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7년 11월, 프랑스 왕 필리프 6세가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의 가스코뉴 영지를 몰수한다고 선언했을 때, 그 누구도 이 분쟁이 100년 넘게 지속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날부터 시작된 백년전쟁은 단순한 영토 분쟁을 넘어 중세 유럽의 정치 지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특히 1346년 크레시 평원과 1356년 푸아티에에서 벌어진 두 번의 결정적 패배는 프랑스 기사도의 자존심을 산산이 부수었고, 영국 장궁병들이 중세 전쟁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것을 온 유럽에 각인시켰다.
백년전쟁 개전의 복합적 배경
백년전쟁의 표면적 원인은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였다. 1328년 샤를 4세가 아들 없이 죽자, 프랑스 왕위는 발루아 가문의 필리프 6세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이 이사벨라 왕후를 통해 카페 왕조 마지막 왕들의 외손자라는 이유로 프랑스 왕위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프랑스 귀족들은 살리카 법을 내세워 여성을 통한 왕위 계승을 거부했지만, 에드워드 3세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짜 갈등의 핵심은 가스코뉴 문제였다. 12세기부터 영국 왕들이 프랑스 왕의 봉신으로서 다스려온 이 지역은 양국 간 지속적인 마찰의 원인이었다. 가스코뉴는 보르도 와인의 산지로 영국에게는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동시에 프랑스 왕들에게는 영국 왕이 프랑스 영토 안에서 독립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플랑드르 문제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플랑드르는 영국산 양모를 가공해 직물을 만드는 유럽 최대의 제조업 중심지였다. 플랑드르 백작은 프랑스 왕의 봉신이었지만, 플랑드르 상인들과 수공업자들은 경제적으로 영국에 의존했다. 이 지역에서는 친프랑스 귀족들과 친영국 부르주아들 사이의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경제적 요인도 무시할 수 없었다. 14세기 초 유럽은 기후 변화와 흑사병으로 인한 경제 위기를 겪고 있었다. 농업 생산량이 감소하고 인구가 줄어들면서 각국은 새로운 수입원을 찾아야 했다. 전쟁을 통한 약탈과 영토 확장은 이런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는 한 가지 방법이었다.
초기 전쟁의 전개와 해전의 중요성
에드워드 3세는 1337년 프랑스 왕위에 대한 권리를 공식적으로 주장하며 전쟁을 시작했다. 그는 먼저 해상에서의 우위를 확보하려 했다. 1340년 6월 24일 슬뤼스 해전에서 영국 함대는 프랑스 함대를 완전히 격파했다. 이 승리로 영국은 해협의 제해권을 장악했고, 이후 자유롭게 대륙으로 군대를 수송할 수 있게 되었다.
슬뤼스 해전의 의미는 단순히 한 번의 승리에 그치지 않았다. 이 승리로 영국은 전쟁 내내 전략적 주도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영국군은 언제든지 프랑스 해안 어느 곳이든 상륙할 수 있었고, 프랑스군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광대한 해안선을 방어해야 했다. 또한 플랑드르와의 교역로가 확보되면서 영국은 필요한 물자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었다.
이 시기 영국의 전략은 소위 '쉐보셰(chevauchée)'라 불리는 기동 작전이었다. 이는 적지 깊숙이 침투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며 적의 경제력을 약화시키는 전술이었다. 영국군은 주로 기병과 궁병으로 구성된 기동력 있는 부대로 프랑스 곳곳을 휩쓸었다. 이런 전술은 프랑스의 농촌 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고, 전쟁 수행 능력을 약화시켰다.
프랑스군은 이런 영국의 전술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무거운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은 기동력이 떨어졌고, 영국군의 빠른 움직임을 따라잡기 어려웠다. 또한 프랑스군은 여전히 중세적인 봉건 군제에 의존했기 때문에 통일된 지휘 체계가 부족했다.
크레시 대전투와 새로운 전술의 등장
1346년 8월 26일, 프랑스 북부 크레시 평원에서 벌어진 전투는 중세 전쟁사의 전환점이 되었다.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영국군 약 9,000명은 필리프 6세가 지휘하는 프랑스군 25,000명과 맞섰다. 수적으로는 프랑스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영국군의 핵심 전력은 웨일스 장궁병들이었다. 이들이 사용하는 장궁은 길이가 2미터에 달했고, 숙련된 궁병은 1분에 12발을 쏠 수 있었다. 화살의 사거리는 200미터가 넘었고, 근거리에서는 갑옷도 뚫을 수 있었다. 영국군은 약 5,000명의 장궁병을 보유하고 있었다.
