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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역사 52. 부르봉 왕조의 나폴리-시칠리아 왕국 재건과 카를로 7세의 산업 진흥 정책, 카세르타 궁전 건설

SSSCH 2025. 6. 9.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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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중반 남부 이탈리아에는 새로운 왕조가 등장하여 근 200년간 이어진 스페인 직접 통치를 종료시켰다. 스페인 부르봉 가문 출신인 카를로 7세가 1734년 나폴리-시칠리아 왕국의 왕좌에 오르면서 남부 이탈리아는 독립적인 왕국으로서의 지위를 회복했다. 카를로 7세와 그의 후계자들은 계몽전제주의 이념에 따라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했으며, 특히 산업 진흥과 문화 발전에 큰 공을 들였다. 카세르타 궁전으로 대표되는 건축 사업과 포르첼라나 도자기 공장 같은 산업 시설 건설은 나폴리 왕국이 유럽의 근대적 국가로 발돋움하려는 야심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업이었다.

폴란드 왕위계승전쟁과 카를로 7세의 즉위

카를로 7세가 나폴리-시칠리아 왕국의 왕이 된 배경에는 복잡한 유럽 정치의 역학관계가 있었다. 폴란드 왕위계승전쟁(1733-1738) 중에 스페인의 펠리페 5세는 아들 카를로를 위해 이탈리아 남부 진출을 시도했다. 카를로는 이미 1731년 어머니 엘리사베타 파르네세를 통해 파르마 공국과 피아첸차 공국을 상속받았지만, 이는 그의 야심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1734년 카를로는 스페인군을 이끌고 나폴리를 점령했다. 오스트리아군은 별다른 저항 없이 철수했고, 나폴리 시민들은 오히려 새로운 왕을 환영했다. 오스트리아 통치 하에서 나폴리는 단순히 밀라노 총독부의 하위 행정구역 정도로 취급받았기 때문에 지역 귀족들과 시민들은 독립적인 왕국의 복원을 원했기 때문이다.

카를로 7세는 즉위와 함께 나폴리가 더 이상 외국의 속령이 아닌 독립적인 왕국임을 선언했다. 그는 스페인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는 대신 나폴리-시칠리아 왕국의 세습 왕권을 확보했다. 이는 1738년 빈 조약으로 공식 승인되어 남부 이탈리아는 200년 만에 독립적인 정치체로서의 지위를 회복했다.

새로운 왕조는 처음부터 개혁과 근대화를 통해 왕국의 위상을 높이려고 했다. 카를로 7세는 스페인에서 받은 계몽주의 교육의 영향으로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국가 운영을 추구했다. 또한 나폴리 왕국이 유럽의 다른 주요 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근대적 왕국이 되기를 원했다.

행정 개혁과 중앙집권화 추진

카를로 7세가 추진한 첫 번째 대규모 개혁은 행정 체계의 근대화였다.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통치 시대에 누적된 복잡하고 비효율적인 관료제를 정비하고, 중앙집권적 통치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목표였다. 전통적으로 남부 이탈리아는 봉건 영주들의 자치 권한이 강했고, 지역마다 다른 법률과 관습이 적용되어 통일적인 국정 운영이 어려웠다.

새로운 행정 개혁에서는 왕실 직속의 중앙 부처들이 설치되었고, 지방 행정도 국왕이 임명하는 관료들이 직접 담당하도록 했다. 재정 관리가 특히 중요한 개혁 대상이었다. 이전까지는 세금 징수가 지방 영주들에게 위임되어 있어 왕실 수입이 불안정했지만, 개혁 이후에는 왕실이 직접 세무 행정을 관장하게 되었다.

사법 제도도 대폭 개편되었다. 지역별로 다르게 적용되던 법률을 통일하고, 왕실법원의 권한을 강화했다. 특히 봉건 영주들이 가지고 있던 사법권을 점진적으로 축소시켜 나갔다. 이는 현지 귀족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지만, 카를로 7세는 스페인 본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군사 개혁도 중요한 과제였다. 나폴리 왕국은 독립적인 군대를 보유해야 했기 때문에 스페인식 군제를 도입하여 근대적인 상비군을 창설했다. 포병과 공병대가 새로 조직되었고, 해군력 강화에도 큰 투자가 이루어졌다. 나폴리 항구에는 새로운 조선소가 건설되어 전함과 상선을 건조했다.

