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중반, 이탈리아 북부는 새로운 지배자를 맞이했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과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을 거치면서 롬바르디아는 스페인 합스부르크에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로 주인이 바뀌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재위 1740-1780)와 그녀의 아들 요제프 2세(재위 1780-1790)는 계몽절대주의의 기치 아래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이들의 개혁은 단순한 행정 효율성 증대를 넘어서 사회 구조 전반에 걸친 근대화를 추진했고, 롭바르디아는 18세기 유럽에서 가장 진보적인 지역 중 하나로 변모했다. 이러한 변화는 훗날 이탈리아 근대화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스페인에서 오스트리아로의 지배권 이전
1701년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발발하면서 이탈리아는 다시 한 번 유럽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초기에는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군이 우세했지만, 1706년 토리노 공성전과 1709년 말플라케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영국-네덜란드 동맹군이 승리를 거두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1713년 위트레히트 조약과 1714년 라시타트 조약으로 이탈리아의 정치 지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밀라노 공국은 오스트리아에 귀속되었고, 나폴리와 사르데냐는 사보이 공국에, 시칠리아는 일시적으로 사보이에 주어졌다가 1720년 오스트리아와 교환되어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이로써 300년 가까이 지속된 스페인의 이탈리아 지배가 대폭 축소되었다.
오스트리아는 롬바르디아 통치를 위해 새로운 행정 체계를 도입했다. 스페인 시대의 총독 제도를 폐지하고 대신 '롬바르디아 정부(Governo della Lombardia)'를 설치했다. 이는 빈의 중앙 정부에 직속되는 기구로, 스페인 시대보다 훨씬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통치를 목표로 했다.
초기에는 오스트리아의 통치에 대한 저항도 있었다. 특히 밀라노의 전통 귀족들은 새로운 질서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가 지역 엘리트들을 행정에 적극 참여시키고 경제 발전을 도모하면서 점차 협력 체제가 구축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행정 개혁과 근대화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 제국 전체의 근대화를 추진했는데, 롬바르디아는 이러한 개혁의 실험장 역할을 했다. 그녀의 개혁은 크게 행정 개혁, 사법 개혁, 경제 개혁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행정 개혁의 핵심은 중앙집권화와 관료제의 근대화였다. 전통적인 봉건적 특권을 폐지하고 능력 위주의 관료 선발 제도를 도입했다. 밀라노에는 '최고평의회(Supremo Consiglio di Milano)'가 설치되어 롬바르디아 전체의 행정을 총괄했고, 그 산하에 재정청, 사법청, 군정청 등이 체계적으로 조직되었다.
교육 개혁도 중요한 부분이었다. 1773년 예수회가 해산되면서 그들이 운영하던 학교들을 국가가 접수했고, 새로운 교육과정을 도입했다. 라틴어 위주의 고전 교육에서 벗어나 실용적인 지식과 자연과학 교육을 강화했다. 파비아 대학교는 이러한 교육 개혁의 모델이 되었다.
조세 제도 개혁은 특히 혁신적이었다. 1718년부터 시작된 토지 측량 사업(Catasto)은 유럽에서 가장 정확하고 체계적인 토지 조사였다. 모든 토지를 정밀하게 측량하고 소유자를 확인하여 공정한 과세 기반을 마련했다. 이는 전통적인 면세 특권을 대폭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요제프 2세의 급진적 개혁 정책
요제프 2세는 어머니보다 훨씬 급진적인 개혁가였다. 그의 재위 기간은 비록 10년에 불과했지만, 롬바르디아 사회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그는 계몽주의 철학에 깊이 심취해 있었고, 이를 정책에 적극 반영했다.
종교 정책에서 요제프 2세는 혁명적 변화를 추진했다. 1781년 관용령(Editto di Tolleranza)을 발표하여 개신교도와 동방정교도에게 신앙의 자유를 보장했다. 이는 가톨릭이 압도적 다수인 롬바르디아에서는 큰 충격이었지만, 종교적 소수자들에게는 해방과 같았다.
