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영국 역사 59. 전후 보호령 체제와 중동 분할의 딜레마 - 사이크스-피코 협정에서 시작된 중동 갈등의 뿌리

SSSCH 2025. 5. 24.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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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승전국들은 패배한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어떻게 처리할지 결정해야 했다. 수백 년간 중동을 지배했던 '유럽의 환자'가 마침내 숨을 거두면서, 거대한 권력의 공백이 생겨났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미 전쟁 중에 비밀리에 체결한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바탕으로 중동을 분할하려 했지만, 현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아랍 민족주의의 각성,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정착 요구, 그리고 신생 독립국들의 열망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중동은 20세기 가장 복잡한 분쟁 지역으로 변해갔다.

오스만 제국의 몰락과 중동 정세

오스만 제국은 1914년 독일 편에 서서 전쟁에 참여했지만, 이는 제국에게 치명적인 선택이었다.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갈리폴리 상륙을 막아내는 등 일부 성과를 거두었지만, 전반적으로는 패배를 거듭했다. 특히 아랍 지역에서 벌어진 아랍 대봉기는 제국의 기반을 뿌리째 흔들었다.

아랍 대봉기는 메카의 샤리프 후세인이 1916년 시작한 반오스만 무력 투쟁이었다. T.E. 로렌스(아라비아의 로렌스)가 영국 정보장교로 활동하며 아랍 부족들을 결집시켰고, 영국은 무기와 자금을 지원했다. 아랍군은 히자즈 철도를 파괴하고 다마스쿠스와 바그다드를 해방시키며 오스만 제국의 아랍 지배를 종식시켰다.

하지만 영국의 아랍 지원에는 숨겨진 목적이 있었다. 독일과 동맹을 맺은 오스만 제국을 약화시키는 것이 우선이었고, 동시에 전후 중동에서 영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맥마흔-후세인 서신(1915-1916)에서 영국은 아랍 독립국 건설을 약속했지만, 이는 다른 협정들과 상충하는 내용이었다.

1918년 무드로스 휴전협정으로 오스만 제국이 항복하면서 중동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600년간 이 지역을 지배했던 제국이 사라지자, 각 민족과 종교 집단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미 전쟁 중에 분할 계획을 세워놨지만, 현지 상황은 예상보다 훨씬 복잡했다.

사이크스-피코 협정의 비밀 거래

1916년 5월 영국의 마크 사이크스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조르주-피코가 비밀리에 체결한 사이크스-피코 협정은 20세기 중동사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 협정은 오스만 제국이 패배할 경우 그 영토를 어떻게 분할할 것인지 미리 정해둔 것이었다.

협정에 따르면 프랑스는 레바논, 시리아 북부, 아나톨리아 남동부를 직접 지배하고, 시리아 내륙 지역에 대해서는 영향권을 행사하기로 했다. 영국은 메소포타미아 남부와 요단강 동안 지역을 직접 지배하고, 요단강 서안에서 가자까지는 영향권으로 설정했다. 팔레스타인은 국제 관리 지역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하지만 이 협정은 처음부터 문제가 많았다. 가장 심각한 것은 해당 지역 주민들의 의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랍인들은 독립을 약속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새로운 형태의 식민 지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더욱이 국경선이 자의적으로 그어져서 부족과 종교 공동체가 분리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 다른 문제는 영국이 동시에 여러 상충하는 약속을 했다는 것이었다. 아랍인들에게는 독립을 약속하고, 유대인들에게는 팔레스타인 정착을 허용하겠다고 했으며, 프랑스와는 분할 통치를 합의했다. 이 세 약속은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러시아도 이 협정에 참여했지만, 1917년 볼셰비키 혁명 후 소비에트 정부가 이 비밀 협정을 폭로하면서 국제적 파문이 일었다.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배신감을 느꼈고, 이는 이후 반서구 정서의 근원이 되었다.

벨푸어 선언과 유대인 문제

1917년 11월 2일 영국 외무장관 아서 벨푸어가 유대인 지도자 라이오넬 로스차일드에게 보낸 서한은 중동 역사에 또 다른 복잡함을 추가했다. 벨푸어 선언으로 알려진 이 문서에서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을 위한 민족적 고향(national home) 설립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이 선언의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있었다. 우선 전쟁 수행을 위해 미국 유대인 사회의 지지가 필요했다. 또한 러시아 혁명으로 동부전선이 붕괴되면서 독일이 서부전선에 병력을 집중할 수 있게 된 상황에서, 새로운 동맹세력이 절실했다. 유대인들의 금융력과 과학 기술력도 영국에게는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벨푸어 선언은 심각한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인구의 90% 이상이 아랍인인 상황에서 유대인 정착촌 건설을 지원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갈등을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영국은 아랍인들에게도 이 지역의 독립을 약속한 상태였다.

벨푸어 선언은 또한 애매한 표현으로 가득했다. '민족적 고향'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기존 아랍 주민들의 권리는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없었다. 이러한 모호함은 이후 수십 년간 팔레스타인 분쟁의 근원이 되었다.

