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이년의 혼란이 절정에 달했던 1919년 3월 23일, 밀라노의 한 작은 회의실에서 이탈리아 역사를 바꿀 정치 운동이 시작됐다. 베니토 무솔리니가 주도한 '파시 이탈리아니 디 콤바티멘토(이탈리아 전투단)'의 창립이었다. 겨우 100여 명으로 시작된 이 조직은 불과 3년 만에 이탈리아 전역을 휩쓸며 기존 정치 질서를 뒤흔들었다. 검은셔츠를 입은 파시스트들은 폭력과 선전을 무기로 지방 정치를 장악해나갔고, 혼란에 지친 중산층과 보수 세력들로부터 점점 더 많은 지지를 얻어갔다.
베니토 무솔리니의 정치적 변신
베니토 무솔리니는 원래 급진적 사회주의자였다. 1883년 에밀리아-로마냐의 가난한 대장장이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반항적이고 폭력적인 성격을 보였다. 교사가 된 후에도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했고, 1912년부터는 사회주의당 기관지 『아반티!』의 편집장을 맡아 혁명적 언론인으로 명성을 쌓았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무솔리니의 정치적 노선에 변화가 생겼다. 처음에는 다른 사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했지만, 점차 참전론으로 돌아섰다. 그는 "이탈리아가 위대한 나라가 되려면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며 사회주의당의 중립 노선을 비판했다. 결국 1914년 당에서 제명당한 후, 자신만의 신문 『일 포폴로 디탈리아』를 창간했다.
전쟁 중 무솔리니는 알피니(산악부대) 소위로 복무하며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이 경험은 그에게 "전투적 민족주의"라는 새로운 정치 철학을 심어줬다. 그는 전쟁을 통해 "새로운 이탈리아인"이 탄생한다고 믿었고, 기존의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모두 "낡은 시대의 유물"이라고 비판했다.
전후 무솔리니는 완전히 새로운 정치 세력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1919년 3월 밀라노 산 세폴크로 광장의 산업클럽에서 열린 창립집회에는 참전용사, 아르디티(특수부대), 미래파 예술가, 공화주의자, 민족주의자 등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모였다. 이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기존 정치에 대한 불만과 "강한 이탈리아"에 대한 열망이었다.
파시즘의 이데올로기와 초기 강령
초기 파시즘은 명확한 이데올로기보다는 다양한 요소들의 혼합체였다. 무솔리니는 이를 "행동의 철학"이라고 불렀다. 파시스트들은 기존의 좌우 구분을 거부하고 "제3의 길"을 주장했다. 그들은 동시에 반자본주의와 반사회주의를 표방했고, 공화주의와 민족주의를 결합시켰다.
1919년 파시스트 강령은 상당히 급진적이었다. 8시간 노동제, 여성 참정권, 누진세 강화, 대토지 몰수, 공장에서의 노동자 참여 등을 주장했다. 이는 사회주의 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강력한 민족주의와 팽창주의도 내세웠다. 특히 "절름발이 승리"에 대한 분노를 바탕으로 달마티아와 피우메 병합을 강력히 요구했다.
파시스트들이 다른 정치 세력과 구별되는 점은 폭력의 적극적 사용이었다. 그들은 "혁명적 폭력"을 정당화했고, 의회 정치를 "무력한 수다"라고 조롱했다. 대신 "직접 행동"을 통한 문제 해결을 주장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전쟁을 경험한 젊은 세대들, 특히 아르디티 출신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종교 문제에 대해서도 파시스트들은 독특한 입장을 보였다. 무솔리니 개인은 무신론자였지만, 가톨릭을 "이탈리아 문화의 일부"로 인정했다. 이는 반교권적이었던 기존 자유주의나 사회주의와는 다른 접근이었다. 이러한 실용적 태도는 나중에 가톨릭 세력과의 협력을 가능하게 했다.
1919년 선거 참패와 전략 수정
하지만 파시스트들의 첫 선거 경험은 참담한 실패였다. 1919년 11월 총선에서 파시스트들은 전국에서 겨우 4,795표를 얻는 데 그쳤다. 밀라노에서도 무솔리니는 낙선했고, 사회주의자들에게 크게 밀렸다. 선거 당일 밤 무솔리니는 "파시즘은 죽었다"며 절망에 빠졌다고 한다.
이 참패는 파시스트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줬다. 도시의 노동자들은 여전히 사회주의에 충성하고 있었고, 급진적 공화주의는 대중적 호응을 얻지 못했다. 무솔리니는 전략을 근본적으로 수정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점차 보수 세력과의 연합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급진적 사회 정책들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1920년부터 파시스트들은 "반볼셰비키" 투쟁에 집중했다. 무솔리니는 "사회주의는 이탈리아를 러시아처럼 만들 것"이라며 중산층의 공포심을 자극했다. 동시에 "질서와 권위"를 강조하며 기존 보수 세력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러한 노선 변경은 파시즘의 성격을 크게 바꿔놓았다.
