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6월 2일은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중요한 날 중 하나였다. 이날 이탈리아 국민들은 군주제를 유지할 것인가 공화제로 전환할 것인가를 놓고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동시에 제헌의회 선거도 치러졌는데, 이는 여성들이 처음으로 참여하는 선거이기도 했다. 54.3%의 찬성으로 공화제가 승리하면서 85년간 이어진 사보이 왕가의 통치가 끝나고 새로운 이탈리아 공화국이 탄생했다.
해방 후 정치적 혼란과 기관 위기
1945년 해방 이후 이탈리아는 심각한 정치적 공백 상태에 있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1943년 9월 로마를 도망쳤던 일로 국민들의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 바돌리오 정부도 연합군의 꼭두각시라는 비판을 받으며 정통성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파시즘 붕괴 후 20년 만에 복귀한 정치 세력들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1944년 6월 로마 해방 후 이반오에 보노미가 새 총리가 되었지만, 그 역시 임시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다. 북부 이탈리아는 여전히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었고, 남부는 연합군 점령 하에 있었다. 국가 통일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정치적 미래를 결정하기는 어려웠다.
CLN(민족해방위원회) 내부에서도 갈등이 심화되었다. 공산당과 사회당은 급진적 사회 개혁을 주장했고, 자유당과 기독민주당은 온건한 변화를 원했다. 특히 왕정 문제를 둘러싸고 의견이 첨예하게 갈렸다. 공산당과 사회당, 행동당은 공화제를 지지했지만, 자유당은 왕정 유지를 선호했다. 기독민주당은 애매한 입장을 유지했다.
1945년 6월 페루치오 파리가 총리가 되었지만 역시 안정된 정부를 구성하지는 못했다. 경제적 어려움도 심각했다. 전쟁으로 파괴된 인프라, 극심한 인플레이션, 대량 실업 등이 새 정부를 압박했다. 북부에서는 공장 점거 파업이 빈발했고, 남부에서는 토지 개혁을 요구하는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왕실의 위기와 움베르토 2세의 즉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1946년 5월 9일 아들 움베르토에게 왕위를 양위했다. 이는 국민투표에서 왕정의 승리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최후의 시도였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국왕의 로마 도주와 파시즘에 대한 협력은 왕실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훼손시켰다.
움베르토 2세는 매력적이고 개방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국민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려 노력했고, 민주적 개혁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겨우 한 달 남짓한 재위 기간으로는 왕실의 이미지를 회복하기에 부족했다. 더욱이 그의 아버지가 저지른 실정의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왕정 지지 세력들은 주로 남부 지역의 보수적인 계층이었다. 대지주, 구 관료, 일부 군인들이 왕정 유지를 원했다. 이들은 공화제로의 전환이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다. 또한 전통적 질서의 유지가 사회 안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반면 공화제 지지 세력은 더욱 광범위했다. 레지스탕스에 참여했던 사람들, 도시의 중산층과 노동자, 북부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공화제를 지지했다. 이들에게 왕정은 파시즘과 전쟁의 책임을 진 낡은 제도였다. 새로운 이탈리아에는 새로운 정치 체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여성 참정권의 획득과 사회 변화
1946년 선거의 또 다른 획기적 의미는 여성들이 처음으로 투표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1945년 2월 1일 법령에 의해 21세 이상 여성에게 참정권이 부여되었다. 이는 레지스탕스 과정에서 보여준 여성들의 희생과 공헌에 대한 인정이었다.
여성 참정권 획득은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여성 해방 운동은 파시즘 시대에 탄압받았다가 해방 후 다시 활성화되었다. 테레사 나니, 테레사 마테이, 리나 메렐리와 같은 여성 운동가들이 앞장서서 참정권 확대를 요구했다.
UDI(이탈리아 여성연합)가 1944년 설립되어 여성들의 정치 참여를 이끌었다. 공산당과 사회당은 여성 참정권을 적극 지지했고, 기독민주당도 가톨릭 여성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찬성했다. 자유당과 보수 세력들은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결국 시대의 흐름을 받아들였다.
1946년 선거에는 1,350만 명의 여성이 참여했다. 이는 전체 유권자의 48%에 달하는 숫자였다. 여성들의 투표율은 남성들과 비슷한 수준이었고, 이는 정치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여주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21명의 여성이 제헌의회에 당선되었다는 점이다.
