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이탈리아 역사 47. 트리엔트 공의회와 반종교개혁의 전개 - 예수회의 창설과 성 바르톨로메오 양식의 등장

SSSCH 2025. 6. 3.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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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7년 로마 약탈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가톨릭 교회는 생존을 위한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해야 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가톨릭 세계는 전례 없는 위기에 직면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집된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는 가톨릭 교회의 교리를 재정립하고 내부 개혁을 단행한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동시에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창설한 예수회는 새로운 선교 전략과 교육 체계로 반종교개혁의 첨병 역할을 담당했다.

트리엔트 공의회 소집의 배경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확산되면서 가톨릭 교회는 교리적 혼란과 권위 실추라는 이중고에 시달렸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1517) 이후 30년 가까이 지나는 동안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 등 유럽 북부 지역이 대거 프로테스탄트로 전향했다. 칼뱅의 개혁 신학까지 더해지면서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교리와 성사 체계 전체가 도전받는 상황이었다.

카를 5세 황제는 종교적 통합을 통한 제국의 안정을 원했지만,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타협은 쉽지 않았다.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 멜란히톤이 제출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은 프로테스탄트의 교리적 입장을 체계화했고, 이에 대한 가톨릭의 공식적인 응답이 시급했다.

교황 파울루스 3세(재위 1534-1549)는 이러한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공의회 소집을 결정했다. 하지만 장소 선정부터 쉽지 않았다. 교황은 이탈리아 내의 도시를 선호했지만, 황제는 독일 지역을 원했다. 결국 타협책으로 합스부르크령이면서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트렌토(트리엔트)가 선택되었다.

공의회의 3단계 진행 과정

트리엔트 공의회는 1545년부터 1563년까지 18년간 3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첫 번째 회기(1545-1547)에서는 성경과 성전의 권위, 원죄와 칭의론 등 프로테스탄트가 제기한 핵심 교리 문제들을 다뤘다. 특히 '오직 성경'을 주장하는 프로테스탄트에 맞서 성전(聖傳)의 권위를 재확인했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루터의 칭의론을 반박했다.

두 번째 회기(1551-1552)는 잠시 중단되었지만, 성사에 대한 중요한 결정들이 내려졌다. 7성사의 효력을 재확인하고, 성체성사에서 실체변화 교리를 명확히 했다. 프로테스탄트들이 부정하는 화체설을 가톨릭의 핵심 교리로 못박은 것이다.

가장 중요한 세 번째 회기(1562-1563)에서는 미사의 의미, 성인 공경, 연옥 교리 등이 재정립되었다. 또한 성직자의 독신제를 재확인하고, 주교들의 거주 의무를 강화하는 등 교회 개혁안도 통과시켰다. 교황 피우스 4세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마침내 공의회는 막을 내릴 수 있었다.

교리적 재정립과 프로테스탄트 대응

트리엔트 공의회의 가장 큰 성과는 가톨릭 교리의 체계적 재정립이었다. 구원론에서는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협력이 모두 필요하다는 입장을 명확히 했다. 이는 '오직 은총'을 강조하는 프로테스탄트 신학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가톨릭만의 독특한 구원관이었다.

성사 신학에서는 7성사 모두의 유효성을 재확인했다. 특히 성체성사에서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을 핵심 교리로 못박았다. 이는 상징적 해석을 주장하는 프로테스탄트들과의 명확한 차별화였다.

성경의 권위와 관련해서는 불가타 성경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교회의 해석권을 강조했다. 개인이 성경을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다는 프로테스탄트의 '성경 해석의 자유' 원칙을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다. 성인 공경과 성상 숭배도 정당한 신심 행위로 재확인되었다.

연옥 교리와 면죄부 제도도 유지되었지만, 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엄격한 규정이 마련되었다. 루터가 격렬히 비판했던 면죄부 판매의 폐해를 인정하면서도, 교리 자체는 포기하지 않는 균형잡힌 접근이었다.