특히 1920년 9월 공장 점거 사건은 파시스트들에게 절호의 기회가 됐다. 무솔리니는 "볼셰비키들이 이탈리아를 파괴하려 한다"며 강력한 대응을 촉구했다. 이는 공장 점거에 놀란 중산층과 자본가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파시스트들은 자신들을 "문명의 수호자"로 포장하기 시작했다.
스쿠아드리즘과 폭력의 조직화
1920년 말부터 파시스트 운동의 성격이 급격히 변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스쿠아드레 다치오네(행동대)'라는 준군사 조직의 등장이었다. 이들은 검은셔츠를 입고 곤봉과 권총으로 무장한 채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조합을 공격했다. 스쿠아드리스티들은 대부분 전쟁 경험이 있는 젊은이들로, 평시에 적응하지 못하고 폭력에 중독된 경우가 많았다.
스쿠아드리즘의 첫 본격적 시험대는 볼로냐였다. 1920년 11월 21일 볼로냐 시청에서 열린 사회주의 시장 취임식에 파시스트들이 난입하여 총격전을 벌였다. 이 사건으로 9명이 죽고 수십 명이 다쳤지만, 당국은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 오히려 많은 중산층들이 "사회주의자들을 혼내준 것"이라며 파시스트들을 은밀히 지지했다.
이후 스쿠아드레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이들의 전술은 매우 체계적이었다. 밤중에 트럭을 타고 농촌 지역을 습격하여 사회주의 정치인들의 집을 불태우고, 노동조합 사무실을 파괴했다. 또한 협동조합과 농민조합을 강제로 해산시키고, 사회주의 성향의 시장과 의원들을 사임하도록 협박했다.
스쿠아드리스티들은 단순한 깡패가 아니었다. 많은 경우 지역 지주나 기업가들의 지원을 받았고, 때로는 경찰과 군대의 묵인 하에 활동했다. 특히 북부 평원 지대에서는 대농장 소유주들이 파시스트들에게 자금과 무기를 제공했다. 이들은 농민 조합의 파업을 막고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해 파시스트들을 용병처럼 활용했다.
지방 정치 장악과 라스 체제
파시스트들의 가장 큰 성공은 지방 정치 장악이었다. 1921년부터 1922년 사이에 파디 평원, 토스카나, 움브리아 등 중북부 농촌 지역에서 파시스트들이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했다. 이들 지역에서는 파시스트 지방 지도자들인 '라스(에티오피아 추장이라는 뜻)'들이 마치 봉건 영주처럼 행세했다.
대표적인 라스로는 페라라의 이탈로 발보, 볼로냐의 레안드로 아르피나티, 크레모나의 로베르토 파리나치 등이 있었다. 이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독자적인 파시스트 조직을 구축했고, 때로는 무솔리니의 지시까지 무시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졌다. 이는 파시즘이 단순히 무솔리니 개인의 운동이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이었음을 보여준다.
라스들의 통치 방식은 지역마다 달랐지만, 공통점은 폭력과 협박을 통한 정치적 독점이었다. 페라라에서 발보는 사회주의 농민조합을 완전히 해체한 후 파시스트 조합을 강제로 가입시켰다. 볼로냐에서 아르피나티는 사회주의 시의원들을 모두 사임시키고 파시스트들로 교체했다. 이들의 방법은 잔혹했지만 "효과적"이었다.
지방 장악 과정에서 파시스트들은 기존 보수 정치인들과의 연합을 적극 추진했다. 자유주의 정치인들 중 상당수가 "볼셰비키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파시스트들과 손을 잡았다. 이러한 연합은 파시스트들에게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활동 공간을 크게 넓혀줬다.
폭력의 일상화와 사회적 수용
1921-1922년 동안 이탈리아에서는 정치적 폭력이 일상화됐다. 파시스트들의 공격으로 사회주의자와 가톨릭 농민조합원 수천 명이 구타당하거나 살해됐다. 특히 에밀리아-로마냐 지역에서는 거의 내전에 가까운 상황이 벌어졌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러한 폭력이 사회적으로 "수용"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중산층들은 파시스트들의 폭력을 "필요악"으로 여겼다. "사회주의자들이 먼저 시작한 폭력"이라며 파시스트들의 보복을 정당화했다. 또한 "질서 회복"이라는 명분 하에 일시적인 폭력은 감수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인식은 파시스트들에게 도덕적 면죄부를 제공했다.
