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이탈리아는 계몽주의 사상이 전 유럽을 휩쓸던 시대적 조류 속에서 독특한 지적 각성을 경험했다. 특히 밀라노와 나폴리를 중심으로 형성된 계몽주의 지식인 집단은 단순히 외국 사상을 수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탈리아의 현실에 맞는 개혁 이론을 발전시켰다. 체사레 베카리아의 형법 개혁론과 잠바티스타 비코의 역사철학은 당시 유럽 지성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이들의 사상은 실제 정치 개혁과 사회 변화로 이어져 이탈리아 근대화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했다. 계몽주의 이념이 구체적인 제도 개혁으로 실현되는 과정에서 이탈리아는 유럽 계몽주의 운동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했다.
밀라노 계몽주의 집단의 형성과 『일 카페』
밀라노는 18세기 중반 이탈리아 계몽주의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였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통치 하에서 비교적 관용적인 정치 환경이 조성되었고, 상업과 공업의 발달로 새로운 시민 계층이 성장하면서 지적 활동을 위한 물질적 기반도 마련되었다. 여기에 유럽 각국에서 유입되는 새로운 사상들이 더해져 활발한 지적 교류의 장이 형성되었다.
밀라노 계몽주의 운동의 핵심은 베르리 형제를 중심으로 한 지식인 그룹이었다. 피에트로 베르리와 알레산드로 베르리는 귀족 출신이었지만 전통적인 특권 의식을 버리고 계몽주의 개혁에 헌신했다. 이들 주변에는 체사레 베카리아, 파올로 프리시, 조반니 리나, 카를로 세바스티아노 프라바 같은 젊은 지식인들이 모여들었다.
1764년부터 1766년까지 발행된 『일 카페』(Il Caffè)는 이들의 사상적 결집체였다. 잡지의 제목부터가 상징적이었다. 카페는 18세기 유럽에서 새로운 사회적 공간으로 부상하고 있었는데,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모여서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일 카페』는 바로 이런 자유로운 토론 공간을 지면으로 옮겨놓은 것이었다.
잡지에 실린 글들은 경제학, 철학, 문학, 과학, 정치학 등 다양한 분야를 다뤘다. 특히 당시 유럽에서 주목받던 경제 자유주의와 공리주의 철학을 이탈리아 현실에 적용하는 방안들이 활발히 논의되었다. 아담 스미스와 데이비드 흄의 사상이 소개되었고, 프랑스 백과전서파의 이념도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일 카페』의 가장 큰 특징은 추상적인 철학 논의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사회 개혁 방안을 제시했다는 점이었다. 조세 제도 개혁, 형법 개혁, 교육 제도 개선, 상업 발전 촉진 등 당시 롬바르디아가 직면한 현실적 문제들에 대한 해법을 제시했다. 이는 계몽주의 사상이 단순한 지적 유희가 아니라 사회 변화를 위한 실천적 도구라는 인식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체사레 베카리아와 『범죄와 형벌』의 혁명적 사상
체사레 베카리아(1738-1794)는 밀라노 계몽주의 집단에서 배출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였다. 그의 대표작 『범죄와 형벌』(Dei delitti e delle pene, 1764)은 근대 형법학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유럽 전역의 형법 개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책은 출간 즉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등으로 번역되어 계몽주의 시대의 필독서가 되었다.
베카리아의 형법 사상은 몇 가지 혁명적인 원칙에 기초했다. 첫째는 법 앞의 평등이었다. 전통적으로 형법은 신분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었지만, 베카리아는 모든 시민이 동일한 법적 기준에 따라 재판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귀족이든 평민이든 같은 죄를 지으면 같은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죄형법정주의 원칙이었다. 범죄와 형벌은 미리 법률로 명확히 정해져야 하며, 법관의 자의적 판단으로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이는 당시 관습법과 판례법에 의존하던 사법 체계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었다. 베카리아는 법률이 명확하고 예측 가능해야 시민들이 자신의 행동을 조절할 수 있고, 진정한 법치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셋째는 형벌의 목적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었다. 전통적으로 형벌은 응보와 위하의 수단으로 여겨졌지만, 베카리아는 형벌의 주목적이 범죄 예방과 사회 복귀에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형벌은 범죄를 억제할 수 있을 정도로만 가해져야 하며, 불필요하게 잔혹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가장 혁명적인 주장은 사형제 폐지론이었다. 베카리아는 국가가 시민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는 없다고 보았으며, 사형보다는 종신 강제노역이 더 효과적인 억제 효과를 가진다고 주장했다. 또한 고문의 사용도 강력히 반대했다. 고문으로 얻은 자백은 진실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야만적 행위라고 비판했다.