수도원 해산 정책도 단행했다. 관상 수도원들을 대거 폐쇄하고 그 재산을 국가가 몰수하여 교육과 사회 복지에 사용했다. 이로 인해 롬바르디아에서만 200개 이상의 수도원이 사라졌지만, 그 대신 병원과 학교가 대폭 늘어났다.
농노제 폐지도 요제프 2세의 중요한 개혁 중 하나였다. 1781년 농노해방령을 발표하여 농민들의 인신적 예속을 금지했다. 비록 토지 소유권까지는 해결하지 못했지만, 이는 롬바르디아 농촌 사회의 근대화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경제 발전과 상공업 진흥
오스트리아 통치 하에서 롬바르디아의 경제는 크게 발전했다. 자유무역 정책의 도입으로 상업이 활성화되었고, 길드 제도의 완화로 수공업이 발달했다. 특히 밀라노는 이탈리아 북부의 상업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되찾았다.
비단 공업이 크게 부흥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기술 혁신을 장려하고 새로운 기계를 도입하여 생산성을 높였다. 밀라노의 비단은 다시 유럽 전역에서 명성을 얻었고, 런던과 파리의 고급 시장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농업 개혁도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새로운 작물의 도입과 농법 개선으로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었다. 특히 옥수수와 감자 재배가 확산되면서 식량 안보가 크게 개선되었다. 벼농사도 기술 개선으로 수확량이 늘어났다.
교통망 정비에도 투자했다. 밀라노와 베네치아를 잇는 도로를 정비하고, 알프스 고개 도로를 개선하여 오스트리아 본토와의 연결성을 높였다. 나빌리오 운하 시스템도 확장하여 수상 교통의 효율성을 높였다.
밀라노 지식인들과 계몽주의 확산
18세기 밀라노는 이탈리아 계몽주의의 중심지가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개방적 정책과 경제 발전이 맞물리면서 새로운 지식인 계층이 등장했고, 이들은 유럽의 계몽사상을 적극 수용했다.
체사레 베카리아(1738-1794)는 이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의 저서 '범죄와 형벌에 대하여(Dei delitti e delle pene, 1764)'는 형법학의 고전이 되었고, 사형제 폐지와 인도적 형벌을 주장하여 유럽 전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 요제프 2세도 베카리아의 이론에 깊은 영향을 받아 형법 개혁을 단행했다.
피에트로 베리(1728-1797)는 밀라노의 대표적인 계몽사상가로, '일 까페(Il Caffè)'라는 잡지를 발행하여 새로운 사상을 전파했다. 이 잡지는 1764년부터 1766년까지 발행되었는데, 경제학, 정치학, 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진보적 논문들을 실었다.
알폰소 리타(1737-1803)와 파올로 프리시(1728-1784) 등도 이 지식인 그룹에 속했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모여 토론하고 글을 썼는데, 이러한 살롱 문화는 밀라노를 유럽의 지적 중심지 중 하나로 만들었다.
브레라 천문대가 1764년 설립된 것도 이 시기의 특징이었다. 예수회 출신 천문학자들이 최신 과학 연구를 수행했고, 이는 롬바르디아의 과학 수준을 크게 향상시켰다.
종교 정책과 교회 개혁
오스트리아의 종교 정책은 계몽절대주의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교회의 세속적 권력을 제한하는 것이 기본 방향이었다. 이는 전통적으로 가톨릭이 지배적이었던 롬바르디아에서 큰 변화를 의미했다.
교회 재산에 대한 과세는 중요한 쟁점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부터 교회 토지에도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했고, 요제프 2세는 이를 더욱 강화했다. 이는 교회의 반발을 샀지만, 국가 재정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
성직자 교육 개혁도 추진되었다. 로마 대신 파비아 대학교에 신학부를 설치하여 성직자들을 교육시켰고, 교회법보다는 국가법을 우선시하는 교육을 실시했다. 이는 갈리아주의적 성격을 띤 개혁이었다.
