서, 왕위는 혈연상 가장 가까운 친척인 나바르 왕 앙리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부르봉 가문 출신인 앙리 4세의 즉위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위그노(프랑스 칼뱅파 개신교도)였으며, 가톨릭 교도들이 다수를 차지하던 프랑스에서 개신교 왕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르봉 가문은 원래 카페 왕조의 방계 혈통으로, 13세기 성왕 루이 9세의 막내아들 로베르 드 클레르몽에서 시작되었다. 클레르몽의 후손들은 부르봉 지방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왔고, 16세기에 들어서는 나바르 왕국까지 통치하게 되었다. 앙리 4세의 아버지 앙투안 드 부르봉은 나바르 여왕 잔 달브레와 결혼하면서 나바르 왕위를 얻었고, 그들의 아들 앙리는 1553년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 지대의 작은 왕국 나바르의 왕으로 태어났다.

종교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앙리가 성장한 16세기 후반의 프랑스는 종교전쟁의 폭풍 속에 있었다. 1562년부터 시작된 위그노 전쟁은 프랑스를 가톨릭과 개신교 진영으로 나누어 처참한 내전을 벌이게 했다.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대학살에서 수천 명의 위그노들이 살해되었고, 앙리 자신도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당시 그는 발루아 가문의 마르그리트와 정략결혼을 한 직후였는데, 결혼식에 참석하러 파리에 온 위그노 귀족들이 대거 학살당했던 것이다.

이후 앙리는 위그노들의 지도자로서 가톨릭 진영과 맞서 싸웠다. 그는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보였으며, 특히 기병 전술에 능했다. 1576년 몽파 전투, 1577년 쿠트라 전투 등에서 승리를 거두며 위그노 진영의 실질적인 지도자로 부상했다. 동시에 그는 관용과 화해의 필요성을 깨닫고 있었으며, 극단적인 종교적 대립보다는 실용적인 정치 해결책을 모색하고자 했다.

파리는 미사의 가치가 있다

1589년 앙리 3세의 죽음으로 법적으로는 왕위 계승자가 된 앙리였지만, 현실적으로 왕좌를 차지하기까지는 험난한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톨릭 연맹은 앙리의 즉위를 강력히 반대했고,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자신의 딸 이사벨라 클라라 에우헤니아를 프랑스 여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파리를 비롯한 주요 도시들은 문을 굳게 닫고 앙리의 입성을 거부했다.

앙리는 군사적 수단과 정치적 협상을 병행하며 점진적으로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1590년 이브리 전투에서 가톨릭 연맹군을 크게 물리쳤지만, 여전히 파리 점령에는 실패했다. 1593년, 마침내 앙리는 역사적인 결단을 내렸다. 생드니 대성당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이다. "파리는 미사의 가치가 있다(Paris vaut bien une messe)"라는 그의 유명한 말은 실용주의적 정치관을 보여주는 동시에, 종교적 신념보다 국가 통합을 우선시하는 태도를 드러냈다.

개종 이후 상황은 급격히 변했다. 1594년 3월, 앙리는 마침내 파리에 입성할 수 있었고, 가톨릭 연맹의 주요 도시들이 차례로 항복했다. 1595년에는 교황 클레멘스 8세로부터 파문 해제를 받았고, 1598년에는 베르뱅 조약을 통해 스페인과 평화를 맺으며 대외적 위협도 해소했다.

낭트 칙령과 종교적 관용 정책

왕위를 확고히 한 앙리 4세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오랜 종교전쟁으로 분열된 나라를 통합하는 것이었다. 1598년 4월 13일, 앙리는 낭트에서 역사적인 칙령을 발표했다. 낭트 칙령은 총 95개 조항으로 구성되었으며, 위그노들에게 신앙의 자유와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는 획기적인 내용이었다.

