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영국 역사 60. 1918년 보통선거법과 사회 복지 개혁의 혁명 - 모든 성인 남성과 일부 여성에게 확장된 민주주의

SSSCH 2025. 5. 24.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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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2월 6일, 영국 의회는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선거법 개혁안을 통과시켰다. 국민대표법(Representation of the People Act 1918)으로 불리는 이 법은 21세 이상 모든 성인 남성과 30세 이상 일부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했다. 유권자 수는 한순간에 3배 가까이 늘어났고, 영국은 진정한 대중 민주주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겪으며 사회 전체가 변화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정치 엘리트들도 더 이상 제한된 민주주의를 고집할 수 없었다. 동시에 전후 사회 재건을 위한 복지 개혁이 본격화되면서, 영국은 현대 복지국가의 토대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가져온 사회 변화

1차 세계대전은 영국 사회의 모든 계층을 전장으로 끌어들였다. 계급에 관계없이 젊은 남성들이 서부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고, 여성들은 군수공장과 농장에서 남성들을 대신해 일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기존의 사회적 위계질서가 크게 흔들렸다.

특히 여성들의 역할 변화가 두드러졌다. 전쟁 전까지 여성의 영역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중공업, 운송업, 금융업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활약했다. '머니션 걸스'라 불리는 군수공장 여성 노동자들은 위험한 화약 제조 작업을 담당했고, 여성 운전사들은 버스와 트럭을 몰며 전시 물류를 책임졌다. 이들의 활약은 여성이 정치적 권리를 가질 자격이 있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노동계급의 지위도 크게 향상되었다. 전쟁 생산의 핵심 역할을 담당하면서 이들의 경제적, 사회적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숙련 노동자들의 임금이 크게 올랐고, 노동조합의 조합원 수도 급증했다. 1914년 400만 명이던 조합원이 1920년에는 800만 명을 넘어섰다.

중산층도 변화를 겪었다. 전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과 세금 증가로 경제적 부담이 커졌지만, 동시에 사회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특히 전쟁에서 돌아온 참전군인들의 복지 문제는 모든 계층이 공감하는 과제였다.

선거법 개혁의 배경

1918년 선거법 개혁은 갑작스러운 변화가 아니라 오랜 투쟁의 결과였다. 19세기부터 시작된 선거권 확대 운동이 1차 대전을 계기로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 1832년, 1867년, 1884년의 선거법 개혁을 통해 중산층과 일부 노동계급에게 투표권이 확대되었지만, 여전히 재산 조건과 성별 제한이 존재했다.

여성 참정권 운동도 큰 영향을 미쳤다. 에멀린 팽크허스트가 이끈 서프러제트들의 과격한 투쟁은 1차 대전 중 중단되었지만, 전쟁에서 여성들이 보여준 애국심과 헌신은 참정권 요구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전쟁 중 여성들이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했다면, 이제 '시민으로서의 권리'도 인정받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보수당과 자유당 모두 선거법 개혁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보수당은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의 투표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자유당은 민주주의 확대라는 당의 이념에 충실하려 했다. 신생 노동당도 노동계급의 정치 참여 확대를 적극 지지했다.

특히 전쟁 중 해외에 주둔한 군인들의 투표권 문제가 개혁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기존 법으로는 이들이 투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선거법 제정이 불가피했다. 이 과정에서 전면적인 선거권 확대가 논의되었다.

1918년 국민대표법의 내용

1918년 국민대표법은 영국 민주주의사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이 법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21세 이상 모든 성인 남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했다. 기존의 재산 조건이 완전히 폐지되어, 경제적 지위에 관계없이 모든 남성이 정치 참여권을 얻었다. 이는 영국 역사상 최초의 남성 보통선거제였다.

둘째, 30세 이상 여성 중 일정 조건을 만족하는 경우 투표권을 부여했다. 본인이나 남편이 지방선거 유권자이거나, 대학 졸업자인 여성들이 대상이었다. 완전한 여성 참정권은 아니었지만, 여성 정치 참여의 첫 걸음이었다.

셋째, 유권자 등록 절차를 간소화했다. 기존에는 복잡한 절차와 비용이 많은 사람들의 정치 참여를 가로막았지만, 이제는 단순한 신고만으로 유권자 등록이 가능해졌다.

넷째, 선거구 재조정을 통해 인구 비례 원칙을 강화했다. 기존의 부패 선거구들이 정리되고, 도시 지역의 대표성이 높아졌다. 특히 런던과 산업 도시들의 의석 수가 증가했다.

