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7년 5월 6일, 로마는 역사상 가장 참혹한 약탈을 당했다. 카를 5세의 제국군이 로마를 점령하면서 벌어진 이 사건은 단순한 군사적 승리를 넘어서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명 전체에 치명타를 가했다. 화려했던 르네상스의 황금시대가 막을 내리고, 이탈리아는 돌이킬 수 없는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로마 약탈의 배경과 원인
이탈리아 전쟁이 30년 넘게 지속되면서 반합스부르크 동맹인 코냑 동맹이 결성되었다. 교황 클레멘스 7세(메디치 가문 출신)는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 베네치아 공화국, 밀라노 공국, 피렌체 공화국과 함께 카를 5세에 맞서는 연합을 구축했다. 이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이탈리아 전체를 지배하는 것을 막기 위한 마지막 저항이었다.
하지만 카를 5세의 제국군은 막강한 전력을 자랑했다. 독일의 란츠크네히트(용병보병), 스페인의 테르시오 부대, 이탈리아의 콘도티에리들이 합쳐진 이 군대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 중 하나였다. 특히 란츠크네히트들은 루터의 종교개혁에 영향을 받아 가톨릭 교회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제국군의 지휘관 샤를 드 부르봉이 1527년 초 롬바르디아에서 남하를 시작했을 때, 그의 군대는 이미 수개월간 임금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굶주리고 분노한 용병들은 약탈로 보상받기를 기대하고 있었고, 로마의 부는 그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로마 성벽의 무너짐과 교황의 도피
1527년 5월 6일 새벽, 제국군은 로마 외곽에 도착했다. 안개가 짙게 깔린 가운데 공격이 시작되었고, 부르봉 공작이 성벽을 기어오르다가 저격수의 총에 맞아 즉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지휘관을 잃은 제국군은 더욱 광폭해졌고, 로마의 방어선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산탄젤로 성채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바티칸과 산탄젤로 성을 잇는 비밀 통로인 '파사레토 디 보르고'를 통해 간신히 탈출한 교황은 성채에서 몇 달간 포위된 채 지내야 했다. 가톨릭 세계의 수장이 자신의 도시에서 포로나 다름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만인의 재난 - 약탈과 파괴의 8일간
지휘관을 잃은 제국군은 완전히 통제 불능 상태에 빠졌다. 독일 란츠크네히트들은 "돈! 돈! 돈!(Dinero! Dinero! Dinero!)"을 외치며 도시 곳곳을 약탈했다. 스페인 병사들과 이탈리아 용병들도 이에 가세했고, 로마는 말 그대로 지옥으로 변했다.
약탈은 8일간 계속되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과 시스티나 성당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병사들은 성물을 빼앗고 제단을 파괴했으며, 심지어 교황의 무덤까지 훼손했다. 바티칸 도서관의 귀중한 필사본들은 불에 타거나 찢어져 거리에 흩어졌다. 라파엘로의 작품들이 있던 바티칸 궁전도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민간인들의 고통은 더욱 참혹했다. 수천 명이 살해되었고, 여성들에 대한 성폭력이 일상적으로 벌어졌다. 부유한 시민들은 몸값을 내고 목숨을 구해야 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은 아무런 보호도 받을 수 없었다. 당시 한 목격자는 "로마의 거리마다 시체가 널브러져 있고, 테베레 강이 피로 물들었다"고 기록했다.
예술가들의 비극적 운명
로마 약탈은 르네상스 예술가들에게도 큰 타격을 주었다. 많은 예술가들이 도시를 떠나야 했고, 일부는 목숨을 잃기도 했다. 라파엘로는 이미 1520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제자들과 작업장은 이 사건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미켈란젤로는 다행히 피렌체에 있어서 직접적인 피해는 피했지만, 로마에 있던 그의 작품들 일부가 훼손되었다. 특히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는 군인들의 무분별한 행동으로 일부 손상을 입었다. 바사리를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로마를 떠나 다른 도시로 이주했다.
로마에서 활동하던 인문주의자들과 학자들도 큰 타격을 받았다. 바티칸 도서관과 여러 개인 도서관이 파괴되면서 수많은 고전 필사본과 르네상스 시대의 학술 자료들이 영영 사라졌다. 이는 르네상스 인문주의 전통에 회복하기 어려운 손실을 가져다주었다.