산업 진흥 정책과 왕립 제조업소 설립

카를로 7세 시대의 가장 혁신적인 정책 중 하나는 왕실 주도의 산업 육성이었다. 당시 나폴리 왕국은 주로 농업에 의존하는 경제 구조였지만, 왕은 제조업 발전을 통해 경제 기반을 다양화하고 왕실 수입을 늘리려고 했다. 이를 위해 여러 분야에서 왕립 제조업소가 설립되었으며, 외국의 선진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가장 유명한 성과는 카포디몬테 도자기 공장의 설립이었다. 1743년 나폴리 북쪽 카포디몬테 언덕에 세워진 이 공장은 유럽 최고 수준의 포르첼라나 도자기를 생산했다. 카를로 7세는 독일 마이센과 프랑스 세브르의 기술을 연구하여 이에 뒤지지 않는 고급 도자기 제작을 목표로 했다. 베네치아와 독일에서 숙련된 기술자들을 초빙했고, 원료인 고령토도 이탈리아 각지에서 최고 품질의 것을 구해왔다.

카포디몬테 도자기는 섬세한 장식과 뛰어난 품질로 유럽 왕실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특히 나폴리 왕실의 문장이 들어간 식기 세트와 장식품들은 외교 선물로도 자주 사용되어 나폴리 왕국의 문화적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공장에서는 일반 상품뿐만 아니라 예술 작품 수준의 조각품도 제작했는데, 이들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세계 각국의 박물관에서 소중히 보관되고 있다.

실크 직조업도 중요한 육성 대상이었다. 산 루치도에 설립된 왕립 실크 공장은 뽕나무 재배부터 실크 제품 생산까지의 전 과정을 통합 관리했다. 프랑스 리옹의 기술을 도입하여 고급 실크 직물을 생산했으며, 특히 교회용 제의와 궁정용 의복 제작에 특화되었다. 이 공장에서 생산된 실크는 품질이 뛰어나 로마 교황청에서도 주문할 정도였다.

철강업 육성도 시도되었다. 몬지아나 지역에 설립된 철강 공장은 시칠리아산 철광석을 이용하여 무기와 농기구를 생산했다. 비록 영국이나 독일의 철강업에 비해서는 규모가 작았지만, 나폴리 왕국이 철강 제품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카세르타 궁전 건설과 바로크 건축의 절정

카를로 7세의 가장 야심찬 사업은 카세르타에 새로운 왕궁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나폴리 북동쪽 약 30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카세르타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갖춘 곳이었다. 카를로 7세는 베르사유 궁전에 버금가는 웅장한 궁전을 건설하여 나폴리 왕국의 위용을 과시하고 싶어했다.

1752년 건설이 시작된 카세르타 궁전은 이탈리아 바로크 건축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설계를 담당한 루이지 반비텔리는 로마에서 활동하던 저명한 건축가였으며, 그는 궁전과 정원, 수로 시설까지 포함하는 종합적인 설계안을 제시했다. 궁전 건물은 가로 247미터, 세로 190미터의 거대한 규모로, 4개의 안뜰을 중심으로 1,200개가 넘는 방이 배치되었다.

궁전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중앙 현관에서 시작되는 대계단이었다. 높이 26미터에 달하는 이 계단은 화려한 대리석 조각과 프레스코 벽화로 장식되어 있으며, 방문객들에게 압도적인 시각적 충격을 주도록 설계되었다. 계단 양쪽에는 고대 로마와 그리스에서 가져온 조각품들이 전시되어 있어 왕실의 문화적 교양을 과시했다.

궁전 내부의 각 방들은 용도에 따라 서로 다른 스타일로 장식되었다. 왕과 왕비의 침실, 접견실, 연회장, 극장 등이 각각 고유한 특색을 가지도록 설계되었으며, 천장 프레스코화와 벽면 장식에는 당시 최고 수준의 예술가들이 참여했다. 특히 왕좌실의 천장화는 나폴리 왕국의 영광을 알레고리로 표현한 걸작으로 여겨진다.

궁전 정원도 못지않게 인상적이었다.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을 모델로 한 카세르타 정원은 3킬로미터에 달하는 중앙 수로를 중심으로 기하학적으로 배치된 화단과 분수, 조각품들로 구성되었다. 정원 끝에 있는 다이아나와 악타이온 분수는 바로크 조각 예술의 백미로 꼽히며, 40미터 높이에서 떨어지는 인공 폭포는 당시로서는 경이로운 수압 공학 기술의 산물이었다.

문화 진흥과 고고학 발전

카를로 7세는 단순히 궁전과 공장 건설에만 그치지 않고 문화 전반의 발전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고고학 분야에서는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1738년 베수비오 화산 근처의 에르콜라노에서 시작된 발굴 작업은 고대 로마 문명 연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에르콜라노와 폼페이 발굴은 당시로서는 매우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카를로 7세는 발굴된 유물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연구하기 위해 나폴리에 고고학 박물관을 설립했다. 이 박물관은 오늘날까지도 세계 최고의 고대 로마 유물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다.

발굴 과정에서 나온 프레스코화와 모자이크, 조각품들은 18세기 유럽의 신고전주의 문화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에르콜라노에서 발견된 파피루스 두루마리들은 고대 그리스 철학과 문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카를로 7세는 이러한 발견들을 정리한 호화로운 도서를 출간하여 유럽 전역의 학자들과 공유했다.

