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프랑스 역사 24. 루이 14세의 대외 전쟁과 재정 위기 - 네덜란드 전쟁부터 스페인 왕위계승전쟁까지, 태양왕 말년의 시련과 절대왕정의 한계

SSSCH 2025. 8. 8. 04:35
반응형

유럽 패권을 향한 야망과 대외 정책의 전환

1670년대에 들어서면서 루이 14세의 대외 정책은 더욱 공격적이고 팽창주의적으로 변했다. 초기의 신중한 영토 획득 정책에서 벗어나 유럽 전체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는 프랑스의 국력이 절정에 달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베르사유 체제의 유지와 왕의 영광 과시를 위한 필연적 선택이기도 했다.

루이 14세는 "자연 국경" 이론을 내세워 라인강까지의 영토 확장을 정당화했다. 그의 전쟁 장관 루부아 후작과 요새 건축가 보방은 체계적인 국경 요새 시스템을 구축하여 확장된 영토를 보호하고자 했다. 보방의 요새들은 당시 유럽 최고 수준의 군사 기술을 보여주었으며, 프랑스의 방어력을 크게 높였다.

하지만 이러한 팽창 정책은 필연적으로 유럽 다른 강국들의 견제를 불러일으켰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은 물론, 신흥 해상 강국 네덜란드와 영국까지 프랑스의 패권 추구를 위협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유럽의 세력 균형이 프랑스에 대항하는 대연합 체제로 재편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네덜란드 전쟁과 유럽 연합의 형성

1672년 루이 14세가 개시한 네덜란드 전쟁은 그의 대외 정책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표면적으로는 무역 갈등과 영토 분쟁이 원인이었지만, 실제로는 유럽 패권을 놓고 벌인 전면전이었다. 루이 14세는 네덜란드를 "상인들의 나라"라고 경멸하며, 이들이 프랑스의 유럽 지배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했다.

전쟁 초기 프랑스군은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다. 12만 대군이 라인강을 건너 네덜란드로 진격했고, 네덜란드군은 거의 저항다운 저항을 하지 못했다. 암스테르담을 제외한 거의 모든 주요 도시가 함락되었고, 네덜란드의 항복이 임박해 보였다. 루이 14세는 이미 승리를 확신하며 가혹한 조건을 제시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극한 상황에서 "대제방 개방"이라는 극단적 수단에 의존했다. 바다보다 낮은 땅의 제방을 터뜨려 국토를 물바다로 만든 것이다. 이로 인해 프랑스군의 진격이 중단되었고, 그 사이 젊은 오렌지 공 빌럼(훗날 영국 왕 윌리엄 3세)이 네덜란드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더 중요한 변화는 유럽 다른 강국들의 개입이었다. 오스트리아의 황제 레오폴드 1세,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 그리고 여러 독일 제후들이 네덜란드를 지원하며 프랑스에 맞서는 대연합을 형성했다. 심지어 프랑스와 전통적으로 우호 관계였던 영국도 1674년 네덜란드 편에 서서 참전했다.

전쟁은 6년간 계속되었고, 프랑스는 초기의 압도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점차 수세에 몰렸다. 1678년 네이메헨 조약으로 전쟁이 끝났을 때, 프랑스는 프랑슈-콩테와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일부 도시들을 얻었지만, 네덜란드 정복이라는 당초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전쟁을 통해 반(反)프랑스 연합이 형성되어 향후 모든 대외 정책의 장애가 되었다는 점이었다.

재결합 정책과 유럽의 반발

네덜란드 전쟁 이후에도 루이 14세의 영토 확장 욕구는 계속되었다. 1679년부터 그는 "재결합(Réunions)" 정책이라는 새로운 방식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려 했다. 이는 과거 어느 시점에서든 프랑스와 연관이 있었던 영토들을 법적 근거를 내세워 편입하는 정책이었다.

재결합 법원(Chambres de réunion)이 메츠, 브장송, 투르네 등에 설치되어 고문서를 뒤지며 프랑스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영토들을 찾아냈다. 이러한 방식으로 알사스의 여러 도시들과 룩셈부르크 일부가 프랑스에 편입되었다. 가장 극적인 사건은 1681년 스트라스부르의 점령이었다. 프랑스군이 기습적으로 이 중요한 도시를 점령했고, 이는 신성로마제국에 큰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재결합 정책은 유럽 전체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신성로마황제 레오폴드 1세는 이를 명백한 침략 행위로 규정하며 강력히 항의했다. 네덜란드의 빌럼 3세는 새로운 반프랑스 동맹 결성에 나섰고, 영국과 오스트리아, 사보이 등이 여기에 동참했다.

