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이탈리아 역사 49. 17세기 페스트와 스페인 쇠퇴, 사보이 공국의 부상 - 토리노 공국의 성장과 발도파 교도 탄압

SSSCH 2025. 6. 3.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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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는 이탈리아에게 시련과 변화의 세기였다. 1630년대와 1650년대에 연이어 발생한 대페스트는 인구의 3분의 1 이상을 앗아가며 사회 전반에 충격을 주었다. 동시에 30년 전쟁과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을 거치면서 스페인의 패권이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권력 공백 속에서 알프스 서쪽의 작은 사보이 공국이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토리노를 수도로 한 사보이 가문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서 균형 외교를 펼치며 세력을 확장했지만, 동시에 영토 내 개신교도인 발도파에 대한 혹독한 탄압을 자행하기도 했다.

1630년 대페스트의 참상과 사회적 충격

1630년 북부 이탈리아를 강타한 페스트는 '만초니의 페스트'로도 불린다. 알레산드로 만초니가 소설 '약혼자들'에서 생생하게 묘사한 이 전염병은 독일에서 시작되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확산되었다. 30년 전쟁으로 인한 군대의 이동과 난민의 증가가 전염병 확산을 가속화했다.

밀라노는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당시 13만 명이던 인구 중 8만 명이 목숨을 잃어 인구의 60% 이상이 사라졌다. 베르가모, 브레샤, 크레모나 등 롬바르디아의 다른 도시들도 비슷한 피해를 입었다. 베네치아도 예외가 아니어서 15만 명 중 5만 명이 죽었고, 총독 니콜로 콘타리니도 페스트로 사망했다.

페스트는 단순한 인구 감소를 넘어서 사회 구조 전체를 뒤흔들었다. 수공업자들이 대거 사망하면서 밀라노의 전통적인 비단 공업과 무기 제조업이 큰 타격을 입었다. 농촌에서는 소작농들이 죽어나가면서 경작지가 황폐해졌고, 이는 식량 부족으로 이어졌다.

사회 질서도 크게 흔들렸다. 페스트가 절정에 달했을 때 밀라노에서는 하루에 3,000명씩 죽어나갔는데, 시체를 처리할 인력도 부족했다. 시 당국은 죄수들을 풀어 시체 수거 작업을 시켰지만 역부족이었다. 거리마다 시체가 쌓여있고 악취가 진동했으며, 법과 질서가 사실상 마비되었다.

종교적으로도 큰 변화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페스트를 하나님의 진노로 해석했고, 참회 운동이 확산되었다. 반면 일부에서는 유대인이나 외국인을 희생양으로 삼는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밀라노에서는 '독 바르는 자들(untori)'에 대한 공포가 퍼져 무고한 사람들이 린치를 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경제 구조의 변화와 농업 위기

페스트로 인한 인구 감소는 이탈리아 경제 구조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다. 노동력 부족으로 임금이 상승했지만, 동시에 내수 시장이 크게 줄어들면서 제조업이 타격을 입었다. 특히 북부 이탈리아의 전통적 우위였던 고급 수공업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

농업 부문에서는 집약적 농업에서 조방적 농업으로의 전환이 일어났다. 인력 부족으로 포도밭이나 뽕나무 밭 같은 노동집약적 작물 재배가 어려워졌고, 대신 목축업이 확산되었다. 이는 특히 롬바르디아 평원에서 두드러진 현상이었다.

토지 소유 구조도 변화했다. 소농들이 대거 사망하면서 그들의 토지가 대지주들에게 집중되었다. 이는 라티푼디움 체제를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뚜렷했다.

도시의 상업 활동도 큰 변화를 겪었다. 베네치아는 인구 감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빨리 회복했지만, 제노바는 더 오랜 침체를 겪었다. 밀라노는 스페인의 지원으로 어느 정도 재건되었지만, 이전의 경제적 활력을 되찾는 데는 수십 년이 걸렸다.

스페인 패권의 서서히 쇠퇴

17세기 후반부터 스페인의 쇠퇴 징후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30년 전쟁(1618-1648)의 막대한 비용과 네덜란드 독립 인정, 그리고 연이은 프랑스와의 전쟁은 스페인 재정을 파탄으로 이끌었다. 신대륙에서 오는 은의 양도 줄어들면서 스페인의 경제적 기반이 흔들렸다.