이 법으로 유권자 수는 780만 명에서 2,100만 명으로 급증했다. 이 중 840만 명이 여성이었다. 영국 정치사상 최대 규모의 민주화가 단숨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여성 참정권의 제한적 실현

1918년 선거법에서 여성에게 부여된 투표권은 완전한 평등은 아니었다. 남성은 21세부터, 여성은 30세부터 투표할 수 있어 9년의 차이가 있었다. 또한 여성의 경우 재산이나 교육 조건을 만족해야 했다.

이러한 제한의 배경에는 여러 우려가 있었다. 당시 인구 구성상 여성이 남성보다 많았기 때문에, 완전한 여성 참정권을 인정하면 여성 유권자가 다수를 차지할 가능성이 있었다. 보수적인 정치인들은 이를 우려했다.

또한 젊은 여성들의 정치적 성향에 대한 불안도 있었다. 전쟁 중 사회주의와 평화주의 운동에 참여한 젊은 여성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의 정치 참여가 기존 질서를 흔들 수 있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은 이 법을 환영했다. 불완전하지만 여성의 정치적 권리가 법적으로 인정받았고, 이는 완전한 평등을 위한 발판이 될 수 있었다. 밀리센트 포셋 같은 온건파 지도자들은 점진적 진전이라며 만족감을 표했다.

1918년 12월 총선에서 17명의 여성이 후보로 나섰고, 이 중 콘스탄스 마르키에비치가 유일하게 당선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일랜드 독립을 지지하는 신페인 소속으로, 영국 의회 출석을 거부했다. 실질적으로 의회에 입성한 첫 여성 의원은 1919년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낸시 애스터였다.

노동당의 부상과 정치 지형 변화

1918년 선거법 개혁은 영국 정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다. 가장 큰 변화는 노동당의 급성장이었다. 노동계급 유권자가 대폭 늘어나면서 노동당은 자유당을 제치고 주요 정당으로 부상했다.

노동당은 1918년 새로운 당헌을 채택하며 사회주의 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을 명확히 했다. 시드니 웹이 기초한 당헌 4조는 "생산, 분배, 교환 수단의 공동 소유"를 목표로 제시했다. 이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었다.

1922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142석을 획득하며 공식 야당이 되었고, 1924년에는 램지 맥도날드를 수상으로 하는 첫 노동당 정부를 구성했다. 비록 소수정부였지만, 영국 정치사에서 노동계급 정당이 집권한 최초의 사례였다.

자유당은 선거권 확대의 최대 수혜자가 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오히려 쇠퇴의 길을 걸었다. 1차 대전 중 당이 분열되었고, 노동당에게 진보 세력의 지위를 빼앗겼다. 로이드 조지와 아스키스의 갈등도 당의 결속력을 약화시켰다.

보수당은 초기에는 선거권 확대를 우려했지만, 의외로 안정적인 지지 기반을 유지했다. 중산층과 농촌 지역에서의 전통적 지지에 더해, 애국주의와 제국 수호를 내세워 일부 노동계층의 지지도 확보했다.

사회 복지 제도의 확립

1918년 선거법 개혁과 함께 사회 복지 제도도 크게 확장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사회적 변화와 새로운 유권자들의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택 문제 해결이었다. 전쟁 중 주택 건설이 중단되면서 심각한 주택난이 발생했고, 돌아온 참전군인들을 위한 주택 공급이 시급했다. 1919년 애디슨 주택법(Addison Housing Act)은 지방정부가 공영주택을 건설할 수 있도록 중앙정부 보조금을 제공했다.

"영웅들을 위한 집(Homes Fit for Heroes)"이라는 슬로건 하에 대규모 공영주택 건설 사업이 시작되었다. 비록 재정 부족으로 계획보다 적은 수의 주택이 건설되었지만, 국가가 국민의 주거권을 책임진다는 원칙이 확립되었다.

교육 제도도 개혁되었다. 1918년 피셔 교육법(Fisher Education Act)은 의무교육 연령을 14세까지 연장하고, 아동 노동을 제한했다. 또한 성인교육 확대와 교사 처우 개선을 위한 예산도 확보했다. 이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교육받은 시민의 중요성을 인식한 결과였다.

