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이탈리아 역사 48. 필리프 2세 치하의 스페인 패권과 이탈리아 지배 체제 - 남부 경제 의존과 밀라노·나폴리 총독 통치의 확립

SSSCH 2025. 6. 3.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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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후반, 이탈리아는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강력한 지배 하에 놓였다. 필리프 2세(재위 1556-1598)가 아버지 카를 5세로부터 물려받은 스페인 제국은 유럽 최강의 세력이었고, 이탈리아는 그 제국의 핵심 구성 요소였다. 레판토 해전의 승리로 지중해 패권을 확고히 한 스페인은 밀라노 공국과 나폴리 왕국을 직접 통치하며 이탈리아 전체를 자신의 영향권 안에 두었다. 하지만 이러한 스페인 지배는 이탈리아 경제와 사회에 깊은 구조적 변화를 가져왔고, 특히 남부 지역의 경제적 의존성을 심화시켰다.

카를 5세의 유산 분할과 필리프 2세의 즉위

1556년 카를 5세의 퇴위는 유럽 정치 지형을 크게 바꾸었다. 그는 자신의 거대한 제국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동생 페르디난트에게는 신성로마제국과 오스트리아를, 아들 필리프에게는 스페인과 네덜란드, 이탈리아, 신대륙을 물려주었다. 이로써 이탈리아는 완전히 스페인의 영향권에 속하게 되었다.

필리프 2세는 아버지와는 다른 통치 스타일을 보였다. 카를 5세가 끊임없이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직접 통치했다면, 필리프 2세는 마드리드 근교의 에스코리알 궁전에 머물며 관료제를 통한 간접 통치를 선호했다. 이는 이탈리아 지배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총독 제도를 통한 체계적인 식민 통치가 확립되었다.

필리프 2세의 즉위 초기 이탈리아의 정치적 지형은 복잡했다. 밀라노 공국과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 사르데냐는 스페인의 직접 통치를 받았고, 토스카나 대공국과 사보이 공국은 스페인의 보호국이었다. 교황령은 명목상 독립을 유지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스페인의 영향 하에 있었고, 베네치아 공화국만이 유일하게 독립적인 지위를 유지했다.

밀라노 총독부의 설치와 북부 이탈리아 통치

밀라노 공국은 스페인의 이탈리아 지배에서 가장 중요한 거점이었다. 알프스 남쪽의 비옥한 롬바르디아 평원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은 경제적 가치가 높았을 뿐 아니라, 프랑스와 독일을 견제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스페인은 이곳에 총독을 파견하여 직접 통치했다.

밀라노 총독은 대부분 스페인 대귀족 출신이었다. 초대 총독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알바 공작)부터 시작하여 역대 총독들은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다. 이들은 군사 지휘권과 민정 권한을 모두 가지고 있었으며, 스페인 왕에게만 책임을 졌다.

총독부 체제 하에서 밀라노의 전통적인 자치 기구들은 크게 약화되었다. 비스콘티 가문과 스포르차 가문 시대의 공작 체제는 완전히 사라졌고, 대신 스페인식 관료제가 도입되었다. 지역 귀족들은 스페인 체제에 협력하는 대가로 일정한 특권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실질적인 정치권력은 상실했다.

경제적으로는 중과세가 큰 문제였다. 스페인은 네덜란드 독립전쟁과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이탈리아 지역에서 막대한 세금을 거두었다. 특히 밀라노에는 '도나티보'라는 특별세가 부과되어 지역 경제에 큰 부담이 되었다.

나폴리 왕국의 총독 통치와 남부 사회 변화

나폴리 왕국은 시칠리아와 함께 스페인령 이탈리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다. 이 지역은 아라곤 왕국 시절부터 스페인의 영향 하에 있었지만, 필리프 2세 시대에 들어서면서 통치 체제가 더욱 체계화되었다. 나폴리 총독부는 카스텔 누오보에 설치되었고, 역대 총독들은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다.

나폴리의 사회 구조는 스페인 지배 하에서 더욱 경직되었다. 대토지 소유제인 라티푼디움이 확산되면서 소농들은 몰락했고, 대신 대귀족들의 권력이 강화되었다. 이들 나폴리 대귀족들은 스페인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으며 기득권을 유지했다.

