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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역사 75. 아체르보 선거법과 국가 구제 독재: 무솔리니가 합법적 수단으로 독재 체제를 구축하는 과정

1922년 10월 권력을 장악한 무솔리니는 여전히 많은 제약에 직면해 있었다. 연립정부에서 파시스트는 소수였고, 의회에서도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했다. 국왕과 기존 엘리트들은 언제든 그를 해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솔리니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는 점진적이고 교묘한 방법으로 반대 세력들을 하나씩 제거해나갔다. 1923년 아체르보 선거법 통과와 1924년 마테오티 사건은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분수령이 됐다. 무솔리니는 합법성의 외피를 유지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독재 체제를 구축해갔다. 이는 20세기 권위주의 정치의 전형적인 패턴이 됐다.초기 연립정부와 점진적 권력 장악무솔리니의 첫 번째 내각은 겉보기에는 연합정부였다. 22명의 각료 중 파시스트는 단 4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자유주의자, 민족주의자, 가..

History/Europe 01:17:18

이탈리아 역사 74. 1922년 로마 진군과 파시즘의 집권: 무솔리니가 권력을 장악하는 극적인 순간

1922년 10월 28일 새벽, 수만 명의 검은셔츠가 로마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극적인 정치적 쿠데타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 "진군"은 실제로는 거의 총성 없이 이뤄진 정치적 연극에 가까웠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밀라노에서 안전하게 기다리며 전개 상황을 지켜보았고, 결국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국왕의 부름을 받아 총리가 됐다. 3년 전 겨우 4,795표를 얻었던 정치 신인이 이제 유럽의 한 강국을 통치하게 된 것이다. 로마 진군은 민주주의가 어떻게 내부로부터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가 됐다.1922년 정치적 위기와 파시스트의 기회1922년 들어 이탈리아 정치는 완전한 교착 상태에 빠졌다. 루이지 파크타 내각이 무너진 후 의회에서는 안정적인 다수파를 구..

History/Europe 01:16:56

이탈리아 역사 73. 무솔리니와 검은셔츠의 등장: 파시스트 운동이 지방권력을 장악해가는 과정

붉은 이년의 혼란이 절정에 달했던 1919년 3월 23일, 밀라노의 한 작은 회의실에서 이탈리아 역사를 바꿀 정치 운동이 시작됐다. 베니토 무솔리니가 주도한 '파시 이탈리아니 디 콤바티멘토(이탈리아 전투단)'의 창립이었다. 겨우 100여 명으로 시작된 이 조직은 불과 3년 만에 이탈리아 전역을 휩쓸며 기존 정치 질서를 뒤흔들었다. 검은셔츠를 입은 파시스트들은 폭력과 선전을 무기로 지방 정치를 장악해나갔고, 혼란에 지친 중산층과 보수 세력들로부터 점점 더 많은 지지를 얻어갔다.베니토 무솔리니의 정치적 변신베니토 무솔리니는 원래 급진적 사회주의자였다. 1883년 에밀리아-로마냐의 가난한 대장장이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반항적이고 폭력적인 성격을 보였다. 교사가 된 후에도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했고,..

History/Europe 01:16:34

이탈리아 역사 72. 전후 혼란과 붉은 이년: 사회주의 물결과 공장평의회 운동이 휩쓴 격동의 시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이탈리아는 승리의 기쁨도 잠시, 곧바로 심각한 사회적 혼란에 휩싸였다. 1919년부터 1920년까지 이어진 이 시기를 역사가들은 '비엔니오 로쏘(붉은 이년)'라고 부른다. 전쟁이 남긴 경제적 파탄, 사회적 불평등, 그리고 러시아 혁명의 영향이 맞물리면서 이탈리아 전역에서 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과 농민들의 토지 점거가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기존 자유주의 정치 체제는 이러한 급진적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이는 결국 파시즘 등장의 직접적인 배경이 됐다.전후 경제 위기와 사회적 불만전쟁이 끝나자 이탈리아 경제는 급격한 침체에 빠졌다. 군수산업 중심으로 돌아가던 경제가 평시 체제로 전환되면서 대규모 실업이 발생했다. 특히 북부 공업지대에서는 수십만 명의 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일..

History/Europe 01:16:14

이탈리아 역사 71. 제1차 세계대전 참전과 이탈리아 이른덴타: 피아베 방어선에서 생제르맹 조약까지

19세기 말 통일을 완성한 이탈리아는 유럽의 새로운 강국으로 자리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트렌티노와 트리에스테 같은 '이탈리아계 미회복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이는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에게 큰 골칫거리였다. 1914년 사라예보에서 총성이 울리며 유럽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때, 이탈리아는 마침내 이 '미완의 통일'을 완성할 기회를 포착했다.중립에서 참전까지의 복잡한 선택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이탈리아는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와 함께 삼국동맹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정작 전쟁이 시작되자 이탈리아는 '신성한 이기주의'라는 명분 하에 중립을 선언했다. 삼국동맹은 방어적 성격의 조약이었는데,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먼저 세르비아를 공격했기 때문에 이탈..

History/Europe 01:15:46

이탈리아 역사 70. 산업화와 남부 문제의 심화 - 토리노-제노바 공업축과 토지세 갈등

통일 이후 이탈리아는 근대화의 길을 걸어야 했지만, 그 과정에서 지역 간 불균형이 더욱 심화되는 모순적 상황을 맞게 된다.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한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이탈리아는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발전은 주로 토리노-제노바를 잇는 북서부 공업 지대에 집중되었고, 남부는 오히려 더욱 낙후되어 갔다. 특히 세제 정책을 둘러싼 남북 갈등은 새로 통일된 국가의 통합성을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통일 이후의 경제적 도전1870년 로마 점령으로 정치적 통일을 완성한 이탈리아는 이제 경제적 통합이라는 더 어려운 과제에 직면했다. 통일 이전 이탈리아 반도는 여러 개의 독립된 경제권으로 분할되어 있었고, 각 지역마다 서로 다른 화폐, 도량형, 관세 체계를 가지고 ..

History/Europe 2025.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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