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9년 5월 8일 일요일 아침, 오를레앙 성벽에서 영국 국기가 내려지고 프랑스 백합 문장이 다시 펄럭였다. 7개월 동안 계속된 포위 공격을 뚫고 도시가 해방된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 승리가 더욱 놀라운 것은 그것을 이끈 인물 때문이었다. 17세의 시골 처녀 잔 다르크가 신의 계시를 받았다며 나타나 불과 4일 만에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오를레앙을 해방시킨 것이다. 이 사건은 단순한 군사적 승리를 넘어 프랑스 전체에 희망의 불씨를 지폈고, 백년전쟁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프랑스 최대 위기의 시대
1420년 트루아 조약으로 프랑스는 사실상 멸망 직전까지 몰렸다. 정신병을 앓던 샤를 6세는 자신의 아들 도팽 샤를(훗날 샤를 7세)을 상속에서 제외하고 영국 왕 헨리 5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프랑스 왕국은 영국과 부르고뉴 공국에 의해 삼등분되었고, 도팽 샤를은 루아르 강 남쪽의 일부 지역만 간신히 지킬 수 있었다.
상황은 더욱 절망적으로 변했다. 1422년 헨리 5세와 샤를 6세가 거의 동시에 사망하면서 갓난아기 헨리 6세가 프랑스와 영국의 왕위를 동시에 계승했다. 영국의 섭정 베드포드 공작은 체계적으로 프랑스 점령지를 확대했고,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선량공은 영국과의 동맹을 유지했다.
도팽 샤를의 처지는 비참했다. 정통성에 의문을 받으며 '부르주의 왕'이라는 조롱을 들어야 했다. 그는 1422년부터 스스로를 프랑스 왕이라고 칭했지만, 랭스에서 대관식을 치르지 못해 정식 왕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재정은 바닥났고, 군대는 사기가 떨어져 있었으며, 영토는 계속 줄어들었다.
1428년 가을, 영국군이 오를레앙 포위를 시작하면서 프랑스의 운명이 최종적으로 결정될 위기에 처했다. 오를레앙은 루아르 강변의 전략적 요충지로, 이곳이 함락되면 영국군은 부르주와 남프랑스로 진격할 수 있었다. 프랑스 저항의 마지막 보루가 무너질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도메레미의 처녀, 잔 다르크의 등장
바로 이때 로렌 지방의 작은 마을 도메레미에서 한 농가의 딸이 놀라운 주장을 하며 나타났다. 잔 다르크(Jeanne d'Arc, 1412-1431)라는 이름의 17세 처녀가 대천사 미카엘, 성녀 마르그리트, 성녀 카타리나의 계시를 받아 프랑스를 구원하라는 신의 명령을 받았다고 선언한 것이다.
잔 다르크의 출신은 평범했다. 아버지 자크 다르크는 도메레미의 촌장을 지낸 적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농민이었다. 잔은 글을 읽지도 쓸 줄도 몰랐고, 평생 자신의 이름을 쓸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13세부터 성인들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1428년 5월, 16세의 잔은 처음으로 보드리쿠르 성주에게 자신의 사명을 알렸다. 하지만 성주는 그녀를 미친 여자 취급하며 쫓아냈다. 잔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찾아왔고, 마침내 1429년 1월 성주의 마음을 돌렸다. 오를레앙 포위가 장기화되고 프랑스 상황이 절망적이 되자, 성주도 마지막 희망이라도 붙잡고 싶었던 것이다.
보드리쿠르는 잔에게 남장을 시키고 기사의 복장을 입혀 시농으로 보냈다. 11일간의 위험한 여행 끝에 잔은 1429년 3월 6일 도팽의 거처에 도착했다. 그녀는 수백 명의 신하들 사이에서 변장한 도팽을 단번에 알아보았고, 이는 궁정에 큰 충격을 주었다.
시농에서의 만남과 시험
잔과 도팽 샤를의 첫 만남은 극적이었다. 도팽은 잔을 시험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왕좌에 앉히고 자신은 신하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하지만 잔은 주저 없이 진짜 도팽을 찾아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인 비밀스러운 말은 도팽의 마음을 완전히 돌려놓았다.