칙령의 핵심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위그노들의 예배 자유가 보장되었다. 그들은 1597년 이전에 예배를 드리던 장소에서 계속 예배할 수 있었고, 각 bailliage(행정구역)마다 최소한 두 곳에서는 위그노 예배가 허용되었다. 또한 위그노들은 공직 진출에서 차별받지 않으며, 가톨릭교도와 동등한 시민권을 누릴 수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위그노들에게 약 200개의 안전 도시(places de sûreté)가 허용되었다는 점이다. 라로셸, 몽토방, 몽펠리에 등 주요 거점 도시들에서 위그노들은 자체적인 군대를 유지할 수 있었고, 이는 사실상 국가 내 국가와 같은 특권이었다. 이러한 조치는 위그노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동시에, 향후 탄압에 대비한 보험과 같은 역할을 했다.

낭트 칙령은 16세기 유럽에서는 매우 예외적인 종교 관용 정책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누구 지역이냐, 누구 종교냐(Cuius regio, eius religio)"라는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원칙에 따라 통치자의 종교가 곧 영토의 종교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하나의 왕국 안에 두 종교가 공존하는 독특한 모델을 만들어냈다.

경제 재건과 재정 개혁

종교적 통합과 함께 앙리 4세가 집중한 것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의 재건이었다. 그는 뛰어난 재정 관리자인 막시밀리앙 드 베튄(로지니 공작)을 재정총감으로 임명하여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베튘은 무엇보다 왕실 재정의 투명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데 주력했다.

먼저 조세 제도가 개혁되었다. 기존의 복잡하고 불공평한 세금 체계를 정비하여 수입을 늘리는 동시에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자 했다. 특히 탈리(taille)라고 불리는 직접세의 징수 방식을 개선하여 지방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줄였다. 또한 새로운 간접세를 도입하여 재정 수입의 다변화를 꾀했다.

농업과 상공업 진흥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앙리 4세는 "내 왕국의 모든 농민이 일요일마다 닭을 솥에 넣고 끓일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백성들의 생활 수준 향상에 대한 그의 관심을 보여준다. 실제로 그의 치세 동안 농업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었고, 직물업과 수공업도 발달했다.

도로와 운하 건설에도 적극적으로 투자했다. 브리아르 운하 건설이 시작되었고, 전국의 도로망이 정비되어 상업 활동이 활성화되었다. 이러한 사회기반시설 투자는 경제 발전의 토대가 되었으며, 후에 루이 14세 시대의 번영을 준비하는 역할을 했다.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 체제 구축

앙리 4세는 경제 재건과 함께 왕권 강화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종교전쟁 기간 동안 크게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고,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는 전통적인 귀족 세력과 신흥 관료 계층을 적절히 활용하는 정교한 권력 균형을 만들어냈다.

먼저 궁정 의례를 통해 왕의 권위를 높였다. 루브르 궁전과 툴르리 궁전을 확장하고 정비하여 왕실의 위엄을 과시했다. 동시에 귀족들을 궁정으로 끌어들여 왕의 통제 하에 두고자 했다. 이는 후에 루이 14세가 베르사유에서 완성할 궁정 체제의 원형이 되었다.

지방 행정 체제도 정비했다. 각 지방에 파견되는 인탕당(intendant) 제도를 본격적으로 활용하여 중앙 정부의 의지를 지방에까지 관철시키고자 했다. 인탕당들은 왕이 직접 임명하는 관료들로, 전통적인 지방 귀족들의 영향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사법 제도에서도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파를르망(최고법원)들의 권한을 제한하고 왕의 권위를 확립하고자 했다. 특히 종교 문제에 관해서는 왕의 결정이 최종적이며, 파를르망이나 교회가 이에 개입할 수 없다는 원칙을 세웠다.

대외 정책과 외교적 균형

앙리 4세의 대외 정책은 신중함과 실용주의를 특징으로 했다. 그는 유럽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던 스페인-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세력을 견제하면서도, 불필요한 전쟁은 피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는 교묘한 외교적 균형을 추구했다.

네덜란드 독립 전쟁에서는 신교도인 네덜란드를 지원하여 스페인을 견제했지만, 직접적인 군사 개입은 자제했다. 독일에서는 개신교 제후들과 연합하여 합스부르크 세력을 압박했지만, 역시 전면전은 피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사보이 공국과 연합하여 스페인의 영향력을 견제했다.

