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영국 역사 58. 1916년 이스터 봉기와 아일랜드 독립 운동의 전환점 - 더블린 시가전에서 신페인 부상까지

SSSCH 2025. 5. 24.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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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4월 24일 부활절 월요일, 더블린 시내에 총성이 울려 퍼졌다. 아일랜드 공화파 무장 단체들이 영국 정부 건물들을 점령하며 '아일랜드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이스터 봉기라 불리는 이 무력 반란은 일주일 만에 진압되었지만, 그 여파는 아일랜드 역사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온건한 홈룰 운동이 무력 독립 투쟁으로 전환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신페인이라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부상하게 되었다.

1차 대전과 아일랜드의 딜레마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아일랜드는 미묘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오랜 투쟁 끝에 1914년 홈룰법이 통과되어 아일랜드 자치가 확정되었지만, 전쟁으로 인해 시행이 연기된 상태였다. 아일랜드 의회당의 존 레드몬드는 영국의 전쟁 노력에 적극 협력하면서 전후 홈룰 실현을 기대했다.

수많은 아일랜드인들이 영국군에 자원입대했다. 그들은 '작은 나라의 자유'를 위해 싸운다는 명분에 공감했고, 독일의 침공으로부터 아일랜드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아일랜드 사단들은 서부전선에서 용맹을 떨쳤고, 갈리폴리 상륙작전에서도 큰 희생을 치렀다. 하지만 이러한 충성심은 아일랜드 내 모든 세력이 공유하는 것은 아니었다.

급진적 공화파들은 '영국의 곤경이 아일랜드의 기회'라는 전통적 사고를 유지했다. 아일랜드 공화 형제단(IRB)과 아일랜드 시민군(ICA) 같은 비밀 조직들은 영국이 유럽 전쟁에 매몰되어 있는 틈을 타 독립을 쟁취하려 했다. 이들에게 홈룰은 불충분한 타협이었고, 완전한 공화국 건설만이 진정한 해방이었다.

북아일랜드 개신교도들의 반발도 심각했다. 얼스터 자원군은 홈룰 시행을 무력으로 저지하겠다고 위협했고, 보수당도 이들을 지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일랜드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고, 급진파들은 무력 행동을 통해 상황을 돌파하려 했다.

봉기의 배경과 준비

이스터 봉기는 갑작스러운 사건이 아니라 오랜 준비의 결과였다. 아일랜드 공화 형제단의 지도부는 이미 1914년부터 독일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이들은 독일로부터 무기를 지원받고 아일랜드 출신 포로들을 이용해 반영 봉기를 일으키려 했다.

로저 케이스먼트 경은 독일에서 아일랜드 여단을 조직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독일은 아일랜드 봉기를 지원하기 위해 무기를 실은 선박을 파견했다. 하지만 영국 해군의 감시가 삼엄했고, 무기선은 제대로 접안하지 못했다. 케이스먼트도 체포되어 후에 런던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봉기 계획은 아일랜드 자원군(Irish Volunteers) 내부에서도 논란이 있었다. 온건파 지도자 에오인 맥닐은 성공 가능성이 희박하다며 반대했지만, 급진파들은 패트릭 피어스를 중심으로 봉기를 강행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피의 희생'을 통해 아일랜드 민족 정신을 각성시키고, 국제적 관심을 끌어내려 했다.

피어스는 교육자이자 시인으로, 게일어 부흥 운동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아일랜드 독립을 위해서는 무력 투쟁이 불가피하다고 확신했고, 자신들의 희생이 후세에 영감을 줄 것이라 믿었다. 제임스 코놀리가 이끄는 아일랜드 시민군도 합류하면서 봉기 준비가 본격화되었다.

더블린 점령과 공화국 선언

1916년 4월 24일 오전, 약 1,600명의 봉기 참가자들이 더블린 시내 주요 거점을 동시에 점령했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시내 중심가에 있는 중앙우체국(GPO)이었다. 피어스는 이곳에서 아일랜드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아일랜드 인민의 이름으로, 그리고 죽은 세대들의 이름으로, 우리는 우리의 불굴의 권리를 통해 아일랜드 민족의 운명을 소집한다"는 선언문이 낭독되었다.