베카리아의 사상은 당시 이탈리아의 형법 현실과 크게 대비되었다. 18세기 이탈리아 각 지역의 형법은 여전히 중세적 관습에 의존하고 있었고, 고문과 공개처형이 일상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마녀재판은 사라졌지만 종교적 이단에 대한 가혹한 처벌은 계속되었고, 재산 범죄에도 사형이 적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베카리아 사상의 유럽적 확산과 개혁 실천
『범죄와 형벌』은 출간 직후부터 유럽 각국 지식인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볼테르는 이 책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디드로와 달랑베르 같은 백과전서파 철학자들도 베카리아의 사상을 적극 지지했다. 영국에서는 제러미 벤담이 베카리아의 영향을 받아 공리주의 형법학을 발전시켰고, 미국의 건국 아버지들도 베카리아의 사상을 헌법 제정에 반영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베카리아의 사상이 실제 법제 개혁으로 이어졌다는 점이었다. 토스카나 대공 레오폴도는 1786년 세계 최초로 사형제를 폐지했으며, 이는 베카리아의 직접적인 영향이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과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도 베카리아의 사상을 받아들여 형법 개혁을 추진했다.
오스트리아 황제 요제프 2세는 베카리아를 밀라노 대학 교수로 임명하여 그의 개혁 이론을 실천할 기회를 제공했다. 베카리아는 1768년부터 정치경제학 강의를 시작했으며, 이후 롬바르디아의 행정 개혁에도 직접 참여했다. 그는 토지 조사 사업과 조세 개혁에 관여했으며, 형사사법 제도 개선에도 기여했다.
베카리아의 영향은 이탈리아 내에서도 점진적으로 확산되었다. 나폴리 왕국에서는 가에타노 필랑지에리가 베카리아의 사상을 발전시켜 『입법의 학문』(La scienza della legislazione)을 저술했다. 이 책은 베카리아보다 더 체계적이고 포괄적인 법학 이론을 제시했으며, 형법뿐만 아니라 민법, 상법, 헌법 등 전체 법 체계의 개혁 방안을 다뤘다.
잠바티스타 비코의 역사철학과 새로운 인문학
나폴리의 잠바티스타 비코(1668-1744)는 베카리아보다 한 세대 앞선 사상가였지만, 그의 혁신적인 역사철학은 18세기 후반에 와서야 제대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비코의 주저 『새로운 학문』(Scienza Nuova, 1725)은 인간 사회의 역사적 발전 법칙을 탐구한 선구적 작품으로, 근대 사회과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비코는 인간 사회가 일정한 주기를 따라 발전한다는 독창적인 이론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모든 민족은 신화적 시대, 영웅적 시대, 인간적 시대의 세 단계를 거쳐 발전하며, 각 단계마다 고유한 언어, 법률, 정치 제도, 종교를 가진다고 보았다. 이러한 순환론적 역사관은 당시 지배적이던 직선적 진보관과는 다른 관점을 제시했다.
비코의 가장 혁신적인 기여는 역사 연구 방법론에 있었다. 그는 역사를 단순히 과거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발전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언어, 신화, 법률, 예술 등은 모두 특정 시대 인간들의 정신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므로, 이들을 분석하면 과거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을 복원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방법론은 18세기 계몽주의의 주류적 사고와는 상당히 달랐다. 계몽주의자들이 이성의 보편성을 강조하고 과거를 무지와 미신의 시대로 폄하하는 경향이 있었다면, 비코는 각 시대마다 나름의 합리성과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고대인들의 신화적 사고도 그들의 상황에서는 충분히 합리적이었으며, 현대인이 이를 단순히 미신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비코의 사상은 언어학과 인류학 발전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언어가 단순한 의사소통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사고 방식을 형성하는 요소라고 보았으며, 각 민족의 언어에는 그들의 역사적 경험과 정신적 특성이 응축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19세기 역사언어학과 비교언어학의 선구적 통찰이었다.
나폴리 계몽주의와 경제 개혁론
나폴리에서는 비코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동시에 밀라노와는 다른 특색을 가진 계몽주의 운동이 전개되었다. 나폴리 계몽주의자들은 특히 경제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남부 이탈리아의 경제적 후진성과 사회적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는 현실적 필요 때문이었다.
안토니오 제노베제(1713-1769)는 나폴리 계몽주의의 대표적 인물로, 유럽 최초로 정치경제학 교수직을 맡았다. 그는 아담 스미스보다 앞서 자유무역과 경제 자유주의의 필요성을 주장했으며, 특히 남부 이탈리아의 농업 개혁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제노베제는 봉건적 토지 소유 제도가 농업 발전을 저해하는 주요 원인이라고 보고, 소농 중심의 자유로운 토지 시장 형성을 주장했다.
페르디난도 갈리아니(1728-1787)는 화폐와 가치 이론 분야에서 독창적인 기여를 했다. 그의 『화폐론』(Della moneta, 1751)은 화폐의 본질과 기능에 대한 근대적 분석을 제시했으며, 가치의 주관적 성격을 강조한 점에서 후일 한계효용학파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갈리아니는 또한 곡물 무역 자유화 문제를 둘러싸고 프랑스 중농주의자들과 논쟁을 벌여 유명해졌다.