이탈리아에서도 스페인의 영향력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밀라노와 나폴리에 파견되는 총독들의 권한이 축소되었고, 현지 귀족들의 자율성이 다소 확대되었다. 하지만 이는 긍정적 변화라기보다는 스페인이 더 이상 강력한 통제를 할 여력이 없어졌음을 의미했다.

카를로스 2세(재위 1665-1700)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근친혼으로 인한 여러 질병에 시달렸고,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이로 인해 스페인 왕위계승전쟁(1701-1714)이 발발했고, 이탈리아는 다시 한 번 유럽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손자인 필리프 5세를 스페인 왕으로 옹립하려 했고, 오스트리아의 레오폴드 1세는 차남 카를 대공의 왕위를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이탈리아 각 지역은 서로 다른 진영에 가담하게 되었다.

사보이 공국의 전략적 위치와 성장

알프스 서쪽에 위치한 사보이 공국은 17세기 들어 급속히 부상했다. 사보이 가문은 11세기부터 이 지역을 다스려왔지만, 이때까지는 비교적 작은 세력에 불과했다. 하지만 비토리오 아메데오 1세(재위 1630-1637)와 그의 후계자들은 교묘한 외교술로 영토를 확장해나갔다.

사보이 공국의 가장 큰 장점은 지정학적 위치였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잇는 알프스 고개를 통제하고 있어 전략적 가치가 매우 높았다. 몽세니 고개와 몽블랑 고개를 통해 양쪽 모두와 교역할 수 있었고, 필요에 따라 어느 쪽과도 동맹을 맺을 수 있었다.

토리노는 사보이 공국의 수도로서 17세기에 크게 발전했다. 엠마누엘레 필리베르토 공작(재위 1553-1580) 시대에 계획된 도시 재개발이 본격화되어, 바로크 양식의 궁전과 교회들이 건설되었다. 특히 과리노 과리니가 설계한 토리노 대성당과 왕궁은 사보이 가문의 권위를 상징하는 건축물이었다.

사보이 공국은 작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효율적인 행정 체계를 갖추었다.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도입하여 영토 내 다양한 지역들을 통합 관리했고, 상비군을 유지하여 군사력을 강화했다. 이는 당시 이탈리아의 다른 소국들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의 균형 외교

사보이 공국이 진정한 강국으로 부상한 것은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재위 1675-1730) 시대였다. 그는 '이탈리아의 여우'라고 불릴 정도로 교묘한 외교술을 구사했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에서는 처음에 프랑스 편에 섰다가 중간에 오스트리아 편으로 돌아서는 등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했다.

1703년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오스트리아, 영국, 네덜란드와 동맹을 체결했다. 이는 사보이 공국이 유럽 열강의 일원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 대가로 그는 스페인령 이탈리아의 일부 영토 할양을 약속받았다.

1706년 토리노 공성전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친 것은 사보이 공국의 위상을 크게 높였다. 유게니오 디 사보이아 공자(오스트리아군 지휘관)와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가 협력하여 거둔 이 승리는 이탈리아 전쟁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1713년 위트레히트 조약으로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시칠리아 왕 칭호를 받았다. 비록 1720년 사르데냐와 교환해야 했지만, 이로써 사보이 가문은 정식 왕가가 되었다.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탄생은 훗날 이탈리아 통일의 기반이 되었다.

발도파 교도에 대한 종교적 탄압

사보이 공국의 성장 과정에서 어두운 면도 있었다. 바로 발도파(Valdesi) 교도에 대한 잔혹한 탄압이었다. 발도파는 12세기 리옹의 상인 발도에서 시작된 개신교 계열의 종교 운동으로, 알프스 서쪽 계곡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발도파 교도들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교황의 세속적 권력을 거부했다. 이들은 프로방스어를 사용했고, 가톨릭과는 다른 독특한 전통을 유지했다. 피네롤라, 루체르나, 안그로냐 등의 계곡에서 농업과 목축에 종사하며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사보이 공작들은 가톨릭 군주로서 발도파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특히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재위 1580-1630) 시대부터 탄압이 본격화되었다. 발도파 지역에 가톨릭 선교사들을 파견하고, 개종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가혹한 처벌을 가했다.