이냐시오 데 로욜라와 예수회 창설

반종교개혁의 핵심 동력 중 하나는 1540년 교황 파울루스 3세가 인가한 예수회(Societas Jesu)였다. 창설자 이냐시오 데 로욜라(1491-1556)는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소귀족 출신으로, 팜플로나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후 회심 체험을 했다. 그가 저술한 '영신수련'은 체계적인 영성 훈련 프로그램으로 가톨릭 영성사에 혁명을 가져왔다.

예수회는 기존 수도회와는 전혀 다른 특징을 보였다. 먼저 교황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서약했다. '교황이 검은색이라고 하면 검은색'이라는 극단적 표현이 나올 정도로 교황권에 충성했다. 또한 공동 기도나 고정된 수도원 생활 대신 세상 속에서 활동하는 능동적 사도직을 강조했다.

교육 사업이 예수회의 핵심 활동이었다. 1551년 로마에 설립한 로마 대학(Collegium Romanum, 현재의 그레고리안 대학)을 시작으로 유럽 전역에 학교를 세웠다. 이들의 교육 방식인 '라티오 스투디오룸'은 고전 교육과 신학을 결합한 체계적 커리큘럼으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선교 활동에서도 예수회는 획기적인 성과를 보였다. 프란치스코 사비에르는 인도와 일본에서, 마테오 리치는 중국에서 활동하며 가톨릭의 세계 전파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들의 적응주의 선교 전략은 현지 문화를 존중하면서도 복음을 전하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로마의 도시 재건과 바로크 건축

반종교개혁은 로마의 물리적 재건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1527년 약탈로 폐허가 된 로마를 다시 가톨릭 세계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대대적인 건설 사업이 추진되었다. 교황 시크스투스 5세(재위 1585-1590)는 특히 적극적인 도시 계획가였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재건이 본격화되었다.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거대한 돔이 1590년 완성되면서, 이 건물은 가톨릭 교회의 위용을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다. 내부 장식도 화려하게 꾸며져 프로테스탄트의 단순함과는 대조를 이뤘다.

새로운 건축 양식인 바로크가 등장한 것도 이 시기였다. 바로크 건축은 곡선과 역동감을 강조하여 감정적 감화를 불러일으키려 했다. 이는 이성적이고 절제된 르네상스 건축과는 정반대의 접근이었다. 보로미니와 베르니니 같은 거장들이 로마 곳곳에 바로크의 걸작들을 남겼다.

교회 내부 장식도 극적으로 바뀌었다. 성상과 성화가 더욱 사실적이고 감정적으로 표현되었고, 금박과 화려한 색채가 사용되었다. 이는 성상을 우상숭배로 규정하는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의도적 대응이기도 했다.

성 바르톨로메오 양식과 새로운 회화

반종교개혁 시대의 회화는 '성 바르톨로메오 양식'으로 불리는 독특한 특징을 보였다. 이는 1563년 트리엔트 공의회가 발표한 성상에 대한 지침을 반영한 것이었다. 공의회는 성화가 신자들의 신심을 고취하고 교육적 효과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카라바조(1571-1610)는 이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였다. 그의 '키아로스쿠로' 기법은 극명한 명암 대비를 통해 극적 효과를 연출했다. '성 마태의 소명'이나 '유디트가 홀로페르네스를 죽이는 장면' 같은 작품들은 성경의 장면을 실감나게 표현하여 신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성인들의 순교 장면이 특히 인기 있는 주제가 되었다. 이는 프로테스탄트들이 성인 공경을 거부하는 상황에서 가톨릭의 전통을 강조하려는 의도였다. 성 세바스티안, 성 라우렌티우스, 성 아가타 등의 순교 장면이 극도로 사실적이고 감정적으로 그려졌다.

구아르키노, 코레지오, 카라치 형제 등도 이 시대의 중요한 화가들이었다. 이들은 라파엘로의 고전주의를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감정 표현을 추구했다. 특히 성모 마리아의 승천이나 성인들의 법열(法悅) 장면을 즐겨 그렸다.