남부의 경제 구조도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곡물과 올리브유, 포도주 등 1차 산품의 수출에 의존하는 경제가 고착화되었다. 이는 북부 이탈리아나 네덜란드의 발달한 상공업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특히 나폴리산 밀은 스페인 본토로 대량 수출되어 스페인의 식량 안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도시 나폴리는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로 성장했다. 16세기 말 인구가 약 30만 명에 달해 파리나 런던보다도 컸다. 하지만 이는 건전한 경제 발전의 결과가 아니라 관료제와 귀족 문화에 기생하는 도시 팽창이었다. 생산적 활동보다는 소비와 향락에 치중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시칠리아의 특수한 지위와 종교재판소

시칠리아는 나폴리와 함께 스페인의 직접 통치를 받았지만, 독특한 특권을 유지했다. '시칠리아 왕국'이라는 별도의 정치체로 인정받았고, 팔레르모에 설치된 총독부가 섬 전체를 통치했다. 시칠리아 총독은 대개 스페인 왕족이나 최고위 귀족이 맡았다.

시칠리아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제도는 종교재판소였다. 1487년 설치된 시칠리아 종교재판소는 스페인 본토의 그것과 유사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이탈리아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현상이었다. 종교재판소는 유대인과 무슬림 개종자들을 감시했을 뿐 아니라, 일반 기독교도들의 신앙 순수성도 철저히 점검했다.

경제적으로 시칠리아는 곡창지대 역할을 했다. 특히 동부 지역의 밀 생산은 지중해 전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하지만 대토지 소유제와 조방적 농업으로 인해 생산성은 낮았고, 농민들의 생활 수준은 매우 열악했다.

시칠리아의 문화는 스페인, 이탈리아, 아랍의 영향이 혼재하는 독특한 모습을 보였다. 팔레르모의 건축물들은 이러한 문화적 혼합을 잘 보여준다. 특히 바로크 양식이 전래되면서 시칠리아만의 독특한 바로크 문화가 꽃피웠다.

레판토 해전과 지중해 패권 확립

1571년 10월 7일, 그리스 서부 레판토 앞바다에서 벌어진 해전은 16세기 후반의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다. 스페인이 주도하는 신성동맹과 오스만 제국 함대 간의 이 해전에서 기독교 연합군이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로 스페인은 지중해 서부의 패권을 확고히 했고, 이탈리아 연안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었다.

레판토 해전에는 베네치아 함대도 참여했지만, 주력은 스페인 함대였다.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가 지휘한 연합 함대는 최신식 갤리온선과 강력한 화력을 자랑했다. 이 해전의 승리는 스페인의 해군력을 과시하는 동시에, 이탈리아에서 스페인의 지위를 더욱 강화시켰다.

해전의 여파로 이탈리아 연안 도시들의 오스만 공격에 대한 우려가 크게 줄어들었다. 16세기 전반까지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는 바르바리 해적과 오스만 함대의 위협에 시달렸지만, 레판토 이후 이러한 위험이 현저히 감소했다. 이는 남부 지역의 경제 발전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레판토 승리의 이익은 주로 스페인이 독차지했다. 베네치아는 큰 희생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키프로스 섬을 오스만에게 내주어야 했고, 동지중해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했다. 이는 베네치아의 쇠퇴를 가속화하는 요인이 되었다.

경제 구조의 변화와 남북 격차 심화

스페인 지배 하에서 이탈리아의 경제 구조는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가장 큰 특징은 남북 간 경제 격차의 심화였다. 북부의 밀라노와 베네치아 지역은 여전히 상공업의 중심지 역할을 했지만, 남부는 점점 더 농업 중심의 후진 지역으로 전락했다.

밀라노 지역은 비단 공업과 금속 공업이 발달했다. 특히 밀라노의 무기 제조업은 유럽 전체에서 명성이 높았다. 하지만 스페인의 중과세와 길드 제도의 경직성으로 인해 경쟁력이 점차 약화되었다. 네덜란드와 영국의 신흥 공업이 부상하면서 이탈리아의 전통적 우위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남부 지역은 라티푼디움 체제가 더욱 강화되었다. 대지주들은 스페인 귀족과 혼인하거나 스페인에서 작위를 받으며 기득권을 유지했다. 반면 소농들은 몰락하여 대지주의 소작농이 되거나 도시의 룸펜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했다. 이러한 구조는 남부 이탈리아의 사회 발전을 크게 저해했다.

화폐 제도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스페인이 신대륙에서 대량의 은을 가져오면서 유럽 전체에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는데, 이탈리아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고정 수입에 의존하는 도시 중산층이 큰 타격을 받았다. 반면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들은 오히려 이익을 보았다.

교황령의 미묘한 위치와 스페인과의 관계

교황령은 명목상 독립을 유지했지만, 실제로는 스페인의 강한 영향 하에 있었다. 대부분의 교황들이 친스페인 정책을 취했고, 반종교개혁 과정에서 스페인과 긴밀히 협력했다. 하지만 때로는 갈등도 있었다.