종교 의식의 간소화도 요구되었다. 과도한 성상 숭배를 억제하고 미신적 관습을 금지했다. 또한 성지 순례보다는 실용적인 신심 행위를 장려했다. 이러한 정책은 민중들의 종교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사회 구조의 변화와 신분제 개혁
오스트리아 통치 하에서 롬바르디아의 사회 구조도 크게 변화했다. 전통적인 봉건적 신분제가 약화되고 능력 위주의 사회 이동이 가능해졌다. 이는 근대 시민사회 형성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귀족제도의 개혁이 핵심이었다. 출생에 의한 특권보다는 공로에 의한 지위 상승을 장려했다. 관료직과 군관직을 능력 위주로 선발했고, 이는 중산층의 사회 진출 기회를 크게 확대했다.
상인 계층의 지위도 향상되었다. 상업과 제조업을 국가 발전의 핵심으로 인식하고 상인들에게 사회적 존경을 부여했다. 밀라노의 상인들은 귀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사회적 지위를 얻게 되었다.
여성의 지위 향상도 주목할 만했다. 교육 기회가 확대되었고, 재산권도 어느 정도 보장받았다. 물론 완전한 남녀평등은 아니었지만, 전통 사회에 비해서는 큰 진전이었다.
도시 계획과 건축의 변화
18세기 밀라노는 대대적인 도시 개조를 겪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근대적 도시 계획을 도입하여 밀라노를 유럽의 모범 도시로 만들려 했다. 이는 단순한 미관 개선을 넘어서 공중보건과 행정 효율성을 고려한 종합적 접근이었다.
라 스칼라 오페라 극장이 1778년 건설된 것은 이 시기의 대표적 성과였다. 주세페 피에르마리니가 설계한 이 건물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걸작으로, 밀라노를 유럽 음악의 중심지로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브레라 궁전의 확장도 중요한 사업이었다. 이곳에는 미술 아카데미와 천문대, 도서관이 들어섰고, 밀라노의 문화적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왕궁(Palazzo Reale)도 개조되어 오스트리아 총독의 거주지로 사용되었다.
공원과 산책로도 조성되었다. 공원은 시민들의 여가 공간이자 공중보건 개선의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도시 계획 개념이었다.
교육 제도의 혁신
오스트리아 정부는 교육을 국가 발전의 핵심 요소로 인식하고 대대적인 교육 개혁을 단행했다. 1774년 발표된 '일반학교규정(Regolamento generale delle scuole)'은 롬바르디아 교육 제도의 기반을 마련했다.
초등교육의 의무화가 중요한 변화였다. 모든 아이들이 읽기, 쓰기, 산수를 배워야 한다고 규정했고, 이를 위해 각 지역에 초등학교를 설립했다. 물론 완전한 실현은 어려웠지만, 문맹률 감소에는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중등교육에서는 실용 교육을 강조했다. 라틴어와 그리스어 중심의 전통적 교육과정에 자연과학, 수학, 현대 언어를 추가했다. 이는 상업과 제조업 발전에 필요한 인재 양성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고등교육에서는 파비아 대학교가 모델이 되었다. 1771년 대대적인 개혁을 통해 유럽 최고 수준의 대학으로 만들었다. 특히 의학부와 법학부가 유명했고, 유럽 각지에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결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롬바르디아 통치는 이탈리아 근대화의 중요한 출발점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요제프 2세의 계몽절대주의적 개혁은 행정, 사법, 경제, 사회, 교육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다. 비록 일부 개혁은 너무 급진적이어서 저항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롬바르디아를 18세기 유럽에서 가장 선진적인 지역 중 하나로 만들었다. 베카리아로 대표되는 밀라노 계몽주의자들의 활동은 유럽 지성사에 중요한 기여를 했고, 라 스칼라 극장의 건설은 밀라노를 세계적인 문화 도시로 만들었다. 이러한 18세기의 근대화 경험은 훗날 이탈리아 통일 운동과 근대 국가 건설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개혁 정신과 롬바르디아의 진취적 문화가 만나 이루어낸 이 시기의 성과는 이탈리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장을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