영국군의 전술 배치는 혁신적이었다. 에드워드 3세는 방어에 유리한 고지를 선택하고, 장궁병들을 양쪽 날개에 배치했다. 중앙에는 보병들과 소수의 기사들을 배치해 적의 돌격을 막도록 했다. 특히 말발굽을 다치게 하는 구덩이를 파고 말뚝을 박아 기병 돌격을 방해했다.
프랑스군은 전통적인 기사 돌격 전술을 고수했다. 중장기병들이 전면에서 돌격하고, 보병들이 뒤를 따르는 방식이었다. 필리프 6세는 제노바 석궁병들을 먼저 투입했지만, 이들은 영국 장궁병들의 압도적인 화력에 무력했다. 석궁은 장궁보다 사거리도 짧고 발사 속도도 느렸다.
크레시 전투의 전개와 참극
전투는 오후 늦게 시작되었다. 프랑스의 제노바 석궁병들이 먼저 공격했지만, 영국 장궁병들의 집중 사격에 금세 무너졌다. 패주하는 석궁병들을 본 프랑스 기사들은 이들을 겁쟁이라고 비난하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군끼리 충돌하면서 프랑스군의 대형은 이미 흐트러졌다.
프랑스 기사들의 돌격이 시작되자 영국 장궁병들은 일제히 화살을 쏘아댔다. 수만 발의 화살이 하늘을 뒤덮으며 프랑스 기사들에게 쏟아졌다. "하늘이 어두워질 정도"라고 기록된 이 화살 세례는 프랑스군에게 치명적이었다. 많은 말들이 쓰러지고 기사들이 낙마했다.
프랑스군은 무려 16차례나 돌격을 시도했지만, 매번 영국 장궁병들의 화력에 막혔다. 진흙탕이 된 전장에서 무거운 갑옷을 입은 기사들은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영국 보병들은 쓰러진 기사들을 칼로 찔러 죽였다. 기사도의 명예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참혹한 살육이 벌어졌다.
해가 질 무렵 프랑스군은 완전히 붕괴했다. 필리프 6세는 겨우 목숨을 건져 도망쳤고, 수많은 고위 귀족들이 전사했다. 프랑스군의 사망자는 1만 명이 넘었지만, 영국군의 손실은 100명도 안 되었다. 이런 압도적인 차이는 당시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보헤미아 왕 요한이 전사한 사실이었다. 이미 장님이 된 노왕은 부하들과 함께 밧줄로 말을 묶고 마지막 돌격에 참여했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그의 깃털 장식은 훗날 영국 왕태자의 문장이 되었고, 그의 좌우명 "나는 섬긴다(Ich dien)"는 지금도 웨일스 왕자의 좌우명으로 남아 있다.
칼레 포위전과 영국의 교두보 확보
크레시 승리 후 에드워드 3세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칼레를 포위했다. 칼레는 해협에서 가장 가까운 대륙의 항구로, 이곳을 점령하면 영국은 프랑스 침입을 위한 영구적인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포위전은 11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칼레 시민들은 끝까지 저항했다. 식량이 떨어지고 질병이 퍼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항복을 거부했다. 에드워드 3세는 도시 전체를 파괴하고 주민들을 몰살시키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1347년 8월, 시장 외스타슈 드 생피에르를 비롯한 6명의 시민이 스스로 목숨을 바쳐 동료 시민들을 구했다.
칼레 함락으로 영국은 대륙에서 중요한 거점을 확보했다. 이후 200년 동안 칼레는 영국령으로 남았고, 영국이 프랑스를 침공할 때마다 중요한 출발점 역할을 했다. 에드워드 3세는 칼레에 영국인들을 대거 이주시키고 영국식 도시로 만들었다.
흑사병이 유럽을 휩쓰는 1348-1349년 동안 전쟁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양국 모두 인구 감소와 경제적 어려움으로 대규모 군사 작전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135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쟁은 다시 격화되었다.
푸아티에 전투와 프랑스 왕의 포로
1356년 9월 19일, 푸아티에 근처에서 또 다른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이번에는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인 흑태자 에드워드가 약 8,000명의 영국군을 이끌고, 프랑스 왕 장 2세가 20,000명의 대군을 지휘했다. 크레시에서 10년이 지났지만, 프랑스군은 여전히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흑태자는 아버지의 전술을 그대로 따랐다. 방어에 유리한 고지를 선택하고 장궁병들을 효과적으로 배치했다. 프랑스군은 크레시의 교훈을 일부 반영해 기사들을 말에서 내려 보병으로 싸우게 했지만, 여전히 정면 공격에 의존했다.