그 비밀스러운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도팽은 그날 밤 잔을 믿기로 결심했다. 아마도 잔은 도팽이 자신의 출생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의혹을 해소해주었을 것이다. 당시 도팽은 자신이 정말 샤를 6세의 아들인지, 아니면 왕비의 불륜으로 태어난 사생아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궁정의 신학자들과 법학자들은 여전히 의심스러워했다. 한 시골 처녀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잔은 3주 동안 푸아티에에서 엄격한 심문을 받았다. 신학자들은 그녀의 신앙심을 검증했고, 의사들은 그녀의 순결을 확인했다. 마침내 조사단은 "이 처녀에게서 악한 것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도팽은 잔에게 흰색 갑옷과 깃발, 검을 하사했다. 그녀의 깃발에는 예수와 두 천사가 그려져 있었고, "예수 마리아(Jhesus Maria)"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잔은 칼보다는 깃발을 들고 싸우겠다고 했다. 그녀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자신의 역할은 프랑스군을 격려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를레앙으로의 진군
1429년 4월 말, 잔은 약 4,000명의 군대와 함께 오를레앙으로 향했다. 군대의 지휘관들은 처음에는 이 시골 처녀를 못마땅해했다. 그들에게 잔은 전쟁을 모르는 어린애에 불과했다. 하지만 잔의 열정과 확신은 점차 병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잔은 군대의 기강을 엄격하게 세웠다. 매춘부들을 내쫓았고, 약탈을 금지했으며, 미사 참석을 의무화했다. 욕설을 하는 병사들을 질책했고, 신에 대한 경외심을 강조했다. 처음에는 반발하던 병사들도 점차 그녀의 진정성에 감화되기 시작했다.
오를레앙에 가까워지자 잔은 영국군에게 투항을 권하는 편지를 보냈다. "영국 왕이여, 하늘의 왕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신다. 프랑스를 떠나라. 그렇지 않으면 큰 해를 입을 것이다." 영국군은 이 편지를 조롱했지만, 내심으로는 불안해했다. 마녀나 성녀냐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4월 29일 저녁, 잔은 마침내 오를레앙에 입성했다. 7개월 동안 포위된 도시의 시민들은 구원자의 도착에 환호했다. 횃불을 든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잔을 만지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절망에 빠져 있던 도시에 희망의 빛이 비치는 순간이었다.
4일간의 기적, 오를레앙 해방
잔이 도착하자마자 오를레앙의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그동안 수동적으로 방어만 하던 프랑스군이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잔은 전투 경험이 전혀 없었지만, 그녀의 존재 자체가 병사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5월 4일, 첫 번째 공격이 시작되었다. 오를레앙 남쪽의 투렐 요새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잔은 흰 갑옷을 입고 깃발을 들고 선두에 섰다. 그녀의 외침에 고무된 프랑스군은 맹렬하게 공격했고, 하루 만에 요새를 점령했다. 수개월 동안 끄떡없던 영국 요새가 하루 만에 무너진 것이다.
5월 5일에는 아우구스탱 요새가 함락되었다. 영국군의 사기는 눈에 띄게 떨어졌다. 반면 프랑스군은 연전연승에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시민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병사들에게 음식과 무기를 제공했다. 도시 전체가 하나가 되어 적에 맞서는 모습이었다.
5월 6일에는 투렐 방면의 영국군 본진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 전투에서 잔은 어깨에 석궁 화살을 맞아 부상당했다. 피를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잔을 본 프랑스군은 공격을 중단하려 했다. 하지만 잔은 상처를 치료한 후 다시 돌아와 깃발을 높이 들었다. "깃발이 성벽에 닿으면 요새는 우리 것이다!"라고 외쳤다.
영국군의 철수와 도시 해방
5월 7일 밤, 영국군은 비밀리에 철수를 시작했다. 7개월 동안 버텨온 포위작전을 포기한 것이다. 잔의 등장 이후 불과 4일 만에 전세가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영국군 지휘관들은 더 이상 오를레앙을 점령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5월 8일 일요일 아침, 오를레앙 시민들은 영국군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7개월간의 악몽이 끝난 것이다.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해방을 축하했다. 교회 종소리가 울려 퍼졌고, 감사 미사가 드려졌다. 잔은 무릎을 꿇고 신에게 감사 기도를 올렸다.