1688년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대동맹전쟁)"이 발발했다. 이번에는 프랑스가 유럽 거의 전체를 상대로 싸워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사보이, 스페인, 그리고 대부분의 독일 제후들이 프랑스에 맞서 연합했다. 이는 루이 14세가 직면한 최대 규모의 연합전이었다.

대동맹전쟁과 프랑스의 시련

1688년부터 1697년까지 9년간 계속된 대동맹전쟁은 루이 14세 치세 최대의 시련이었다. 프랑스는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상황에서 동시에 여러 전선에서 싸워야 했다. 플랑드르에서는 룩셈부르크 원수가, 라인 지역에서는 카티나 원수가, 사보이에서는 벤돔 공작이 각각 지휘를 맡았다.

전쟁 초기에는 프랑스가 우세했다. 룩셈부르크 원수는 1690년 플뤼뤼스 전투, 1693년 란덴 전투에서 연합군을 크게 물리쳤다. 해상에서도 투르빌 제독이 1690년 비치헤드 해전에서 영국-네덜란드 연합 함대를 격파했다. 루이 14세는 이 시기 절정의 군사적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프랑스의 약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1692년 라오그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가 크게 패배하면서 제해권을 상실했고, 1693년부터는 연이은 흉작으로 심각한 기근이 발생했다. 특히 1693-1694년의 기근은 "루이 14세의 기근"이라고 불릴 정도로 참혹했으며, 인구의 10% 이상이 아사했다고 추정된다.

재정 상황도 극도로 악화되었다.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새로운 세금이 계속 신설되었고, 국채 발행과 관직 매매가 극대화되었다. 1695년에는 모든 계층에게 부과하는 인두세(capitation)가 신설되어 성직자와 귀족도 세금을 내야 했다. 이는 전통적인 면세 특권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전쟁의 전환점은 1695년 나뮈르 공성전이었다. 빌럼 3세가 직접 지휘한 연합군이 보방이 설계한 난공불락의 나뮈르 요새를 함락시킨 것이다. 이는 프랑스 군사력의 한계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후 프랑스는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뤼스위크 조약과 유럽 세력균형의 변화

1697년 뤼스위크 조약으로 대동맹전쟁이 끝났을 때, 루이 14세는 상당한 양보를 해야 했다. 재결합 정책으로 얻었던 영토 대부분을 반환해야 했고, 스트라스부르만 겨우 보유할 수 있었다. 또한 오렌지 공 빌럼을 영국의 합법적 국왕으로 인정하고, 망명 중인 제임스 2세에 대한 지원을 중단해야 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유럽의 세력균형이 근본적으로 변화했다는 점이었다. 프랑스의 절대적 우위는 끝났고,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했다. 특히 영국은 글로리어스 혁명(1688) 이후 의회 중심의 정치 체제를 확립하고 해상 패권을 장악하면서 프랑스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되었다.

네덜란드 역시 작은 나라였지만 해상 무역과 금융업을 통해 경제적 영향력을 크게 키웠다. 암스테르담은 런던과 함께 유럽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고, 네덜란드의 자본은 반프랑스 동맹의 중요한 자금원이 되었다.

프랑스 내부에서도 변화의 징조가 나타났다. 경제학자 피에르 드 부아길베르와 세바스티앙 르 프레스트르 드 보방 같은 인물들이 기존의 중상주의 정책을 비판하고 새로운 경제 이론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보방은 『왕실 십분의 일세론』에서 모든 계층에게 공평하게 부과하는 단일세 제도를 제안했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의 서막

1700년 11월 1일,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가 후사 없이 죽으면서 유럽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왕위계승전쟁이 시작되었다. 카를로스 2세는 유언으로 프랑스의 앙주 공작 필리프(루이 14세의 둘째 손자)를 스페인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다. 이는 부르봉 가문이 프랑스와 스페인을 동시에 통치할 수 있는 기회를 의미했다.

루이 14세는 큰 고민에 빠졌다. 유언을 받아들이면 유럽 전체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했지만, 거부하면 오스트리아의 카를 대공이 스페인 왕위를 차지하여 합스부르크의 재통합이 이루어질 수도 있었다. 결국 그는 유언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고, 1700년 12월 필리프를 필리페 5세로 스페인에 파견했다.