전투 결과는 크레시 때와 마찬가지로 영국군의 압승이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프랑스 왕 장 2세가 직접 포로로 잡힌 것이었다. 프랑스 왕이 적에게 포로가 된 것은 1214년 부빈 전투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장 2세와 함께 수많은 고위 귀족들이 포로가 되었다.
프랑스 왕의 포로는 프랑스에게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왕위 공석 상태에서 도팽(훗날 샤를 5세)이 섭정을 맡았지만, 권위가 부족했다. 또한 막대한 몸값을 마련해야 했는데, 이는 이미 전쟁으로 피폐해진 프랑스 경제에 추가적인 부담이었다.
장궁 전술의 혁명적 의미
크레시와 푸아티에에서 보여준 영국 장궁병들의 활약은 단순한 전술적 승리를 넘어 전쟁사에 혁명을 가져왔다. 수백 년 동안 전장을 지배해온 중장기병의 우위가 보병에 의해 깨진 것이다. 이는 사회적으로도 큰 의미를 가졌다.
장궁병들은 대부분 요먼(yeoman)이라 불리는 자유 농민 출신이었다. 이들은 귀족이 아니었지만 전장에서 기사들을 압도했다. 출생보다는 기술과 훈련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이는 기존의 신분제 사회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장궁의 위력은 개인의 기술뿐만 아니라 집단 전술에도 있었다. 수천 명의 궁병이 일제히 화살을 쏘는 집중 공격은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전술이었다. 이는 근대적인 집단 전투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장궁 전술의 성공은 또한 전문성의 중요성을 보여주었다. 장궁병이 되기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오랜 훈련이 필요했다. "영국인은 활과 함께 태어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장궁은 영국 문화의 일부였다. 이런 전문성은 임시로 모집된 봉건 군대로는 따라할 수 없는 것이었다.
프랑스군의 전술적 한계와 문제점
프랑스군의 거듭된 패배는 단순히 무기의 차이만이 아니라 전술적 사고의 경직성을 보여준다. 프랑스 기사들은 여전히 개인적 영웅주의에 매몰되어 있었고, 집단 전술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크레시에서 패배한 후에도 푸아티에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봉건제적 군사 조직의 한계도 명확히 드러났다. 각 영주가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 와서 임시로 연합군을 구성하는 방식으로는 통일된 지휘가 불가능했다. 영주들은 서로 지휘권을 놓고 다투었고, 전체적인 전략보다는 개인적 명예를 우선시했다.
프랑스군은 또한 정보 수집과 정찰 능력이 부족했다. 영국군의 위치와 전술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무작정 공격했다. 지형의 중요성도 간과했다. 방어측에게 유리한 지형에서 싸우는 영국군에게 정면 공격을 감행한 것은 전술적 무지를 보여준다.
장비의 문제도 있었다. 프랑스 기사들의 중갑옷은 화살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지만, 기동성을 크게 제한했다. 말에서 떨어진 기사는 무거운 갑옷 때문에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반면 영국 보병들은 가벼운 장비로 기동성을 유지했다.
사회적 변화와 기사도의 몰락
크레시와 푸아티에 전투는 중세 기사도 문화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수백 년 동안 전장의 지배자였던 기사들이 평민 궁병들에게 무력하게 당하는 모습은 기존 사회 질서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출생과 혈통보다는 실용적 능력이 더 중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전쟁의 성격도 변했다. 기사들 간의 개인적 결투나 영웅적 행위보다는 집단적이고 체계적인 전술이 중요해졌다. 전쟁은 점점 더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것이 되었다. 기사도의 관용과 명예 같은 개념은 현실적인 전술적 고려 앞에서 무력해졌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전문적인 군인들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용병의 활용이 늘어났다. 돈으로 고용할 수 있는 전문 군인들이 봉건적 의무로 모집된 아마추어 전사들보다 효과적이었다. 이는 화폐 경제의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켰다.
기술 발전도 가속화되었다. 장궁의 성공을 본 다른 나라들도 비슷한 무기 개발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화약 무기의 등장이 빨라졌다. 크레시 전투에서는 초기 형태의 대포도 사용되었는데, 이는 앞으로 일어날 더 큰 변화의 전조였다.
영국의 전략적 우위와 한계
초기 백년전쟁에서 영국이 거둔 승리들은 전략적 사고의 우수성을 보여준다. 에드워드 3세는 해상 우위 확보, 동맹국 확보, 효과적인 전술 개발 등 종합적인 전략을 구사했다. 플랑드르, 브르타뉴, 나바르 등과의 동맹을 통해 프랑스를 여러 방향에서 압박했다.