언론도 파시스트 폭력에 대해 대체로 관대했다. 『코리에레 델라 세라』 같은 주요 신문들은 파시스트들을 "애국자"로 묘사하고 그들의 폭력을 "정당한 분노"로 해석했다. 반면 사회주의자들의 저항은 "무질서"나 "폭동"으로 규정했다. 이러한 언론 보도는 여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정치권에서도 파시스트 폭력에 대한 비판이 약했다. 지올리티 같은 자유주의 정치인들은 "젊은이들의 과격함"으로 치부하며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일부는 파시스트들을 "견제와 균형"의 도구로 활용할 수 있다고 계산했다. 이러한 안이한 인식은 나중에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1921년 총선과 정치적 돌파구
1921년 5월 총선에서 파시스트들은 극적인 반전을 이뤘다. 지올리티 총리가 파시스트들을 자신의 "국민블록" 연합에 포함시키면서 이들은 35명의 의원을 배출했다. 무솔리니도 밀라노에서 당선됐다. 2년 전 4,795표에 그쳤던 정당이 이제 의회에서 영향력 있는 세력이 된 것이다.
이 성공은 파시스트들에게 엄청난 자신감을 줬다. 무솔리니는 의회 첫 연설에서 "파시즘은 이제 이탈리아 정치의 핵심 세력"이라고 선언했다. 동시에 그는 기존 정치인들에게 "협력하거나 물러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는 파시즘이 더 이상 주변적 운동이 아니라 권력 장악을 노리는 세력임을 보여줬다.
선거 성공 후 파시즘 내부에서는 노선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됐다. 무솔리니는 의회 정치 참여를 통한 점진적 권력 장악을 선호했지만, 발보나 파리나치 같은 급진파들은 "혁명적 행동"을 계속 주장했다. 이들은 "의회는 부패한 곳이므로 폭력으로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1년 8월 무솔리니는 사회주의자들과 "평화 협정"을 체결하려 했지만, 지방의 라스들이 강력히 반발했다. 이들은 "폭력이야말로 파시즘의 본질"이라며 무솔리니의 온건 노선을 비판했다. 결국 무솔리니는 평화 협정을 포기하고 급진파들의 노선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파시즘이 폭력을 완전히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줬다.
파시스트당 창당과 조직 정비
1921년 11월 로마에서 열린 대회에서 파시스트들은 정식 정당인 '파르티토 나치오날레 파시스타(국가파시스트당, PNF)'를 창당했다. 이는 파시즘이 단순한 운동에서 정치 조직으로 발전했음을 의미했다. 당 규약에서는 무솔리니를 '두체(지도자)'로 규정하고 절대적 권위를 부여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지방 라스들의 힘이 여전히 강했다. 각 지역의 파시스트 조직들은 독자적인 성격을 유지했고, 중앙당과 갈등을 빚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재정 문제에서는 지방 조직들이 독립성을 고집했다. 이들은 지역 자본가들로부터 직접 후원을 받았기 때문에 중앙당의 통제를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무솔리니는 이러한 분산적 구조를 통합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다. 그는 정기적으로 지방을 순회하며 라스들과 직접 만났고, 『일 포폴로 디탈리아』를 통해 중앙의 방침을 전달했다. 또한 젊은 지식인들을 충원하여 당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강화하려 했다.
당 창당과 함께 파시스트들은 대중 조직 확대에도 나섰다. 청년 조직, 여성 조직, 학생 조직 등을 만들어 사회 전반으로 영향력을 확산시켰다. 특히 대학가에서는 파시스트 학생들이 반좌파 시위를 주도하며 큰 호응을 얻었다. 이는 파시즘이 단순히 폭력 조직이 아니라 포괄적인 사회 운동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결론
1919년부터 1922년까지 파시즘의 성장 과정은 이탈리아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무솔리니와 그의 추종자들은 전후 혼란과 사회적 공포를 교묘히 이용하여 변두리 정치 운동에서 전국적 세력으로 급성장했다. 특히 지방 정치 장악을 통한 점진적 권력 확산 전략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파시즘의 성공 요인은 폭력의 체계적 사용, 기존 보수 세력과의 연합, 그리고 중산층의 묵인이었다. 검은셔츠 스쿠아드리스티들의 폭력은 단순한 깡패 행위가 아니라 정치적 목적을 위한 조직적 테러였다. 이러한 폭력이 사회적으로 수용된 것은 이탈리아 민주주의 문화의 미성숙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파시즘이 혼자 성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자유주의 정치인들의 안일한 계산, 보수 세력의 협력, 중산층의 공포와 묵인이 모두 파시즘 성장의 토양이 됐다. 이들은 파시스트들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괴물을 키우고 있었다. 이제 그 괴물은 로마를 향해 행진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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