음악과 연극 분야에서도 괄목할 만한 발전이 있었다. 1737년 완공된 산 카를로 오페라 하우스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오페라극장이었다. 이 극장에서는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 니콜로 요멜리 같은 나폴리 악파의 작곡가들이 활동했으며, 그들의 작품은 유럽 각국에서 공연되어 나폴리의 문화적 영향력을 확산시켰다.

교육 개혁과 학문 발전

계몽주의 이념에 따라 교육 개혁도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기존의 예수회 중심 교육 체계를 개편하여 더욱 실용적이고 현대적인 교육과정을 도입했다. 나폴리 대학교는 대대적인 개혁을 통해 의학, 법학, 공학 분야의 교육이 크게 강화되었다.

특히 의학 분야에서는 해부학과 임상의학 교육이 체계화되었다. 나폴리는 이미 중세 시대부터 살레르노 의과대학으로 유명했는데, 18세기에는 이러한 전통을 바탕으로 근대적 의학 교육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병원과 대학이 연계된 임상 교육 시스템은 당시로서는 매우 선진적인 것이었다.

공학 교육도 새롭게 중시되었다. 군사 공학과 토목 공학 분야의 전문가 양성을 위해 왕립 공병학교가 설립되었고, 여기서 배출된 기술자들은 카세르타 궁전 건설과 각종 공공사업에 참여했다. 또한 상업과 항해술 교육을 위한 전문학교도 설립되어 나폴리 왕국의 해상 무역 발전에 기여했다.

종교 정책과 교회 개혁

카를로 7세의 종교 정책은 전통적인 가톨릭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계몽주의적 개혁을 추구하는 균형잡힌 접근법을 보였다. 교황과의 관계에서는 나폴리 왕국의 독립성을 강조했지만, 동시에 가톨릭 교회의 권위는 존중했다.

가장 중요한 개혁은 콘코르다토(교회와 국가 간의 협약) 체결이었다. 1741년 교황 베네딕토 14세와 맺은 협약을 통해 나폴리 왕국 내 교회 문제에 대한 왕실의 권한이 크게 강화되었다. 주교 임명권, 교회 재산 관리권, 교회법원의 관할권 등에서 왕실의 발언권이 확대되었다.

수도원 개혁도 점진적으로 추진되었다. 북부 이탈리아의 급진적 개혁과는 달리 나폴리에서는 수도원의 사회적 기능을 인정하면서도 비생산적인 활동은 제한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전개되었다. 교육과 자선 활동에 참여하는 수도원은 지원했지만, 단순히 기도만 하는 관상 수도원에 대해서는 재정 지원을 축소했다.

페르디난도 4세 시대의 계승과 발전

1759년 카를로 7세가 스페인 왕 카를로스 3세로 즉위하면서 나폴리를 떠나게 되자, 그의 8세 아들 페르디난도가 페르디난도 4세로 즉위했다. 어린 나이 때문에 섭정 체제가 구성되었지만, 카를로 7세가 추진한 개혁 정책들은 지속적으로 발전되었다.

페르디난도 4세 시대에는 특히 농업 개혁과 인프라 건설에 더 많은 관심이 기울여졌다. 시칠리아의 라티푼디움(대농장) 문제 해결을 위한 토지 개혁이 시도되었고, 나폴리와 주요 도시들을 연결하는 도로망 확충 사업이 본격화되었다. 또한 항만 시설 개선을 통해 지중해 무역에서 나폴리의 위상을 높이려고 노력했다.

결론

18세기 부르봉 왕조의 나폴리-시칠리아 왕국 통치는 남부 이탈리아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카를로 7세와 그의 후계자들이 추진한 계몽전제주의 개혁은 중세적 질서를 근대적 국가 체계로 전환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행정 중앙집권화, 산업 진흥 정책, 문화 발전 등은 모두 나폴리 왕국이 유럽의 주요 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특히 카포디몬테 도자기 공장과 카세르타 궁전으로 대표되는 문화적 성취는 나폴리 왕국의 위상을 크게 높였다. 이러한 사업들은 단순한 왕실의 치장이 아니라 국가의 소프트파워를 강화하고 유럽 문화계에서 나폴리의 영향력을 확산시키는 전략적 투자였다. 또한 에르콜라노와 폼페이 발굴을 통한 고고학 발전은 나폴리를 고대 문명 연구의 중심지로 만들어 18세기 유럽의 지적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비록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이러한 발전이 일시적으로 중단되기도 했지만, 부르봉 시대에 구축된 근대적 국가 체계와 문화적 토대는 19세기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도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남부 이탈리아가 단순한 농업 지역이 아닌 독립적이고 문화적으로 세련된 정치체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시기의 개혁과 발전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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