봉기군은 더블린 성, 포 코트, 보일랜드 제분소, 스티븐스 그린, 사우스 더블린 연합 등 주요 건물들을 점령했다. 이들은 영국 정부에 맞서 '아일랜드 공화국 임시정부'를 구성했다고 선언했다. 임시정부 대통령에는 피어스가, 총사령관에는 코놀리가 임명되었다.

하지만 봉기는 처음부터 어려움에 직면했다. 예상했던 독일의 무기 지원은 도착하지 않았고, 아일랜드 자원군의 대부분은 참여하지 않았다. 더블린 시민들의 반응도 냉담했다. 오히려 많은 시민들이 봉기군을 비난했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서부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가족을 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영국군의 반격과 시가전

영국군의 대응은 신속하고 강력했다. 더블린에 주둔하던 병력은 2,400명에 불과했지만, 곧 본토와 아일랜드 각지에서 증원군이 도착했다. 총 2만 명의 영국군이 더블린을 포위하며 봉기 진압에 나섰다. 군사 작전은 존 맥스웰 장군이 지휘했다.

영국군은 포함 로라와 헬가호를 리피강으로 진입시켜 함포 사격을 가했다. 이는 아일랜드 역사상 처음으로 더블린에 대한 포격이었다. 야포도 시내로 들여와 봉기군이 점령한 건물들을 직접 공격했다. 특히 중앙우체국에 대한 집중 포격으로 건물이 화염에 휩싸였다.

시가전은 6일간 계속되었다. 봉기군은 게릴라 전술로 저항했지만, 압도적인 화력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더블린 시내는 전쟁터가 되었고, 건물들이 파괴되면서 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되었다. 총 사망자는 450명을 넘었는데, 이 중 절반 이상이 민간인이었다.

4월 29일, 더 이상의 시민 희생을 막기 위해 피어스는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봉기 지도자들과 주요 참가자들이 체포되었고, 더블린은 다시 영국군의 통제 하에 들어갔다. 표면적으로는 봉기가 완전히 실패한 것처럼 보였다.

처형과 여론의 반전

봉기 실패 직후 아일랜드 여론은 봉기군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전쟁 중 불필요한 혼란을 일으켰다며 봉기를 규탄했다. 하지만 영국 정부의 가혹한 보복이 시작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군법회의에서 봉기 지도자 15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5월 3일부터 12일까지 열흘간에 걸쳐 차례로 처형이 집행되었다. 피어스 형제, 맥도나, 클라크, 맥더못 등 주요 지도자들이 킬메인햄 감옥에서 총살되었다. 코놀리는 봉기 중 부상으로 거동이 불편했지만 의자에 묶인 채 처형되었다.

처형 소식이 알려지면서 아일랜드 여론이 급격히 변했다. 처음에는 봉기를 비판했던 사람들도 지나친 보복에 분노하기 시작했다. 특히 부상당한 코놀리를 의자에 묶어 총살한 것은 많은 사람들의 동정심을 불러일으켰다. 봉기 지도자들은 순식간에 순교자가 되었다.

영국 정부도 뒤늦게 처형의 역효과를 깨달았다. 존 레드몬드를 비롯한 온건파들도 처형에 반대 의견을 표명했고, 아스키스 총리는 추가 처형을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상태였다.

로이드 조지의 협상 시도

새로 군수장관이 된 로이드 조지는 아일랜드 문제 해결을 위해 협상을 시도했다. 그는 홈룰법의 즉시 시행을 제안하면서도, 6개 북부 카운티는 당분간 제외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이는 아일랜드의 분할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존 레드몬드는 이 제안을 수용했지만, 북아일랜드 개신교도들과 보수당의 반발이 심했다. 에드워드 카슨을 중심으로 한 얼스터 연합당은 어떤 형태의 홈룰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고, 아일랜드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이 협상 실패는 온건파 아일랜드 의회당의 신뢰성에 치명적 타격을 주었다. 40년간 의회 투쟁을 통해 홈룰을 추진해온 레드몬드의 노선이 한계를 드러낸 것이었다.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은 점차 더 급진적인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신페인의 부상

이스터 봉기 이후 가장 중요한 변화는 신페인(Sinn Féin)의 급성장이었다. 신페인은 원래 아서 그리피스가 1905년 창설한 온건한 자치주의 정당이었지만, 봉기 이후 완전히 새로운 성격의 조직으로 변모했다.