교황 파울루스 4세(재위 1555-1559)는 예외적으로 반스페인 정책을 취했다. 카라파 가문 출신인 그는 네덜란드 출신인 필리프 2세를 불신했고, 프랑스와 동맹하여 스페인에 맞서려 했다. 하지만 1557년 알바 공작이 이끄는 스페인군이 로마 근교까지 진격하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교황 비오 5세(재위 1566-1572)는 다시 친스페인 노선으로 돌아갔다. 그는 레판토 해전을 위한 신성동맹 결성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스페인의 대프로테스탄트 정책을 지지했다. 1570년 그가 발표한 교황칙 '레그난스 인 엑셀시스'로 엘리자베스 1세를 파문한 것도 스페인의 이익에 부합하는 조치였다.

교황령 내에서도 스페인의 영향력이 컸다. 많은 추기경들이 스페인으로부터 연금을 받았고, 교황청의 주요 직책에 스페인계 인사들이 임명되었다. 이는 가톨릭 교회의 보편성에 어느 정도 제약을 가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독립 유지와 쇠퇴

이탈리아에서 유일하게 독립을 유지한 베네치아 공화국은 복잡한 상황에 처했다. 스페인의 압박과 오스만의 위협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했고, 동시에 경제적 쇠퇴라는 내부 문제도 해결해야 했다.

베네치아는 '무장 중립' 정책을 취했다. 강력한 해군력을 유지하면서도 어느 한쪽에 완전히 기울지 않으려 했다. 레판토 해전에는 참여했지만, 그 이후에는 오스만과의 별도 강화를 추진했다. 1573년 오스만과 체결한 평화조약으로 동지중해 무역의 안전을 어느 정도 보장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베네치아의 경제적 쇠퇴는 뚜렷했다. 대서양 항로의 개척으로 지중해 무역의 중요성이 감소했고, 포르투갈과 네덜란드가 아시아 향료 무역을 독점하면서 베네치아의 전통적 우위가 사라졌다. 또한 오스만의 확장으로 동지중해에서의 활동 범위가 크게 줄어들었다.

베네치아는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테라페르마(본토) 개발에 힘썼다. 베네토 지역의 농업 개발과 새로운 공업 육성을 통해 경제 기반을 다각화하려 했다. 팔라디오의 건축 작품들이 베네토 지역에 집중된 것도 이러한 본토 개발 정책과 관련이 있었다.

토스카나 대공국의 메디치 가문 부활

1569년 교황 비오 5세는 피렌체의 코시모 1세에게 토스카나 대공 칭호를 수여했다. 이로써 메디치 가문은 공화정의 종료 이후 다시 한 번 정식 군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토스카나 대공국은 사실상 스페인의 보호국이었다.

코시모 1세(재위 1537-1574)는 능력 있는 군주였다. 그는 시에나를 정복하여 토스카나를 통일했고, 피사 항구를 재건하여 해상 무역을 부활시키려 했다. 또한 우피치 궁전을 건설하고 바사리에게 메디치 가문의 영광을 기리는 벽화를 그리게 하는 등 문화 사업에도 힘썼다.

하지만 토스카나의 국제적 지위는 제한적이었다. 중요한 외교 정책은 스페인의 승인을 받아야 했고, 군사력도 스페인에 의존해야 했다. 메디치 가문의 후계자들은 점점 더 스페인 궁정의 문화에 동화되어갔고, 피렌체의 독특한 시민 문화는 쇠퇴했다.

경제적으로는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 모직물 공업과 비단 공업이 유지되었고, 리보르노 항구의 개발로 새로운 무역 기회를 모색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르네상스 전성기의 경제적 활력을 되찾지는 못했다.

결론

필리프 2세 시대의 스페인 지배는 이탈리아 역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정치적으로는 반도 전체가 스페인의 영향권에 편입되면서 통일성을 갖게 되었지만, 동시에 지역적 자율성과 다양성은 크게 제약받았다. 경제적으로는 남북 격차가 심화되었고, 특히 남부 지역이 농업 중심의 후진 경제 구조에 고착되는 결과를 낳았다. 문화적으로는 반종교개혁과 바로크 문화의 전파로 새로운 양상을 보였지만, 르네상스의 창조적 에너지는 상당 부분 소실되었다. 이 시기에 형성된 이탈리아의 정치경제적 구조는 이후 수백 년간 지속되어 근대 이탈리아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스페인 지배의 유산은 19세기 통일 운동까지도 극복하기 어려운 구조적 문제로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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