당선된 여성 의원들은 다양한 정치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공산당의 테레사 나니와 리타 몬타냐나, 사회당의 비르지니아 레이스 로밀리, 기독민주당의 마리아 페데리치 아고스티니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들은 제헌의회에서 여성의 권리와 가족 보호에 관한 조항들을 헌법에 포함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6월 2일 국민투표와 치열한 선거전
국민투표를 앞두고 이탈리아 전역에서 격렬한 선거 운동이 벌어졌다. 공화제 지지자들은 "새로운 이탈리아를 위한 새로운 제도"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이들은 왕정이 파시즘을 허용했고 전쟁의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공화제만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보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왕정 지지자들은 "전통과 안정"을 강조했다. 이들은 급진적 변화가 사회 혼란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한 움베르토 2세가 새로운 군주로서 민주적 개혁을 이끌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교황 비오 12세가 공개적으로 왕정을 지지한다고 알려지면서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 왕정 지지가 증가했다.
지역별로는 뚜렷한 차이가 나타났다. 북부와 중부 지역은 공화제 지지가 압도적이었고, 남부와 섬 지역은 왕정 지지가 우세했다. 이는 경제 발전 수준, 교육 수준, 그리고 레지스탕스 경험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북부에서는 파시즘과 독일 점령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변화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
선거 과정에서 일부 부정 행위도 발생했다. 특히 남부 일부 지역에서는 전통적인 후견주의 정치 관행이 나타났다. 지주들이 소작농들에게 투표를 강요하거나, 문맹자들을 속여 다른 후보에게 투표하게 하는 일들이 있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공정한 선거가 치러졌다.
투표 결과와 공화국의 승리
6월 2일 투표가 시작되었다. 전국적으로 89.1%의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다. 이는 이탈리아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여주었다. 특히 여성들의 적극적 참여가 눈에 띄었다. 많은 여성들이 처음으로 행사하는 참정권의 의미를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개표 결과는 접전이었다. 공화제 지지 1,254만 7,009표(54.3%), 왕정 지지 1,050만 9,423표(45.7%)로 공화제가 승리했다. 약 200만 표 차이였지만, 이는 명백한 승리였다. 지역별로는 예상대로 북부와 중부에서 공화제가 압승했고, 남부에서는 왕정이 우세했다.
가장 큰 차이를 보인 곳은 밀라노였다. 공화제 지지가 75%를 넘었다. 토리노, 제노바, 볼로냐 등 공업 도시들도 비슷한 결과를 보였다. 반면 나폴리, 바리, 팔레르모 같은 남부 도시들에서는 왕정 지지가 우세했다. 로마는 60% 정도가 공화제를 지지해 중간적 위치를 보였다.
제헌의회 선거에서는 기독민주당이 207석(35.2%)으로 제1당이 되었다. 사회당이 115석(20.7%), 공산당이 104석(18.9%)을 얻었다. 자유당은 41석(6.8%), 우파 정당인 우오모 퀄룬퀘(보통사람당)는 30석을 얻었다. 기독민주당의 승리는 예상보다 큰 것이었고, 이는 가톨릭 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을 보여주었다.
왕실의 망명과 새 정부 구성
투표 결과가 확정되기 전인 6월 13일, 움베르토 2세는 포르투갈로 망명을 떠났다. 그는 내전을 피하기 위해 결과를 받아들인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일부 왕정 지지자들은 선거 부정을 주장하며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특히 남부 일부 지역에서는 소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6월 18일 엔리코 데 니콜라가 임시 국가원수로 선출되었다. 그는 자유주의 정치인으로 온건하고 균형 잡힌 인물이었다. 이는 좌우 정치 세력 간의 타협의 산물이었다. 데 니콜라는 새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국가원수 역할을 맡기로 했다.
새 정부는 알치데 데 가스페리가 총리를 맡아 구성되었다. 기독민주당이 주도하되 다른 정당들과 연립하는 형태였다. 공산당의 팔미로 톨리아티가 법무장관, 사회당의 피에트로 네니가 제헌의회 의장을 맡아 좌파도 정부에 참여했다. 이는 반파시즘 연합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정치적 갈등의 씨앗은 이미 뿌려져 있었다. 냉전이 시작되면서 공산당에 대한 서방의 우려가 커졌다. 미국은 마셜 플랜을 통해 이탈리아를 지원하면서 동시에 공산주의 확산을 견제하려 했다. 이는 곧 이탈리아 정치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었다.
