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이탈리아 역사 51.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롬바르디아 통치와 마리아 테레지아, 요제프 2세의 계몽전제주의 개혁

SSSCH 2025. 6. 9.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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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이탈리아 반도는 유럽 강대국들의 세력 다툼 속에서 새로운 정치적 변화를 맞았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1701~1714)과 폴란드 왕위계승전쟁(1733~1738)을 거치면서 북부 이탈리아의 패권이 스페인에서 오스트리아로 넘어간 것이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롬바르디아 지역을 차지하면서 이탈리아 북부는 계몽전제주의 개혁의 실험장이 되었고, 특히 마리아 테레지아와 요제프 2세 시대에는 근대적 행정 체계와 사회 개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이탈리아 진출과 롬바르디아 획득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이 롬바르디아를 손에 넣게 된 배경에는 유럽 전체를 뒤흔든 왕위계승전쟁들이 있었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끝나면서 체결된 우트레히트 조약(1713)에 따라 스페인령 네덜란드, 나폴리, 사르데냐, 밀라노가 오스트리아에 넘어갔다. 이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200년 넘게 이어온 이탈리아 영향력 경쟁에서 스페인 부르봉 가문을 제치고 우위를 점하게 된 결정적 순간이었다.

롬바르디아는 단순한 영토 확장의 의미를 넘어서 오스트리아에게 매우 중요한 전략적 가치를 지녔다. 알프스 산맥 남쪽의 비옥한 평야 지대였던 롬바르디아 평원은 농업 생산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유럽과 지중해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밀라노를 중심으로 한 이 지역은 베네치아와 제노바를 잇는 상업 루트의 핵심이었고,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본토를 연결하는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롤바르디아 통치를 위해 총독부를 설치했다. 밀라노에 자리 잡은 오스트리아 총독부는 황실 직속 기관으로 운영되었으며, 빈 본국의 정책을 현지에서 실행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초기에는 군사적 통제에 중점을 두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경제 발전과 행정 효율성 증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실용주의 개혁 정책

1740년 오스트리아 황제 카를 6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그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를 계승했다. 여성 황제로서의 정통성 확립과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1748)을 겪어야 했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제국의 효율적 통치와 경제력 강화를 위해 대대적인 개혁에 나섰다. 롬바르디아는 이러한 개혁 정책의 시험대 역할을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롬바르디아에서 추진한 가장 중요한 개혁은 토지 조사와 조세 제도 개편이었다. 1750년대부터 시작된 대규모 토지 측량 사업은 정확한 토지 대장을 작성하고 과세 기준을 명확히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전까지 롬바르디아의 조세 제도는 중세 봉건제의 잔재로 인해 매우 복잡하고 불공정했다. 귀족과 성직자들은 면세 특권을 누렸고, 농민들에게만 과중한 세금이 부과되는 상황이었다.

토지 조사 사업을 통해 약 26만 필지의 토지가 정밀하게 측량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지적도가 제작되었다. 이 지적도는 당시로서는 매우 정교한 수준이었으며, 유럽에서도 선진적인 토지 관리 시스템으로 평가받았다. 정확한 토지 정보를 바탕으로 조세 부담을 재분배하면서 귀족과 성직자들의 면세 특권도 상당 부분 축소되었다.

농업 개혁도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의 중요한 성과였다. 새로운 농업 기술 보급과 작물 품종 개량을 통해 농업 생산성을 높이려고 노력했다. 옥수수와 감자 같은 신대륙 작물의 재배가 장려되었고, 뽕나무 재배를 통한 양잠업 발전에도 힘썼다. 롬바르디아의 양잠업은 18세기 후반 유럽 최고 수준에 달했으며, 밀라노와 코모 지역의 견직물 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요제프 2세와 급진적 계몽전제주의 실험

1780년 마리아 테레지아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요제프 2세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롬바르디아에서는 더욱 급진적인 개혁이 시작되었다. 요제프 2세는 어머니의 실용주의적 접근법을 넘어서 계몽주의 철학에 바탕을 둔 근본적 사회 변혁을 추구했다. 그는 "인민의 행복"을 통치의 최고 목표로 삼았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전통적 특권과 관습에 도전하는 개혁을 단행했다.

요제프 2세의 가장 파격적인 개혁은 종교 정책이었다. 1781년 관용칙령을 발표하여 가톨릭 이외의 종교도 일정한 자유를 보장했으며, 1782년에는 수도원 해산령을 내려 "사회에 유용하지 않은" 수도원들을 강제로 폐쇄했다. 롬바르디아에서만 100개가 넘는 수도원이 해산되었고, 이들의 재산은 국가가 몰수하여 교육과 자선사업에 활용했다.

수도원 해산은 단순히 종교 정책의 변화를 넘어서 사회경제적으로도 큰 파장을 일으켰다. 수도원들이 소유했던 광대한 토지가 시장에 나오면서 새로운 지주층이 형성되었고, 농업 경영 방식도 변화했다. 또한 수도원이 담당했던 교육과 자선 기능을 국가가 직접 떠맡게 되면서 공교육 제도와 사회복지 시스템이 확립되기 시작했다.

사법 제도 개혁도 요제프 2세 시대의 중요한 성과였다. 1787년 새로운 형법전이 제정되면서 고문과 사형제가 대폭 축소되었고, 법 앞의 평등 원칙이 강화되었다. 이전까지 신분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던 법률이 모든 시민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도록 했으며, 재판 절차도 더욱 공정하고 투명하게 개선되었다.

