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6월 2일 국민투표로 공화국이 수립된 이탈리아는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었다. 파시즘과 전쟁의 상처를 딛고 민주주의 국가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새로운 헌법이 필요했다. 동시에 전쟁으로 폐허가 된 경제를 재건하고, 여전히 봉건적 토지소유 구조가 남아있던 남부의 농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공화국 헌법의 탄생
1946년 6월 국민투표와 함께 실시된 제헌의회 선거에서는 기독민주당(DC), 사회당(PSI), 공산당(PCI)이 주요 정당으로 부상했다. 이들 정당은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지고 있었지만, 민주주의 공화국 건설이라는 공통 목표 아래 협력해야 했다.
제헌의회는 1946년 6월부터 1948년 1월까지 약 1년 반 동안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는 작업에 매진했다. 헌법 제정 과정에서 가장 큰 쟁점은 국가의 성격과 권력 구조였다. 기독민주당은 중앙집권적 의회제를 선호했고, 사회당과 공산당은 지방분권과 더 강한 사회경제적 권리 보장을 주장했다.
1947년 12월 22일 제헌의회에서 승인된 이탈리아 공화국 헌법은 타협의 산물이었다. 헌법은 노동의 권리를 기본권으로 명시하고("이탈리아는 노동에 기초한 민주공화국이다"), 교육권, 건강권 등 사회권을 폭넓게 보장했다. 또한 가톨릭교회와의 관계에서는 라테라노 조약을 계승하면서도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절충적 입장을 취했다.
기독민주당의 정치적 헤게모니 확립
1948년 4월 18일 치러진 첫 번째 총선에서 기독민주당은 48.5%의 압도적 득표율로 승리했다. 이는 냉전 구조 속에서 서방 진영에 속하려는 이탈리아인들의 선택이기도 했다. 알치데 데 가스페리가 이끄는 기독민주당은 이후 1990년대 초까지 이탈리아 정치의 중심축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데 가스페리는 온건하면서도 실용적인 정치 노선을 추구했다. 그는 파시즘 시대의 관료와 군 간부들을 대거 재임용하여 행정 연속성을 확보하는 한편, 공산당을 정부에서 배제하면서 서방 진영과의 협력을 강화했다. 1947년 5월 좌파 정당들을 연정에서 축출한 것은 냉전 체제 하에서 이탈리아의 서방 편입을 확고히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기독민주당의 정치 철학은 가톨릭 사회교리에 바탕을 두었다. 개인의 자유와 사유재산을 인정하면서도 사회 정의와 연대를 강조하는 제3의 길을 추구했다. 이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적 계획경제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는 시도였다.
마셜플랜과 경제 재건의 토대
1947년 6월 조지 마셜 미국 국무장관이 발표한 유럽부흥계획(ERP, 마셜플랜)은 이탈리아 경제 재건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탈리아는 1948년부터 1952년까지 총 15억 달러의 원조를 받았는데, 이는 당시 이탈리아 GDP의 약 11%에 해당하는 막대한 규모였다.
마셜플랜 자금은 주로 인프라 복구와 산업시설 현대화에 투입되었다. 전쟁으로 파괴된 철도, 도로, 항만이 재건되었고, 철강, 화학, 기계공업 등 기간산업이 현대적 설비로 교체되었다. 특히 북부 공업지대인 밀라노-토리노-제노바 삼각지대는 이 시기 집중적인 투자를 받아 훗날 '경제기적'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하지만 마셜플랜은 단순한 경제원조를 넘어 정치적 의미도 컸다. 원조 조건으로 자유시장경제 체제 도입과 공산주의 세력 배제가 요구되었고, 이는 이탈리아의 서방 편입을 가속화했다. 동시에 미국식 경영기법과 생산방식이 도입되면서 이탈리아 기업문화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남부 농지개혁의 시작
전후 이탈리아가 직면한 가장 시급한 사회문제 중 하나는 남부의 토지 문제였다. 시칠리아, 칼라브리아, 풀리아 등 남부 지역에는 여전히 라티푼디움이라 불리는 대농장 체제가 남아있었다. 소수의 대지주가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반면, 대다수 농민들은 소작농이나 농업노동자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1944년부터 시작된 토지점거 운동은 농지개혁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보여주었다. 전쟁이 끝나자 귀향한 농민들과 빈민들이 유휴지를 점거하며 토지 재분배를 요구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공산당과 사회당의 지지를 받으며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정부는 1948년부터 단계적으로 농지개혁에 착수했다. 먼저 시칠리아에서 시작된 개혁은 대농장을 해체하고 소농에게 토지를 분양하는 것을 핵심으로 했다. 1950년에는 이른바 '스트랄초 법'과 '실라-볼투르노 법'을 통해 남부 전역으로 개혁이 확대되었다.
농지개혁의 성과와 한계
농지개혁을 통해 약 76만 헥타르의 토지가 12만여 농가에 분배되었다. 이는 남부 지역 전체 농지의 약 8%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새로 땅을 얻은 농민들에게는 농업기술 교육과 자금 지원도 함께 제공되었고, 협동조합 설립을 통해 공동 영농도 장려되었다.
하지만 농지개혁의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분배된 토지의 상당 부분이 척박하거나 물 부족 지역이었고, 소규모 분산된 농지로는 효율적인 농업이 어려웠다. 많은 신규 농민들이 기술과 자본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일부는 결국 토지를 되팔고 도시로 떠나야 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농지개혁이 남부 경제구조의 전반적 현대화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공업화가 주로 북부 지역에 집중되면서 남북 격차는 오히려 확대되는 경향을 보였다. 남부는 여전히 농업 중심의 후진적 경제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이는 훗날 '남부 문제'라는 구조적 과제로 남게 되었다.
국제 편입과 서방 진영 가입
경제 재건과 함께 이탈리아는 국제사회 복귀에도 적극 나섰다. 1949년 4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창설 멤버로 참여한 것은 이탈리아의 서방 편입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이는 2차 대전의 패전국에서 서방 진영의 핵심 구성원으로 지위가 격상되었음을 의미했다.
1951년에는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창설에 참여하며 유럽 통합의 출발점에 함께했다. 이탈리아 정치 엘리트들은 유럽 통합을 통해 국가의 위상을 회복하고 경제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특히 데 가스페리는 열렬한 유럽주의자로서 초국가적 유럽 건설을 적극 지지했다.
하지만 NATO 가입과 서방 편입은 국내 정치에 깊은 분열을 가져왔다.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좌파 세력은 이를 '미국의 속국화'라고 비판하며 중립 노선을 주장했다. 이러한 대립은 냉전 시대 내내 이탈리아 정치의 주요 갈등 축이 되었다.
결론
1946년부터 1950년대 초까지의 시기는 현대 이탈리아 국가의 기초가 형성된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새로운 공화국 헌법은 민주주의와 사회 정의를 조화시키려는 이탈리아만의 독특한 체제를 만들어냈다. 기독민주당 중심의 정치 체제는 안정적인 민주주의 발전의 토대가 되었지만, 동시에 좌파 세력의 배제라는 한계도 노정했다. 마셜플랜을 통한 경제 재건은 훗날 경제기적의 출발점이 되었으나, 남북 격차 심화라는 부작용도 낳았다. 농지개혁은 봉건적 토지 소유구조를 일정 부분 해체했지만, 남부 문제의 근본적 해결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 시기에 형성된 정치경제적 구조와 사회적 갈등은 이후 이탈리아 현대사 전개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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