새로운 헌법의 제정 과정
제헌의회는 1946년 6월 25일 첫 회의를 열었다. 새로운 헌법을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헌법 기초 위원회는 메우치오 루이니(기독민주당), 우고 라 말파(행동당), 움베르토 테라치니(공산당) 등이 이끌었다. 각 정당의 이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기본적 가치에 대해서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새 헌법은 개인의 존엄성과 기본권을 핵심으로 했다. 파시즘의 독재를 경험한 후였기 때문에 인권 보장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경제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의지도 담았다. 이는 레지스탕스 과정에서 형성된 새로운 사회 의식의 반영이었다.
여성의 권리도 중요한 쟁점이었다. 남녀평등 원칙이 헌법에 명시되었고, 여성의 정치 참여와 직업 선택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하지만 가족 제도와 관련해서는 가톨릭 교회의 영향으로 전통적 가치가 많이 반영되었다. 이혼 금지와 같은 조항들이 그 예였다.
경제 조항을 둘러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좌파는 사회주의적 경제 체제를 원했고, 우파는 자유 시장 경제를 지지했다. 결국 타협안으로 '사회적 시장 경제' 개념이 도입되었다. 사유재산을 인정하되 사회적 기능을 강조하고, 국가의 경제 개입을 허용하는 내용이었다.
지역주의와 정치적 분열의 지속
1946년 국민투표 결과는 이탈리아의 지역적 분열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남북 간의 경제적, 사회적 격차가 정치적 선택의 차이로 나타났다. 이는 통일 이후 지속되어온 '남부 문제'의 또 다른 발현이었다.
북부 지역의 공화제 지지는 경제 발전과 교육 수준의 상승, 그리고 레지스탕스 경험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이 지역 사람들은 변화와 혁신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새로운 정치 제도에 대한 기대가 컸다. 또한 파시즘과 독일 점령을 직접 경험하면서 구체제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다.
반면 남부 지역의 왕정 지지는 전통적 권위에 대한 존중과 급진적 변화에 대한 우려에서 비롯되었다. 이 지역은 여전히 농업이 중심이었고, 교육 수준도 상대적으로 낮았다. 또한 레지스탕스 경험이 제한적이어서 해방에 대한 감격도 북부만큼 크지 않았다.
이러한 지역적 차이는 새로운 공화국의 통합에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남부 지역의 불만을 해소하고 국가적 일체감을 조성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는 경제 개발과 사회 개혁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새로운 민주주의의 출발과 과제
1946년 6월 2일은 이탈리아 민주주의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다. 국민들이 직접 투표로 정치 체제를 선택한 것은 진정한 주권 행사였다. 여성 참정권의 확립은 민주주의의 확대를 의미했다. 파시즘의 독재를 경험한 후 얻은 자유의 가치는 더욱 소중했다.
하지만 새로운 민주주의 앞에는 많은 과제가 놓여 있었다. 전쟁으로 파괴된 경제의 재건, 사회적 갈등의 해결, 정치 제도의 안정화 등이 시급했다. 특히 냉전의 시작으로 좌우 이념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이는 새로운 공화국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요소였다.
지역적 불균형도 중요한 문제였다. 남북 간의 경제적 격차는 정치적 분열로 이어질 수 있었다. 남부 지역의 통합을 위한 특별한 노력이 필요했다. 교육 확산, 경제 개발, 사회 복지 확대 등이 그 방법이었다.
국제적으로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탈리아는 패전국으로서 연합국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영토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트리에스테를 둘러싼 유고슬라비아와의 갈등, 아프리카 식민지의 상실 등이 외교적 과제였다.
1946년의 공화국 수립과 여성 참정권 확립은 이탈리아 현대사의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85년간 지속된 왕정이 끝나고 새로운 민주 공화국이 탄생했다. 절반의 국민이 처음으로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는 사회 변화의 원동력이 되었다. 비록 지역적 분열과 정치적 갈등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었지만, 이탈리아 국민들은 스스로의 손으로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기 시작했다. 파시즘의 폐허에서 피어난 민주주의의 꽃은 앞으로 수많은 시련을 겪으며 성장해 나갈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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