경제적 전략도 중요했다. 영국은 양모 수출을 통한 안정적인 수입원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전쟁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또한 전쟁 포로에서 받는 몸값과 약탈을 통한 수익도 상당했다. 전쟁이 경제적으로도 이익이 되는 구조였다.
하지만 영국의 우위에도 한계가 있었다. 인구와 자원에서는 프랑스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영국은 소규모 정예 부대로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지만, 프랑스 전체를 정복하고 통치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장기전이 될수록 영국에게는 불리했다.
지리적 한계도 명확했다. 영국군은 바다를 건너 원정을 와야 했고, 보급선이 길었다. 프랑스 내륙 깊숙이 들어갈수록 보급 문제가 심각해졌다. 또한 계속해서 해상 우위를 유지해야 했는데, 이는 상당한 비용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프랑스의 내부 분열과 회복 노력
크레시와 푸아티에의 패배는 프랑스 내부에 심각한 정치적 위기를 가져왔다. 왕권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지방 영주들의 이반이 늘어났다. 1358년 자크리 농민 봉기와 에티엔 마르셀의 부르주아 봉기는 이런 혼란상을 보여준다.
하지만 프랑스는 점차 교훈을 얻기 시작했다. 특히 도팽(훗날 샤를 5세)은 영국의 전술을 연구하고 대응책을 마련하려 했다. 정면 대결보다는 게릴라 전술을 활용하고, 영국군의 보급선을 차단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군사 개혁도 시작되었다. 프랑스는 자체적인 궁병 부대를 육성하려 했고, 용병의 활용도 늘렸다. 특히 브르타뉴의 베르트랑 뒤 게클랭 같은 유능한 지휘관들이 등장해 새로운 전술을 개발했다. 성곽 건축술도 발달해 영국군의 공격에 더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
외교적으로도 노력했다. 프랑스는 스코틀랜드, 카스티야 등과 동맹을 맺어 영국을 여러 방향에서 압박했다. 교황청과의 관계도 개선해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다. 이런 노력들은 점차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결론
1337년에서 1360년대까지의 초기 백년전쟁은 중세 유럽 군사사의 분수령이었다. 크레시와 푸아티에에서 보여준 영국 장궁병들의 압도적인 승리는 단순히 한 나라의 군사적 우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전쟁 패러다임 자체의 변화를 상징했다. 중세적 기사도 문화는 실용적이고 전문적인 전술 앞에서 무력함을 드러냈다.
이 시기의 패배는 프랑스에게 뼈아픈 교훈이 되었다. 전통적인 봉건 군제의 한계가 명확해졌고, 새로운 형태의 군사 조직과 전술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흑사병과 사회적 혼란이 겹치면서 프랑스는 심각한 위기를 겪었지만, 동시에 변화와 개혁의 기회도 얻었다.
영국의 승리는 작은 나라도 효과적인 전략과 전술을 통해 큰 나라를 압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한계도 드러났다. 영국은 개별 전투에서는 승리할 수 있었지만, 프랑스 전체를 정복하고 통치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는 앞으로 전개될 백년전쟁의 복잡한 양상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시기는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개인적 영웅주의에서 집단적 전문성으로, 신분에 기반한 권위에서 실력에 기반한 능력주의로, 지역적 봉건제에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로의 변화가 모두 이 전쟁을 통해 가속화되었다. 장궁이 바꾼 것은 단순히 전술이 아니라 유럽 사회 전체의 방향이었다.
'History > Europe'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프랑스 역사 20. 발루아 왕조의 중앙집권 완성과 후계 위기, 그리고 근세 프랑스 국가의 탄생 (0) | 2025.07.05 |
|---|---|
| 프랑스 역사 19. 잔 다르크의 기적과 오를레앙 해방, 그리고 백년전쟁 대역전의 드라마 (0) | 2025.07.05 |
| 프랑스 역사 17. 흑사병의 공포와 자크리 농민 봉기, 그리고 14세기 사회 대변혁의 시대 (0) | 2025.07.05 |
| 프랑스 역사 16. 필리프 4세의 교황권과 템플 기사단 도전, 그리고 근대 국가 재정 체계의 출발점 (0) | 2025.07.05 |
| 프랑스 역사 15. 성왕 루이 9세의 개혁과 7·8차 십자군 - 왕권 강화부터 이집트 원정까지 (0) | 2025.07.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