영국과는 종교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복잡한 관계를 유지했다. 엘리자베스 1세와는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지만, 해상 무역에서는 경쟁 관계에 있었다. 특히 신대륙 진출에서는 영국과 스페인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프랑스의 이익을 추구했다.

오스만 제국과도 전통적인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이는 합스부르크 세력을 동서에서 견제하는 데 유용했으며, 지중해 무역에서도 이익이 되었다. 앙리 4세는 종교적 차이를 넘어서 국익을 우선시하는 현실주의 외교의 모범을 보였다.

궁정 문화와 예술 후원

앙리 4세 시대에는 궁정 문화가 크게 발달했다. 왕은 자신이 직접 문학과 예술에 관심을 보였으며, 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특히 건축 분야에서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루브르 궁전의 대회랑(Grande Galerie) 건설이 시작되었고, 보주 광장(현재의 보주 광장)이 조성되어 파리의 도시 경관이 크게 개선되었다.

문학에서는 프랑수아 드 말에르브가 왕실 시인으로 활동하며 프랑스 고전주의 문학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는 프랑스어의 순수성과 우아함을 추구했으며, 후에 17세기 고전주의 문학이 꽃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궁정 예절과 매너도 이 시기에 크게 발달했다. 앙리 4세 자신은 소탈하고 친근한 성격으로 유명했지만, 동시에 왕실의 위엄을 유지하기 위한 의례와 격식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러한 궁정 문화는 유럽 전역에 프랑스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음식 문화에서도 중요한 발전이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시집온 마리 드 메디시스(앙리 4세의 두 번째 왕비)의 영향으로 이탈리아 요리 기법이 프랑스에 도입되었고, 이것이 후에 프랑스 궁정 요리 발달의 출발점이 되었다.

라바이야크의 칼날

1610년 5월 14일, 파리의 한복판에서 프랑스 역사를 바꾼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앙리 4세가 타고 있던 마차가 교통 체증으로 멈춰 있을 때, 광신적인 가톨릭교도 프랑수아 라바이야크가 왕에게 달려들어 칼로 찔렀던 것이다. 앙리 4세는 즉시 숨을 거두었고, 프랑스는 갑작스럽게 국왕을 잃게 되었다.

라바이야크는 앙리 4세가 개신교도들을 너무 관대하게 대한다고 생각했으며, 특히 신성로마제국에 대한 전쟁 계획(대동맹 계획)이 가톨릭 세계를 위험에 빠뜨린다고 믿었다. 그의 암살은 종교적 광신이 여전히 프랑스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앙리 4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프랑스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의 후계자인 루이 13세는 아직 9세의 어린아이였고, 왕비 마리 드 메디시스가 섭정을 맡게 되었다. 이로 인해 앙리 4세가 구축한 안정적인 통치 체제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고, 곧 귀족들의 반란과 종교적 갈등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결론

앙리 4세와 부르봉 왕조의 등장은 프랑스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는 종교전쟁으로 분열된 나라를 통합하고, 낭트 칙령을 통해 종교적 관용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경제 재건과 왕권 강화를 통해 근세 프랑스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실용주의적 외교 정책으로 유럽에서 프랑스의 지위를 회복했다.

비록 그의 생애는 라바이야크의 칼에 의해 갑작스럽게 막을 내렸지만, 앙리 4세가 구축한 정치적, 문화적 유산은 이후 루이 13세와 루이 14세 시대의 절대왕정으로 이어졌다. 그의 치세는 중세적 분권 체제에서 근세적 중앙집권 국가로 넘어가는 교량 역할을 했으며, 프랑스가 유럽 최강국으로 발돋움하는 기초를 제공했다. 부르봉 왕조는 이후 200년간 프랑스를 통치하며 절대왕정의 전성기를 이끌어갔고, 앙리 4세는 그 시작점에서 "선왕(le bon roi Henri)"이라는 별명으로 프랑스인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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