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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역사 19. 잔 다르크의 기적과 오를레앙 해방, 그리고 백년전쟁 대역전의 드라마

1429년 5월 8일 일요일 아침, 오를레앙 성벽에서 영국 국기가 내려지고 프랑스 백합 문장이 다시 펄럭였다. 7개월 동안 계속된 포위 공격을 뚫고 도시가 해방된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 승리가 더욱 놀라운 것은 그것을 이끈 인물 때문이었다. 17세의 시골 처녀 잔 다르크가 신의 계시를 받았다며 나타나 불과 4일 만에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오를레앙을 해방시킨 것이다. 이 사건은 단순한 군사적 승리를 넘어 프랑스 전체에 희망의 불씨를 지폈고, 백년전쟁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았다.프랑스 최대 위기의 시대1420년 트루아 조약으로 프랑스는 사실상 멸망 직전까지 몰렸다. 정신병을 앓던 샤를 6세는 자신의 아들 도팽 샤를(훗날 샤를 7세)을 상속에서 제외하고 영국 왕 헨리 5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프랑스 왕국은 ..

History/Europe 2025.07.05

프랑스 역사 18. 백년전쟁의 서막과 크레시-푸아티에 대패, 장궁이 바꾼 중세 전쟁의 패러다임

1337년 11월, 프랑스 왕 필리프 6세가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의 가스코뉴 영지를 몰수한다고 선언했을 때, 그 누구도 이 분쟁이 100년 넘게 지속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날부터 시작된 백년전쟁은 단순한 영토 분쟁을 넘어 중세 유럽의 정치 지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특히 1346년 크레시 평원과 1356년 푸아티에에서 벌어진 두 번의 결정적 패배는 프랑스 기사도의 자존심을 산산이 부수었고, 영국 장궁병들이 중세 전쟁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것을 온 유럽에 각인시켰다.백년전쟁 개전의 복합적 배경백년전쟁의 표면적 원인은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였다. 1328년 샤를 4세가 아들 없이 죽자, 프랑스 왕위는 발루아 가문의 필리프 6세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이 이사벨..

History/Europe 2025.07.05

프랑스 역사 17. 흑사병의 공포와 자크리 농민 봉기, 그리고 14세기 사회 대변혁의 시대

14세기 중엽 프랑스는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재앙 중 하나를 맞이했다. 1347년부터 시작된 흑사병은 불과 몇 년 만에 프랑스 인구의 3분의 1을 앗아갔고, 살아남은 자들마저 절망과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이 대재앙은 단순히 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데 그치지 않았다. 천년 동안 이어져 온 봉건 질서를 뿌리째 흔들었고, 1358년 자크리라 불리는 대규모 농민 봉기를 촉발시켰으며, 프랑스 사회 전체를 근본적으로 재편시켰다.죽음의 그림자, 흑사병의 도래1347년 10월, 지중해 무역로를 따라 온 배들이 흑해에서 출발해 유럽 각지로 퍼져나갔다. 이 배들은 곡물과 향신료만 싣고 온 것이 아니었다. 배 안에는 페스트균에 감염된 쥐들과 벼룩들이 숨어 있었고, 이들이 유럽 대륙에 전례 없는 재앙을 가져왔다.흑사..

History/Europe 2025.07.05

프랑스 역사 16. 필리프 4세의 교황권과 템플 기사단 도전, 그리고 근대 국가 재정 체계의 출발점

13세기 말 프랑스 왕국은 중세 유럽의 판도를 뒤흔들 거대한 변화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필리프 4세(재위 1285-1314)라는 한 명의 왕이 교황권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유럽 최고의 금융 세력이었던 템플 기사단을 무너뜨리며, 동시에 근대적 조세 제도의 기초를 닦아낸 것이다. 이 모든 일이 3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프랑스에서 벌어졌다.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와의 충돌필리프 4세가 왕위에 오를 당시, 교황청은 여전히 중세 유럽의 절대적 권위로 군림하고 있었다. 특히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재위 1294-1303)는 세속 권력에 대한 교회의 우위를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필리프 4세는 이런 전통적 질서에 정면으로 맞섰다.갈등의 시작은 성직자에 대한 과세 문제였다. 필리프 4세는 지속적인 전쟁 비용을 충..

History/Europe 2025.07.05

프랑스 역사 15. 성왕 루이 9세의 개혁과 7·8차 십자군 - 왕권 강화부터 이집트 원정까지

1226년 12세의 나이로 즉위한 루이 9세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군주로 평가받는다. 그는 44년간의 재위 기간 동안 프랑스를 유럽 최강국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적 이상을 정치에 구현하려 노력한 성인왕이었다. 특히 그의 내정 개혁은 중세 왕권의 모범이 되었고, 두 차례의 십자군 원정은 그의 종교적 이상을 보여주었다. 비록 십자군에서는 실패했지만, 그의 개혁 정신과 도덕적 권위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어린 왕과 모후 블랑슈의 섭정루이 9세가 즉위할 당시 프랑스 왕국은 여러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어린 왕을 틈타 대제후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잉글랜드는 대륙 영토 회복을 노렸다. 이런 상황에서 모후 블랑슈 드 카스티유(Blanche de Castille)의 역할이..

History/Europe 2025.07.04

프랑스 역사 14. 알비파 토벌과 남부 프랑스의 종교전 및 문화 변화 - 카타리파 이단 심판부터 랑그도크 정복까지

13세기 초 남부 프랑스에서 벌어진 알비파 토벌(Croisade des Albigeois)은 프랑스 역사상 가장 참혹한 종교전쟁 중 하나였다. 표면적으로는 카타리파(Cathares) 이단을 척결하기 위한 십자군이었지만, 실제로는 북부 프랑스의 남부 정복 전쟁이었다. 이 20년간의 전쟁은 남부 프랑스의 독특한 문화와 정치 체제를 완전히 파괴했고, 프랑스 왕국의 통일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었고, 찬란했던 옥시타니아 문명이 사라졌다.카타리파의 교리와 확산카타리파, 혹은 알비파라고 불린 이들은 12세기부터 남부 프랑스에서 급속히 확산된 종교 운동이었다. 이들의 교리는 기존 가톨릭 교회와 근본적으로 달랐다. 카타리파는 선악이원론을 믿었는데, 이 세상은 악한 신이 창..

History/Europe 2025.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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