"피레네 산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루이 14세의 말은 유럽 전체에 충격을 주었다. 이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실질적 통합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루이 14세가 필리프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리아는 즉시 반발했다. 만약 부르봉 가문이 프랑스와 스페인, 그리고 스페인의 광대한 식민지를 동시에 지배한다면 유럽의 세력균형이 완전히 깨질 것이었다. 특히 스페인령 네덜란드(현재의 벨기에)가 프랑스의 영향 하에 들어가는 것은 네덜란드와 영국에게는 생존의 위협이었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의 전개

1701년부터 시작된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은 루이 14세가 경험한 가장 혹독한 시련이었다. 프랑스는 다시 한 번 거의 모든 유럽 강국들과 맞서야 했다.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대동맹에는 사보이, 포르투갈, 대부분의 독일 제후들이 참가했다. 프랑스의 동맹국은 스페인뿐이었다.

전쟁은 여러 전선에서 동시에 벌어졌다. 독일과 플랑드르에서는 말버러 공작과 오이겐 공자가 지휘하는 연합군이, 이탈리아에서는 오스트리아군이, 스페인에서는 카를 대공을 지지하는 연합군이 각각 프랑스-스페인 연합군과 맞섰다.

초기에는 프랑스가 선전했다. 1702년 빌메로이 원수가 크레모나에서 오이겐 공자를 물리쳤고, 이탈리아에서 벤돔 공작이 연합군을 견제했다. 하지만 1704년 8월 13일 블렝하임(블린트하임) 전투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했다. 말버로 공작과 오이겐 공자의 연합군이 탈라드 원수와 바이에른 선제후의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을 완전히 격파한 것이다.

블렝하임 전투의 패배는 루이 14세에게 큰 충격이었다. 프랑스군이 이처럼 참혹한 패배를 당한 것은 거의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 패배로 프랑스는 독일에서 완전히 축출되었고, 라인 방어선도 무너졌다. 전쟁의 주도권이 완전히 연합군으로 넘어간 것이다.

연이은 패배와 국가적 위기

블렝하임 이후 프랑스의 패배는 계속되었다. 1706년 라미예 전투에서 빌루아 원수가 말버러 공작에게 참패했고, 같은 해 투린 전투에서 라 푀야드 공작이 오이겐 공자에게 크게 졌다. 스페인에서도 상황이 악화되어 1706년 마드리드가 잠시 연합군에게 점령되기도 했다.

1708년 우드나르드 전투와 1709년 말플라케 전투에서도 프랑스군이 패배하면서, 연합군은 프랑스 본토 깊숙이 진격할 수 있게 되었다. 릴, 겐트, 브뤼헤 등 중요한 요새들이 차례로 함락되었고, 파리까지 위협받는 상황이 되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경제적 파탄이었다. 연이은 전쟁으로 국가 부채가 천문학적으로 늘어났고, 1709년 대기근으로 인해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 해 겨울은 "대동결의 겨울"이라고 불릴 정도로 혹독했으며, 센강까지 얼어붙어 파리의 식료품 공급이 중단되었다. 굶주린 민중들이 베르사유까지 몰려와 빵을 요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재정 위기는 극에 달했다. 콜베르 이후 재정총감을 맡았던 르 펠르티에, 퐁샤르트랭 등이 차례로 실패했고, 결국 사무엘 베르나르 같은 금융업자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국채 이자율은 계속 오르고, 새로운 세금이 끊임없이 신설되었다.

평화를 향한 절망적 노력

1709년 상황이 절망적이 되자 루이 14세는 평화 협상에 나섰다. 헤이그에서 열린 예비 회담에서 그는 상당한 양보 의사를 밝혔다. 알사스-로렌과 스트라스부르를 포함한 대부분의 영토 반환, 필리페 5세의 스페인 왕위 포기, 던케르크 요새 파괴 등을 수용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연합군의 조건은 더욱 가혹했다. 그들은 루이 14세가 직접 프랑스군을 동원해 손자 필리페 5세를 스페인에서 축출하라고 요구했다. 이는 루이 14세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굴욕적인 조건이었다. "내 적들과 싸우는 것보다 내 손자와 싸우는 것이 더 어렵다"는 그의 말은 당시 상황의 비극성을 잘 보여준다.

협상이 결렬되자 루이 14세는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는 절대군주가 신민에게 직접 호소하는 전례 없는 일이었다. 그는 "적들이 요구하는 조건들이 너무 가혹해서 받아들일 수 없다"며 국민의 지지를 요청했다. 이 성명서는 프랑스 국민들의 애국심을 자극했고, 전쟁 지속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냈다.