오를레앙 해방 소식은 프랑스 전역에 번개처럼 퍼졌다. 절망에 빠져 있던 프랑스인들은 다시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하늘이 보낸 처녀"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잔 다르크는 일약 전국적인 영웅이 되었다. 반대로 영국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다. "마녀"라는 소문이 영국군 사이에 퍼지면서 공포심이 확산되었다.
오를레앙 해방은 단순한 군사적 승리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그것은 프랑스 민족 의식의 각성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백년전쟁 내내 프랑스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잔 다르크의 등장으로 "프랑스는 신이 선택한 나라"라는 믿음이 확산되었다.
루아르 강 연안의 연속 승리
오를레앙 해방 후 잔은 멈추지 않았다. 도팽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루아르 강 연안의 다른 영국 요새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6월 11일 자르고 공격에서 프랑스군은 또다시 대승을 거두었다. 영국군은 전투다운 전투도 하지 못하고 도망쳤다.
6월 15일에는 므엉 쉬르 루아르가 함락되었다. 6월 17일에는 볼리외가 항복했다. 불과 한 달 사이에 루아르 강 연안의 영국 요새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렸다. 영국군은 잔 다르크라는 이름만 들어도 공포에 떨었고, 프랑스군은 무적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6월 18일 파테 전투에서는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2,000명의 프랑스군이 5,000명의 영국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것이다. 영국군은 2,000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지만, 프랑스군의 손실은 20명도 안 되었다. 백년전쟁사상 가장 일방적인 승리 중 하나였다.
이런 연속 승리로 프랑스군의 세력은 급속히 확장되었다. 도팽 샤를은 이제 랭스로 가서 정식 대관식을 올릴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잔은 계속해서 도팽에게 랭스 대관식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에게는 군사적 승리보다도 도팽의 정통성 확립이 더 중요했다.
랭스 대관식과 샤를 7세의 탄생
1429년 7월 17일, 랭스 대성당에서 역사적인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도팽 샤를이 마침내 프랑스의 정식 왕 샤를 7세로 즉위한 것이다. 클로비스 이래 프랑스 왕들이 대관식을 치르던 이 성스러운 장소에서 샤를 7세는 성유로 축성을 받았다.
잔 다르크는 왕의 곁에서 깃발을 들고 서 있었다. 그녀는 "깃발이 고난을 함께했으니 영광도 함께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관식을 지켜보는 잔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였다. 신이 그녀에게 맡긴 첫 번째 사명이 완수된 순간이었다.
대관식은 프랑스 전체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샤를 7세의 정통성이 확립되면서 영국군과 부르고뉴군의 명분이 크게 약화되었다. 많은 도시들이 저항 없이 샤를 7세에게 항복했다. 트루아, 샬롱, 랭스로 가는 길목의 도시들이 잇따라 문을 열었다.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선량공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는 영국과의 동맹을 재고하고 프랑스와의 화해 가능성을 타진했다. 잔의 승리와 샤를 7세의 즉위로 프랑스 내전의 종료가 현실적으로 가능해 보였다.
국제적으로도 프랑스의 지위가 회복되었다. 스코틀랜드, 카스티야, 아라곤 등 프랑스의 전통적 동맹국들이 다시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왔다. 교황청도 샤를 7세를 프랑스의 정당한 왕으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파리 공격의 실패와 전환점
하지만 잔의 행운은 영원하지 않았다. 1429년 9월 8일 파리 공격에서 잔은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 생토노레 문을 공격하던 중 다리에 석궁 화살을 맞아 쓰러진 것이다. 부상당한 잔을 본 프랑스군은 공격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파리 공격의 실패는 여러 의미를 가졌다. 첫째, 잔이 무적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둘째, 대규모 공성전에서는 잔의 영향력이 제한적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셋째, 샤를 7세가 잔보다는 외교적 해결을 선호한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실제로 샤를 7세는 이미 부르고뉴 공작과 비밀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의 군사적 모험보다는 정치적 타협을 통한 해결을 원했다. 잔의 군사적 성공에 힘입어 유리한 협상 위치를 확보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잔은 이런 분위기 변화를 민감하게 느꼈다. 그녀는 여전히 영국군을 완전히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왕과 궁정은 점차 그녀의 의견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잔의 정치적 영향력은 군사적 성공에 의존했는데, 그 성공이 멈추자 입지가 약해졌다.