봉기 생존자들과 석방된 정치범들이 신페인에 합류하면서 조직이 급속히 확대되었다. 1917년 마이클 콜린스, 에이몬 데 발레라 같은 지도자들이 석방되면서 신페인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이들은 아일랜드 완전 독립을 목표로 하는 급진적 공화주의 노선을 추진했다.

신페인의 강령은 명확했다. 영국 의회에서 탈퇴하고, 아일랜드 의회를 재건하며, 국제적 승인을 받아 완전 독립을 달성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홈룰을 통한 자치 확대를 추구하던 기존 아일랜드 의회당과는 완전히 다른 접근법이었다.

1917년 하반기 보궐선거에서 신페인은 연이어 승리했다. 특히 데 발레라가 이스트 클레어 선거구에서 승리한 것은 큰 상징적 의미를 가졌다. 봉기 지도자였던 그의 승리는 아일랜드 민심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징병제 위기와 민족주의 결집

1918년 독일의 춘계 대공세로 영국이 위기에 처하자, 정부는 아일랜드에도 징병제를 확대 적용하려 했다. 이는 아일랜드 전체를 분노케 했다. 이스터 봉기 이후 반영 감정이 고조된 상황에서 강제 징병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아일랜드 의회당마저 징병제에 반대하며 웨스트민스터 의회를 보이콧했다. 카톨릭 교회도 반대 입장을 명확히 했고, 노동조합들은 총파업을 선언했다. 아일랜드 전체가 반영 투쟁으로 단결되는 양상을 보였다.

신페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징병제 반대 운동을 주도하면서 자신들의 급진적 노선이 옳았다는 점을 입증했다. 온건파 의회당의 타협적 접근법이 실효성이 없음을 보여주었고, 완전 독립만이 해답이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영국 정부는 결국 아일랜드 징병제 시행을 포기했지만, 정치적 대가는 컸다. 아일랜드 민족주의는 더욱 급진화되었고, 신페인의 영향력은 더욱 확대되었다. 이는 1918년 총선에서 확실히 드러났다.

1918년 총선과 정치 지형 변화

1918년 12월 총선에서 신페인은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다. 아일랜드 105개 선거구 중 73개를 획득하며 기존 지배 세력인 아일랜드 의회당을 완전히 제압했다. 의회당은 겨우 6석을 얻는 데 그쳤고, 나머지는 얼스터 연합당이 차지했다.

신페인 당선자들은 선거 공약대로 웨스트민스터 의회에 참석하지 않고, 1919년 1월 더블린에서 아일랜드 의회(Dáil Éireann)를 소집했다. 이들은 아일랜드 공화국의 독립을 재선언하고, 데 발레라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는 아일랜드 독립 투쟁의 새로운 단계를 의미했다. 더 이상 영국 의회 내에서의 자치권 확대가 아니라, 아예 별개의 국가 건설을 추구하게 된 것이었다. 이스터 봉기가 뿌린 씨앗이 마침내 정치적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

동시에 아일랜드 공화군(IRA)이 조직되어 무력 투쟁을 본격화했다. 마이클 콜린스의 지휘 하에 게릴라 전쟁이 시작되었고, 이는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아일랜드 독립 전쟁으로 이어졌다.

결론

1916년 이스터 봉기는 아일랜드 역사의 분수령이 되었다. 군사적으로는 실패했지만, 정치적으로는 거대한 성공을 거두었다. 봉기 지도자들의 처형은 그들을 순교자로 만들었고, 온건한 홈룰 운동을 급진적 독립 투쟁으로 전환시켰다.

더블린의 일주일간 시가전은 아일랜드 민족주의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다. 의회 투쟁을 통한 점진적 개혁이라는 기존 노선이 한계를 드러내면서, 무력을 통한 완전 독립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했다. 신페인의 부상과 1918년 총선 승리는 이러한 변화를 확실히 보여주었다.

이스터 봉기는 또한 아일랜드 분할의 씨앗을 뿌렸다. 북아일랜드 개신교도들의 반발이 더욱 격화되면서, 아일랜드 통합이 아닌 분할이 현실적 대안으로 떠올랐다. 이는 20세기 아일랜드 역사의 비극적 배경이 되었다.

피어스가 중앙우체국 앞에서 낭독한 독립 선언문의 이상이 현실이 되기까지는 아직 많은 투쟁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스터 봉기는 아일랜드 독립의 불가역적 출발점이 되었다. 더블린 시가전의 총성은 대영제국의 해체를 알리는 첫 번째 신호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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