1655년 '피에몬테의 부활절(Pasque Piemontesi)'이라 불리는 대학살이 벌어졌다. 사보이군이 발도파 마을들을 습격하여 수천 명을 살해했고, 많은 사람들이 스위스로 피난해야 했다. 이 사건은 유럽 전체에 충격을 주었고,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까지 나서서 항의했다.

경제 정책과 중상주의적 개혁

사보이 공국은 작은 영토를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중상주의 정책을 적극 도입했다.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국내 산업 보호를 위해 관세 장벽을 높이고, 수출 진흥을 위한 각종 지원책을 마련했다.

특히 비단 공업 육성에 힘썼다. 프랑스의 기술자들을 영입하여 토리노와 주변 지역에 비단 공장을 설립했고, 뽕나무 재배를 장려했다. 이는 밀라노의 전통적 비단 공업에 도전하는 의미였다.

금융 정책에서도 혁신을 보였다. 1563년 설립된 산 파올로 은행을 국가가 직접 관리하여 공채 발행과 통화 정책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선진적인 금융 체계였다.

교통망 정비에도 투자했다. 알프스 고개 도로를 정비하여 프랑스와의 교역을 활성화했고, 포강 유역의 수로를 개선하여 롬바르디아와의 연결성을 높였다. 이러한 인프라 투자는 사보이 공국의 경제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문화와 예술의 발전

17세기 사보이 공국에서는 바로크 문화가 크게 꽃피었다. 과리노 과리니(1624-1683)는 이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가로, 토리노 왕궁의 성골 예배당과 산 로렌초 성당을 설계했다. 그의 건축은 곡선과 기하학적 형태의 조화로 독특한 바로크 양식을 창조했다.

필리포 유바라(1678-1736)는 과리니의 뒤를 이은 건축가로, 수페르가 대성당과 스투피니지 궁전을 설계했다. 이들 건물은 사보이 가문의 권위를 상징하는 동시에 토리노를 바로크 도시로 탈바꿈시켰다.

회화에서는 세바스티아노 리치와 코라도 지아퀸토 같은 화가들이 활동했다. 이들은 베네치아와 나폴리 화파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사보이 궁정만의 독특한 양식을 발전시켰다. 특히 왕실 초상화와 역사화 분야에서 뛰어난 작품들을 남겼다.

음악 분야에서도 발전이 있었다. 레지오 극장(현재의 토리노 왕립 오페라 극장)이 건설되어 이탈리아 오페라가 정기적으로 공연되었다. 사보이 궁정은 음악가들을 후원하여 새로운 작품 창작을 장려했다.

교육과 학문의 진흥

사보이 공국은 교육 제도 개혁에도 힘썼다. 1404년 설립된 토리노 대학교를 확장·개편하여 법학, 의학, 신학뿐만 아니라 자연과학과 공학 분야도 강화했다. 이는 근대적 관료제 운영에 필요한 인재 양성을 위한 조치였다.

특히 군사 공학과 토목 공학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요새 건설과 도로 건설에 필요한 기술자들을 체계적으로 양성했고, 이는 사보이 공국의 군사력 강화와 경제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과학 아카데미도 설립하여 학문 연구를 장려했다. 특히 수학과 천문학 분야에서 유럽의 다른 지역과 활발한 교류를 펼쳤다. 이는 사보이 공국이 단순한 군사 강국을 넘어서 문화 강국으로 발전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결론

17세기는 이탈리아 역사에서 전환기였다. 페스트의 참상과 스페인 패권의 쇠퇴 속에서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사보이 공국의 부상은 이러한 변화의 상징이었다. 비록 작은 영토와 인구를 가진 공국이었지만, 교묘한 외교술과 효율적인 내정 개혁을 통해 유럽 정치의 한 축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발도파 탄압에서 볼 수 있듯이 종교적 관용은 여전히 부족했고, 이는 당시의 한계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사보이 공국의 성장은 훗날 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기반이 되었고, 토리노는 근대 이탈리아의 첫 번째 수도가 되는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다. 17세기의 혼란과 변화 속에서 싹튼 이러한 새로운 가능성들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를 거쳐 19세기 민족주의 운동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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