콩피에뉴 포위와 잔의 포로
1430년 5월 23일, 프랑스 역사의 비극적 전환점이 찾아왔다. 콩피에뉴를 구원하려던 잔 다르크가 부르고뉴군의 포로가 된 것이다. 이날 오후 잔은 소수의 부하들과 함께 부르고뉴군을 공격했지만, 고립되어 포위당했다. 도시로 돌아가려던 잔은 뒤늦게 올라온 다리에 가로막혀 적에게 붙잡혔다.
잔의 포로는 프랑스 전체에 충격을 주었다. 그동안 무적으로 여겨졌던 "하늘이 보낸 처녀"가 적의 손에 떨어진 것이다. 프랑스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고, 반대로 영국군과 부르고뉴군은 사기가 올랐다. 많은 사람들이 잔의 신성함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선량공은 잔을 영국에 넘겨주었다. 영국은 잔을 마녀로 몰아 화형에 처함으로써 그동안의 패배를 설욕하고 싶어했다. 동시에 샤를 7세의 정통성에도 타격을 주려 했다. 마녀의 도움으로 즉위한 왕이라는 낙인을 찍으려는 것이었다.
샤를 7세는 잔을 구하기 위한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다. 몸값을 지불하려는 시도도 없었고, 포로 교환 협상도 하지 않았다. 이미 잔의 정치적 유용성이 끝났다고 판단한 것 같다. 또한 잔이 마녀라는 판결을 받으면 자신의 즉위식도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루앙 재판과 순교
1431년 1월부터 루앙에서 잔에 대한 종교재판이 시작되었다. 재판장은 보베 주교 피에르 코숑이었는데, 그는 영국의 충실한 협력자였다. 재판의 목적은 잔을 마녀와 이단자로 몰아 화형에 처하는 것이었다.
재판 과정에서 잔은 놀라운 지혜와 용기를 보여주었다. 글을 모르는 시골 처녀였지만, 능숙한 신학자들의 교묘한 질문에 조리 있게 대답했다. "교회가 당신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신만이 아신다"는 그녀의 답변은 신학적으로도 정확했다.
하지만 재판의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1431년 5월 30일, 19세의 잔 다르크는 루앙의 시장 광장에서 화형당했다. 그녀는 "예수!"라고 외치며 숨을 거두었다. 불길 속에서도 그녀의 심장은 타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잔의 죽음은 역설적으로 그녀의 전설을 완성시켰다. 순교자가 된 잔은 더욱 강력한 상징이 되었다. 프랑스인들은 그녀를 성녀로 여기기 시작했고, 영국에 대한 증오는 더욱 깊어졌다. 1456년 교황은 잔에 대한 재심을 통해 그녀의 무죄를 선언했고, 1920년에는 공식적으로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백년전쟁의 대역전과 프랑스 승리
잔 다르크의 죽음 이후에도 그녀가 시작한 변화는 계속되었다. 프랑스군은 점차 전세를 회복했고, 1435년 아라스 조약으로 부르고뉴 공국이 프랑스 편으로 돌아섰다. 이는 잔이 만든 변화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샤를 7세는 잔의 개혁 정신을 계승해 군사 개혁을 단행했다. 상비군을 창설하고 화포를 대량 도입했다. 프랑스군은 점차 근대적인 군대로 변모했다. 1449년부터 시작된 최종 공세에서 프랑스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453년 카스티용 전투에서 영국군이 결정적으로 패배하면서 백년전쟁은 사실상 끝났다. 영국은 칼레만 남기고 프랑스 대륙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100년 넘게 계속된 긴 전쟁이 마침내 프랑스의 승리로 끝난 것이다.
이 승리의 출발점은 바로 1429년 잔 다르크의 오를레앙 해방이었다. 그녀가 불러일으킨 민족 의식의 각성과 희망의 불씨가 마침내 완전한 승리로 이어진 것이다. 잔은 직접 백년전쟁의 종료를 보지는 못했지만, 그 승리의 기초를 닦은 진정한 영웅이었다.