종교재판소의 강화와 금서목록

반종교개혁의 또 다른 측면은 이단 단속의 강화였다. 1542년 교황 파울루스 3세는 로마 종교재판소를 설치하여 교리 순수성을 지키려 했다. 이는 스페인의 종교재판소를 모델로 한 것이었지만, 스페인만큼 극단적이지는 않았다.

1559년에는 최초의 '금서목록(Index Librorum Prohibitorum)'이 발표되었다. 이 목록에는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의 저작은 물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나 에라스무스의 일부 작품까지 포함되었다. 심지어 보카치오의 '데카메론'도 일부 수정 후에야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종교재판은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온건했다. 스페인이나 네덜란드에서와 같은 대량 화형은 일어나지 않았고, 대부분 경고나 참회로 끝났다. 갈릴레이 재판(1633)이 그나마 가장 유명한 사례였지만, 그마저도 화형이 아닌 연금형으로 끝났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특히 교황의 종교재판 권한을 제한했다. 1606년 교황 파울루스 5세와 베네치아 간에 벌어진 '상호금지령 사건'은 세속 권력과 교회 권력 간의 갈등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였다.

새로운 수도회들의 등장

예수회 외에도 여러 새로운 수도회들이 창설되었다. 1524년 로마에서 시작된 테아티노회는 성직자 개혁에 중점을 두었다. 창설자 가에타노 다 티에네는 성직자의 영성 회복과 사목 활동 개선을 목표로 했다.

오라토리오회는 필립포 네리(1515-1595)가 창설한 수도회로, 평신도들의 영성 지도에 특화되었다. 로마의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 그들의 활동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음악을 활용한 예배 방식은 훗날 오라토리오라는 음악 장르의 기원이 되었다.

우르술라 수녀회는 1535년 안젤라 메리치가 창설한 여성 수도회로, 여성 교육에 전념했다. 당시로서는 혁신적이었던 여성 교육 사업을 통해 반종교개혁 시대 여성들의 종교적 역할을 확대했다.

카푸친회는 프란치스코회의 개혁 분파로, 원래의 청빈 정신을 회복하려 했다. 이들의 소박한 갈색 수도복과 엄격한 수행은 당시 사회에 큰 감명을 주었다.

선교와 세계 확장

반종교개혁 시대는 가톨릭 교회의 세계적 확산기이기도 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해외 진출과 함께 가톨릭 선교사들이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로 진출했다. 이는 유럽에서 프로테스탄트에게 잃은 신자들을 다른 대륙에서 보충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남미에서는 라스 카사스 같은 선교사들이 원주민 보호 운동을 벌였다. 비록 스페인 정부의 식민 정책과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인권 보호라는 새로운 가치를 제시했다. 과라니족과 함께 만든 예수회 선교촌(리두시오네스)은 이상적 공동체의 모델로 여겨졌다.

아시아에서도 놀라운 성과가 있었다. 프란치스코 사비에르는 일본에 가톨릭을 전했고, 16세기 말에는 일본에 약 30만 명의 가톨릭 신자가 있었다. 중국에서는 마테오 리치가 유교 문화와 기독교를 접목시키는 시도를 했다.

이러한 선교 활동은 단순한 종교 전파를 넘어서 문화 교류의 역할도 했다. 선교사들이 가져온 서양의 과학 기술과 현지의 전통 지식이 만나면서 새로운 문명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결론

트리엔트 공의회와 반종교개혁은 가톨릭 교회의 역사에서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프로테스탄트의 도전에 맞서 교리를 체계화하고 내부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가톨릭 교회는 새로운 활력을 얻을 수 있었다. 예수회로 대표되는 새로운 수도회들의 활동, 바로크 예술의 등장, 그리고 세계적 선교 확장은 모두 이 시대의 특징이었다. 비록 유럽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영구 분열되는 결과를 막지는 못했지만, 반종교개혁은 가톨릭 교회가 근세와 근대를 거쳐 현재까지 이어지는 정체성을 확립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탈리아는 이 모든 변화의 중심지로서 가톨릭 세계의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가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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