경제 발전과 자유주의 정책

합스부르크 시대 롬바르디아에서는 경제 발전을 위한 다양한 자유주의 정책이 추진되었다. 길드 제도의 규제 완화, 자유무역 촉진, 새로운 산업 육성 등이 대표적인 정책이었다. 특히 밀라노는 18세기 후반 북부 이탈리아의 상업과 금융 중심지로 발전했으며, 견직물과 철강 산업이 크게 성장했다.

도로와 운하 같은 사회간접자본 확충에도 많은 투자가 이루어졌다. 밀라노와 베네치아를 잇는 도로가 개선되었고, 티치노 강과 아다 강을 연결하는 운하 시스템이 확장되었다. 이러한 교통망 개선은 상품 유통을 촉진하고 지역 간 경제 통합을 가속화했다.

농업 부문에서도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전통적인 삼포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윤작법이 도입되었고, 목초 재배를 통한 축산업 발전이 장려되었다. 치즈 생산업은 특히 큰 성장을 보였으며, 고르곤졸라와 탈레지오 같은 롬바르디아 전통 치즈들이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상품화되었다.

계몽주의 문화와 지식인 사회의 형성

합스부르크 시대 롬바르디아에서는 계몽주의 사상이 널리 확산되면서 새로운 지식인 문화가 형성되었다. 밀라노는 이탈리아 계몽주의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으며, 여러 저명한 사상가와 개혁가들이 활동했다. 체사레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1764)은 이 시대의 대표적인 성과로, 형법 개혁과 인권 사상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 카페』(Il Caffè)라는 계몽주의 잡지는 1764년부터 1766년까지 발행되면서 새로운 사상과 정보를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 피에트로 베르리와 알레산드로 베르리 형제가 주도한 이 잡지는 경제학, 철학, 문학, 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글을 실었으며, 계몽주의적 개혁을 지지하는 여론 형성에 기여했다.

교육 개혁도 중요한 변화 중 하나였다. 예수회가 해산된 후 그들이 운영하던 학교들을 국가가 인수하여 새로운 교육과정을 도입했다. 라틴어 중심의 고전 교육에서 벗어나 수학, 자연과학, 근대 언어 교육이 강화되었다. 또한 여성 교육에 대한 관심도 높아져서 여학교 설립이 늘어났다.

사회적 저항과 개혁의 한계

요제프 2세의 급진적 개혁은 상당한 사회적 저항에 부딪혔다. 특히 가톨릭 교회와 전통 귀족층은 개혁에 강력히 반발했다. 수도원 해산과 종교 관용 정책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귀족들은 특권 축소에 대해 불만을 터뜨렸다.

농민층의 반응은 복잡했다. 조세 부담 경감과 농노제 폐지 등의 개혁은 환영받았지만, 전통적인 종교 관습의 변화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특히 시골 지역에서는 수도원 폐쇄로 인해 교육과 자선 서비스가 중단되면서 생활에 직접적인 불편을 겪었다.

언어 정책도 논란의 대상이었다. 요제프 2세는 행정 효율성을 위해 독일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도록 했는데, 이는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는 현지 주민들의 반감을 샀다. 법정과 관공서에서 독일어를 사용해야 하는 상황은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가져왔고,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위기감을 조성했다.

프랑스 혁명과 개혁 정책의 변화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면서 유럽 전체의 정치 상황이 급변했다. 요제프 2세는 1790년 사망했고, 그의 후계자 레오폴드 2세와 프란츠 2세는 혁명의 확산을 우려하여 개혁 정책을 상당 부분 후퇴시켰다. 종교 정책에서는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 개선이 시도되었고, 귀족층의 특권도 일부 복원되었다.

하지만 이미 시작된 근대화의 흐름을 완전히 되돌릴 수는 없었다. 토지 조사와 조세 개혁의 성과는 유지되었고, 교육과 사법 제도의 개선도 계속되었다. 또한 경제 자유화 정책은 더욱 확대되어 롬바르디아의 상업과 공업 발전을 촉진했다.

프랑스 혁명군이 북부 이탈리아로 진출하면서 합스부르크의 롬바르디아 통치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1796년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이 시작되면서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은 급속히 약화되었고, 롬바르디아는 새로운 역사적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결론

18세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롬바르디아 통치는 이탈리아 근대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실용주의적 개혁과 요제프 2세의 계몽전제주의 실험은 중세적 질서를 해체하고 근대적 국가 체계를 구축하는 토대가 되었다. 토지 조사와 조세 개혁을 통한 행정 효율성 증대, 종교 개혁을 통한 사회 근대화, 경제 자유화를 통한 상업과 공업의 발전은 모두 19세기 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바탕이 되었다.

비록 급진적 개혁이 사회적 저항에 부딪히고 프랑스 혁명 이후 일부 후퇴하기도 했지만, 합스부르크 시대에 시작된 근대화의 흐름은 되돌릴 수 없는 역사적 변화였다. 계몽주의 사상의 확산, 새로운 지식인 문화의 형성, 시민사회의 성장은 모두 이후 이탈리아 사회 발전의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롬바르디아에서의 합스부르크 통치 경험은 단순한 외국 지배가 아니라 이탈리아가 근대 유럽 사회로 나아가는 중요한 과도기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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