경제적 파탄과 사회 질서의 붕괴
로마 약탈은 도시의 경제 기반을 완전히 파괴했다. 부유한 상인들과 은행가들의 재산이 약탈당했고, 교황청의 재정도 큰 타격을 입었다. 로마는 수십 년간 이탈리아 경제의 중요한 축이었는데, 이 사건으로 그 역할이 크게 축소되었다.
인구도 급격히 감소했다. 약탈 이전 로마의 인구는 약 5만 명이었지만, 사건 이후에는 1만 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많은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거나 다른 도시로 피난을 떠났기 때문이다. 로마가 이전 수준의 인구를 회복하는 데는 수십 년이 걸렸다.
교황청의 권위도 크게 실추되었다. 가톨릭 세계의 중심지가 이교도도 아닌 가톨릭 황제의 군대에 의해 유린당한 것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는 종교개혁 세력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해석의 근거를 제공했고, 가톨릭 교회의 영적 권위에 큰 타격을 주었다.
르네상스 후원 체계의 붕괴
로마 약탈은 르네상스의 핵심 동력이었던 후원 체계를 근본적으로 흔들어놓았다. 교황청은 더 이상 예전처럼 대규모 예술 프로젝트를 후원할 여력이 없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재건 공사도 상당 기간 중단되었고, 많은 예술가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로마의 추기경들과 귀족들도 큰 재산 손실을 입어 예술 후원이 어려워졌다. 이전에는 로마가 이탈리아 전역에서 예술가들이 몰려드는 중심지였지만, 이제는 베네치아, 피렌체, 나폴리 등 다른 도시들이 그 역할을 나누어 맡아야 했다.
특히 건축 분야에서 타격이 컸다. 브라만테가 설계한 성 베드로 대성당의 공사가 지연되었고, 도시 전체의 재건축 계획들이 무산되었다. 로마는 이후 수십 년간 폐허와 같은 모습을 유지해야 했다.
종교개혁에 미친 영향
로마 약탈은 유럽의 종교개혁 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프로테스탄트 진영은 이 사건을 하나님이 부패한 교황청을 심판하신 것이라고 해석했다.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이 사건을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는 증거로 활용했다.
반면 가톨릭 교회는 이 충격적인 사건을 계기로 내부 개혁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로 이어지는 반종교개혁 운동의 배경에는 이 사건이 준 충격이 자리잡고 있었다.
정치적 결과와 합스부르크 패권 확립
로마 약탈은 이탈리아 전쟁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교황이 사실상 카를 5세의 포로가 되면서 코냑 동맹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1529년 캄브레 평화조약을 통해 카를 5세는 이탈리아에서의 패권을 확고히 했다.
프랑스는 이탈리아에서의 영향력을 거의 상실했고, 베네치아 공화국은 중립 정책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도 황제의 지지를 받아 권력을 되찾았지만, 이는 완전히 스페인에 종속된 상태에서였다.
이탈리아는 이후 300년 가까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스페인이 밀라노 공국과 나폴리 왕국을 직접 통치했고, 다른 이탈리아 국가들도 사실상 스페인의 영향권 하에 놓였다.
문화적 패러다임의 전환
로마 약탈 이후 이탈리아 문화는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다. 이전의 낙관적이고 인간중심적인 르네상스 문화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다. 대신 불안과 절망, 종교적 경건함을 강조하는 문화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예술에서도 매너리즘이라는 새로운 양식이 등장했다. 라파엘로의 고전적 균형미나 레오나르도의 이상적 아름다움 대신, 불안감과 긴장감을 표현하는 복잡하고 과장된 형태가 선호되었다. 파르미자니노의 '긴 목의 성모'같은 작품이 이런 경향을 대표한다.
문학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이전의 신플라톤주의적 사랑 시학 대신, 타소의 '예루살렘 해방'처럼 종교적 주제와 영웅적 서사시가 인기를 끌었다. 인문주의자들도 이전의 세속적 관심에서 벗어나 종교적 주제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결론
1527년 로마 약탈은 단순한 군사적 사건을 넘어서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명의 종말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8일간의 약탈과 파괴는 수백 년간 축적된 문화적 성취를 한순간에 무너뜨렸고, 이탈리아는 다시는 이전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교황청의 권위 실추, 예술 후원 체계의 붕괴, 합스부르크 패권의 확립 등 이 사건이 남긴 상처는 이후 이탈리아 역사 전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화려했던 르네상스의 막이 내리고, 이탈리아는 외세의 지배 하에서 새로운 문화적 정체성을 모색해야 하는 어려운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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