가에타노 필랑지에리(1753-1788)는 베카리아의 법학 사상을 더욱 발전시켜 포괄적인 사회 개혁론을 제시했다. 그의 『입법의 학문』은 법률, 교육, 경제, 종교 등 사회의 모든 영역에 걸친 개혁 방안을 다뤘으며, 특히 교육을 통한 사회 개선을 강조했다. 필랑지에리는 모든 시민이 교육받을 권리를 가지며, 국가가 이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계몽주의 사상의 실제 개혁 적용
이탈리아 계몽주의자들의 사상은 단순한 이론에 그치지 않고 실제 정치 개혁으로 이어졌다. 롬바르디아에서는 마리아 테레지아와 요제프 2세가 계몽주의적 개혁을 추진할 때 현지 지식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베카리아는 직접 행정관으로 일하면서 조세 개혁과 사법 개혁에 참여했고, 다른 『일 카페』 동인들도 각자의 전문 분야에서 개혁 정책 수립에 기여했다.
나폴리에서도 탄우치 후작이 주도한 개혁 정책에 계몽주의 지식인들이 깊이 관여했다. 제노베제의 제자들은 농업 개혁과 상업 진흥 정책에 참여했고, 필랑지에리의 법학 이론은 사법 제도 개선에 반영되었다. 특히 교육 개혁 분야에서는 계몽주의자들의 영향이 두드러졌다.
종교 정책에서도 계몽주의적 개혁이 추진되었다. 예수회 해산(1773) 이후 그들이 담당하던 교육 기능을 국가가 인수하면서, 계몽주의적 교육과정이 도입되었다. 라틴어와 신학 중심의 전통적 교육에서 벗어나 수학, 자연과학, 근대 언어, 경제학 등이 중시되었다.
출판과 언론 분야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검열 제도가 완화되면서 더 많은 계몽주의 서적들이 번역, 출간되었고, 새로운 잡지와 신문들이 창간되어 계몽주의 사상을 대중에게 전파했다. 밀라노의 『일 카페』 이후에도 『베르바 프리베 피에몬테시』, 『오세르바토레 베네토』 같은 계몽주의 잡지들이 각 지역에서 발행되었다.
계몽주의의 한계와 사회적 저항
이탈리아 계몽주의 운동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동시에 여러 한계와 저항에 부딪혔다. 가장 큰 한계는 계몽주의가 주로 도시의 지식인 계층에 한정되었다는 점이었다. 농촌 지역의 농민들과 도시의 하층민들에게는 계몽주의 사상이 거의 전파되지 않았고, 이들의 생활에 직접적인 변화를 가져오지도 못했다.
가톨릭 교회는 계몽주의에 대한 강력한 저항 세력이었다. 특히 무신론적 경향을 가진 프랑스 백과전서파의 사상이나 종교적 관용을 주장하는 이론들은 교회의 강한 반발을 샀다. 교회는 계몽주의 서적들을 금서로 지정했고, 설교를 통해 계몽주의를 비판했다.
전통적 귀족 계층도 계몽주의 개혁에 반발했다. 특히 봉건적 특권의 폐지나 조세 부담의 평등화 같은 개혁은 기득권층의 이익에 직접적으로 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일부 귀족들은 계몽주의 사상을 수용하기도 했지만, 대다수는 전통적 질서의 유지를 원했다.
언어 문제도 계몽주의 확산의 장애 요인이었다. 이탈리아어는 아직 표준화되지 않았고, 각 지역마다 방언이 달랐다. 또한 문맹률이 높아서 글로 된 계몽주의 사상을 접할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이는 계몽주의가 엘리트 문화에 머물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였다.
결론
18세기 이탈리아 계몽주의는 유럽 지성사에서 독특하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베카리아의 형법 사상과 비코의 역사철학은 당시 유럽 사상계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으며, 후대 인문사회과학 발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또한 이탈리아 계몽주의자들은 추상적 이론에 그치지 않고 현실적 개혁에 적극 참여하여 사상과 실천의 결합을 보여주었다.
밀라노와 나폴리를 중심으로 한 계몽주의 운동은 이탈리아 근대화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했다. 법치주의, 경제 자유주의, 교육 개혁, 종교적 관용 등 계몽주의가 제시한 이념들은 19세기 이탈리아 통일 운동과 근대 국가 건설 과정에서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비록 당시에는 사회 전체의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계몽주의 사상은 이탈리아 지식인들에게 근대적 사고방식을 심어주었고, 이는 후일 리소르지멘토 운동의 정신적 자양분이 되었다.
특히 계몽주의가 강조한 합리주의와 개혁 정신은 이탈리아인들에게 자신들의 후진적 현실을 극복하고 근대적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이러한 지적 각성 없이는 19세기의 민족주의 운동도, 국가 통일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8세기 계몽주의는 이탈리아 근대사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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