실업 보험도 확대되었다. 1920년 실업보험법은 적용 대상을 1,200만 명으로 늘려 대부분의 노동자를 포함시켰다. 이는 시장 경제의 불안정성으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려는 시도였다.

경제적 도전과 사회 갈등

하지만 전후 사회 개혁은 경제적 어려움에 부딪혔다. 전쟁 비용으로 국가 재정이 악화되었고, 전후 경기침체로 실업률이 급증했다. 1921년에는 실업률이 17%에 달해 대규모 사회 불안이 우려되었다.

노동 분쟁도 격화되었다. 1919년 그래스고 40시간 파업, 1926년 총파업 등 대규모 노동 쟁의가 계속되었다. 노동자들은 전시 중 제한되었던 권리 회복과 임금 인상을 요구했지만, 경기침체로 사용자들은 임금 삭감을 추진했다.

특히 탄광업계의 갈등이 심각했다. 탄광은 영국 경제의 핵심이었지만 국제 경쟁력이 떨어져 구조조정이 불가피했다. 탄광 노동자들은 국유화를 요구했지만, 정부는 민영화를 추진했다. 이는 1926년 총파업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유권자들의 정치적 기대와 경제적 현실 사이의 괴리가 커졌다. 선거권을 얻은 노동계급과 여성들은 급진적 사회 개혁을 기대했지만, 정부의 재정 능력은 제한적이었다.

여성의 정치 참여 확대

1918년 선거법 이후 여성의 정치 참여가 본격화되었다. 비록 제한적이었지만, 여성들은 투표권을 적극 행사했고,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나갔다.

여성 의원 수는 서서히 늘어났다. 1929년에는 14명의 여성이 의회에 진출했고, 이들은 여성과 아동의 권익 보호, 가족 복지 제도 개선 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엘렌 윌킨슨, 마거릿 본드필드 같은 여성 정치인들이 노동당에서 활약했다.

지방정치에서 여성의 활약은 더욱 두드러졌다. 교육위원회, 보건위원회 등에서 여성들이 전문성을 발휘했고, 사회 복지 정책의 실질적 설계자 역할을 했다. 특히 모성과 아동 보건 분야에서 여성들의 기여가 컸다.

1928년에는 마침내 완전한 여성 참정권이 실현되었다. 21세 이상 모든 여성에게 투표권이 부여되어 남녀 평등한 선거권이 확립되었다. 이로써 영국은 명실상부한 보통선거제 국가가 되었다.

제국과 민주주의의 모순

1918년 선거법 개혁은 영국 본토의 민주화를 가져왔지만, 대영제국 전체로 보면 모순적 상황이었다. 본토에서는 보통선거제가 실현되었지만, 식민지에서는 여전히 제한적 자치나 직접 통치가 유지되었다.

아일랜드는 가장 복잡한 사례였다. 1918년 총선에서 신페인이 압승을 거두며 독립을 선언했지만, 영국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1921년 아일랜드 분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이는 새로운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인도에서도 민족주의 운동이 거세졌다. 1919년 몬터규-첼름스포드 개혁으로 제한적 자치가 도입되었지만, 간디의 사티아그라하 운동이 확산되면서 영국 통치에 대한 도전이 본격화되었다.

이런 상황은 영국 정치인들에게 딜레마를 안겨주었다. 본토에서 민주주의를 확대하면서 동시에 제국 통치를 유지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졌다. 민주주의와 제국주의 사이의 모순이 점차 표면화되었다.

결론

1918년 국민대표법은 영국을 귀족제에서 민주제로 전환시킨 결정적 계기였다. 1차 세계대전이라는 국가적 시련을 겪으면서 모든 계층이 정치 참여의 정당성을 인정받았고, 특히 여성의 정치적 권리가 처음으로 법적으로 보장되었다.

이 개혁은 단순한 제도 변화를 넘어 영국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반영했다. 계급 기반 정치에서 대중 정치로의 전환이 이루어졌고, 노동당의 부상으로 양당제 구조가 재편되었다. 동시에 사회 복지 제도의 확립으로 현대 복지국가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새로운 도전도 가져왔다. 확대된 민주주의와 경제적 현실 사이의 긴장, 계급 갈등의 정치화, 제국 통치와 민주주의 이념 사이의 모순 등이 20세기 영국이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았다. 그럼에도 1918년 선거법 개혁은 영국이 현대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이정표가 되었다. 모든 성인의 정치 참여권을 보장한 이 개혁은 영국 민주주의 발전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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