전세의 역전과 위트레흐트 조약

1710년부터 전세가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벤돔 공작이 스페인에서 연합군을 상대로 선전하기 시작했고, 1711년에는 빌라르 원수가 드냉 전투에서 말버러 공작을 물리치는 성과를 거두었다. 더욱 중요한 변화는 1711년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1세가 죽고 카를 대공이 카를 6세로 즉위한 것이었다.

만약 카를 6세가 스페인 왕위까지 차지한다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 카를 5세 시대처럼 강력해질 수 있었다. 이는 영국과 네덜란드에게도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1710년 영국에서 휘그당이 실각하고 토리당이 집권하면서 전쟁 지속에 대한 회의론이 커졌다.

1712년 드냉 전투에서 빌라르 원수가 오이겐 공자를 물리치면서 프랑스의 협상 지위가 크게 개선되었다. 영국이 단독으로 평화 협상에 나서면서 대동맹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결국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끝났다.

위트레흐트 체제와 루이 14세의 말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확정된 유럽 질서는 이전과 크게 달랐다. 필리페 5세는 스페인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해야 했다. 프랑스는 북미의 뉴펀들랜드와 아카디아를 영국에 넘겨주었고, 스페인은 지브롤터와 미노르카 섬을 영국에 할양했다. 오스트리아는 스페인령 네덜란드와 나폴리, 사르디니아를 얻었다.

가장 큰 승자는 영국이었다. 영국은 해상 패권을 확고히 했을 뿐만 아니라 스페인으로부터 아메리카 노예무역의 독점권(아시엔토)을 획득했다. 이는 18세기 영국이 글로벌 패권국으로 도약하는 기초가 되었다.

루이 14세는 말년에 접어들면서 과거의 영광과 현실의 비참함을 동시에 경험해야 했다. 1711년 대도팽 루이가 천연두로 죽었고, 1712년에는 부르고뉴 공작(루이 14세의 손자)과 그의 부인, 아들까지 연이어 세상을 떠났다. 왕위 계승자는 겨우 2세의 증손자 루이(훗날 루이 15세)만 남았다.

1715년 9월 1일, 77세의 루이 14세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임종을 지켜본 생시몽 공작은 회고록에서 "왕은 용기 있게 죽음을 맞이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국민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오랜 전쟁과 과도한 세금으로 지친 민중들에게 태양왕의 죽음은 해방감을 주었을 뿐이었다.

결론

루이 14세의 말년은 절대왕정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초기의 찬란한 성공에 취해 무모한 팽창 정책을 추진한 결과, 프랑스는 거의 모든 유럽 강국들과 적대 관계에 빠졌다. 끝없는 전쟁은 국가 재정을 파탄시켰고, 민중들의 삶을 궁핍하게 만들었다.

네덜란드 전쟁부터 스페인 왕위계승전쟁까지 40여 년간 계속된 전쟁은 프랑스의 상대적 지위를 크게 약화시켰다. 17세기 후반 유럽의 절대적 패권국이었던 프랑스는 18세기 초에는 영국, 오스트리아와 함께 균형을 이루는 강국 중 하나로 전락했다.

경제적으로도 중상주의 정책의 한계가 드러났다. 지나친 규제와 독점은 경제 활력을 저해했고,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과도한 세금과 국채 발행은 재정 구조를 취약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문제들은 18세기 내내 프랑스를 괴롭혔고, 결국 1789년 대혁명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 14세의 치세는 프랑스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시기였다. 절대왕정의 위광과 한계를 동시에 상징한다.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을 중심으로 귀족을 통제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함으로써 왕권의 정점에 서는 데 성공한다. 아카데미 설립, 고전주의 예술 후원, 프랑스어 규범화 등 문화 분야에서도 유례없는 번영을 이끌어 프랑스를 유럽 문화의 중심으로 끌어올린다. 그러나 장기간의 팽창 전쟁과 과중한 조세, 국채 남발은 국가 재정을 취약하게 만들고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이는 이후 18세기 내내 누적된 불만과 경제적 압박을 통해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토양이 된다. 결국 루이 14세의 치세는 프랑스 절대왕정이 빛나는 문화적 유산과 함께 구조적 모순을 내포한 채, 근대 유럽 국제질서와 현대 프랑스 사회의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시기로 평가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