잔 다르크가 남긴 역사적 유산
잔 다르크의 영향은 군사적 승리를 훨씬 넘어섰다. 그녀는 프랑스 민족 의식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백년전쟁 이전까지 "프랑스인"이라는 정체성은 희미했다. 사람들은 자신을 부르고뉴인, 노르망인, 가스코뉴인으로 여겼지 프랑스인이라는 생각은 약했다. 하지만 잔의 등장으로 프랑스 전체가 하나의 민족이라는 의식이 뚜렷해졌다.
종교적 측면에서도 잔의 영향은 컸다. 그녀는 프랑스를 "신이 선택한 나라"로 만들었다. 프랑스 왕은 단순한 세속 군주가 아니라 신의 뜻을 실현하는 성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이런 "갈리아교회주의" 전통은 후에 절대왕정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고, 심지어 프랑스 대혁명 시기에도 영향을 미쳤다.
여성사적 관점에서 잔의 의미는 더욱 특별하다. 중세 사회에서 여성이 정치적·군사적 역할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잔은 성별의 한계를 뛰어넘어 역사를 바꿨다. 비록 그녀 개인의 삶은 비극적으로 끝났지만, 여성도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문화적으로도 잔의 영향은 지속되었다. 프랑스 문학과 예술에서 잔 다르크는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재창조되었다. 볼테르부터 베르디까지, 수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이 잔을 주제로 작품을 만들었다. 그녀는 프랑스 문화의 영원한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백년전쟁 종료 후의 변화
백년전쟁의 종료는 단순히 외침의 종료가 아니라 프랑스 사회 전체의 대변혁을 의미했다. 전쟁을 통해 왕권은 전례 없이 강화되었다. 상비군 창설, 조세권 확립, 중앙집권화 강화 등 근대 국가의 기본 요소들이 모두 백년전쟁 과정에서 확립되었다.
경제적으로도 큰 변화가 있었다. 전쟁으로 인한 파괴와 인구 감소는 단기적으로는 재앙이었지만, 장기적으로는 새로운 발전의 기회가 되었다. 농업 생산성이 향상되었고, 상공업이 발달했으며,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었다. 특히 화포와 같은 군사 기술의 발달은 다른 분야에도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사회적으로는 봉건제의 쇠퇴가 가속화되었다. 용병과 상비군의 등장으로 기사의 군사적 중요성이 줄어들었고, 화폐 경제의 발달로 봉건적 관계가 약화되었다. 대신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가 확립되었다.
국제적으로도 프랑스의 지위가 크게 향상되었다. 백년전쟁 승리로 프랑스는 서유럽의 강대국으로 확실히 자리잡았다. 영국은 대륙에서 축출되어 섬나라로 물러났고, 신성로마제국은 분열 상태에 있었다. 프랑스는 이제 유럽 정치의 중심축이 되었다.
결론
1429년 5월의 오를레앙 해방에서 시작된 잔 다르크의 기적은 단순한 군사적 승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절망에 빠진 한 민족이 다시 일어서는 극적인 부활의 드라마였다. 17세의 시골 처녀가 불과 몇 개월 만에 백년전쟁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은 것은 역사상 가장 놀라운 사건 중 하나다.
잔의 등장이 더욱 의미 있는 것은 그것이 민중의 힘을 보여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궁정의 음모나 외교적 책략이 아니라, 평범한 농민의 딸이 가진 순수한 신념과 용기가 역사를 바꾼 것이다. 이는 후대에 민주주의와 민족주의가 발달하는 데도 중요한 선례가 되었다.
잔 다르크의 죽음은 비극적이었지만, 그녀의 정신은 계속 살아남았다. 그녀가 심은 희망의 씨앗은 마침내 백년전쟁의 완전한 승리로 열매를 맺었다. 더 나아가 그 정신은 프랑스 역사를 통틀어 위기의 순간마다 프랑스인들에게 용기와 영감을 주는 불멸의 상징이 되었다.
오를레앙의 기적에서 시작된 대역전의 드라마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보여준다. 잔 다르크라는 한 개인의 확신과 용기가 어떻게 전체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증명한 사건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교훈을 주는 불멸의 전설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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