유대인 공동체 내부에서도 반응이 엇갈렸다. 시오니스트들은 환영했지만, 동화주의를 지향하는 유대인들은 우려를 표했다. 특히 팔레스타인에 이미 거주하고 있던 유대인들 중 일부는 대규모 유럽 유대인 이주가 아랍인들과의 갈등을 야기할 것을 걱정했다.

위임통치령 체제의 도입

1919년 파리 평화회의에서 승전국들은 국제연맹 위임통치령 제도를 통해 구 오스만 제국 영토를 관리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직접적인 식민지배 대신 '문명화 사명'이라는 명분 하에 임시적 관리를 한다는 개념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였다.

영국은 메소포타미아(이라크), 팔레스타인, 트란스요단의 위임통치권을 획득했다. 프랑스는 시리아와 레바논을 맡았다. 이들 지역은 A급 위임통치령으로 분류되어 비교적 빠른 독립이 예정되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이라크 위임통치령은 영국에게 가장 중요한 지역이었다. 석유 자원이 풍부했고, 인도로 가는 항로의 중간 기지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영국은 페이살 왕을 이라크의 왕으로 추대했지만, 실권은 영국 고등판무관이 장악했다. 1920년 대규모 반영 봉기가 일어나면서 영국은 막대한 군사비를 투입해야 했다.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은 가장 복잡한 문제였다. 벨푸어 선언의 이행과 아랍인 권익 보호라는 상충하는 목표를 동시에 달성해야 했다. 초대 고등판무관 허버트 사무엘은 유대인이었지만, 아랍인들의 반발을 고려해 균형 정책을 시도했다. 하지만 양측 모두 불만을 표했다.

트란스요단은 요단강 동쪽 지역으로, 후세인의 아들 압둘라가 통치자가 되었다. 이 지역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지만, 영국의 간접 지배가 계속되었다.

아랍 민족주의의 좌절

1차 대전 중 오스만 제국에 맞서 영국을 도왔던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전후 처리 과정에서 큰 실망을 겪었다. 약속되었던 '큰 아랍 왕국' 대신 여러 위임통치령으로 분할된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1920년 다마스쿠스에서 아랍 독립 왕국이 선포되고 페이살이 시리아 왕으로 즉위했지만, 몇 달 후 프랑스군이 다마스쿠스를 점령하면서 이 꿈은 산산조각 났다. 미살룬 전투에서 아랍군이 프랑스군에게 참패하면서 시리아는 프랑스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배신감에 휩싸였다. 맥마흔-후세인 서신에서 약속된 독립이 실현되지 않았고, 대신 새로운 형태의 서구 지배가 시작된 것이었다. 이는 이후 반서구, 반제국주의 정서의 뿌리가 되었다.

하지만 아랍 세계 내부에서도 통합된 대응은 어려웠다. 각 지역의 이해관계가 달랐고, 부족 간 갈등도 심했다. 더욱이 영국과 프랑스가 분할통치 정책을 통해 지역 간 연대를 차단했다.

사우디아라비아만이 예외적으로 독립을 유지했다. 압둘아지즈 이븐 사우드가 헤자즈를 정복하고 사우디 왕국을 건설한 것은 아랍 민족주의에게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도 영국과의 협력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쿠르드족 문제의 등장

사이크스-피코 협정과 위임통치령 체제는 쿠르드족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세브르 조약(1920)에서는 쿠르드족의 자치권이 인정되었지만, 로잔 조약(1923)에서는 이 조항이 삭제되었다. 결국 쿠르드족은 터키, 이라크, 시리아, 이란에 분산되어 살게 되었다.

영국은 이라크 북부 쿠르드 지역을 위임통치령에 포함시키면서 쿠르드족의 자치 요구와 아랍 중앙정부의 통합 정책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이는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쿠르드족은 1차 대전 중 아랍과 마찬가지로 오스만 제국에 맞서 영국을 도왔지만, 전후 독립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대신 여러 국가에 분할되어 소수민족으로 살아가야 했다. 이는 20세기 내내 중동 불안정의 한 요인이 되었다.

영국은 이라크에서 쿠르드족을 아랍 민족주의에 대한 견제 세력으로 활용하려 했다. 하지만 이는 이라크 내부 갈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석유 자원과 서구 열강의 경쟁

중동 분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는 석유였다. 1908년 이란에서, 1927년 이라크에서 대규모 유전이 발견되면서 이 지역의 전략적 가치가 크게 높아졌다. 영국은 해군의 석탄 연료를 석유로 전환하면서 중동 석유에 대한 통제권 확보에 사활을 걸었다.

앵글로-페르시안 오일 컴퍼니(후에 BP)가 이란 석유 개발을 독점했고, 이라크에서는 터키석유회사(후에 이라크석유회사)가 활동했다. 영국은 위임통치권을 이용해 석유 개발에 유리한 조건을 확보했다.

미국도 중동 석유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스탠더드 오일이 이라크석유회사에 참여하면서 미국의 중동 진출이 시작되었다. 이는 이후 영미 간 경쟁과 협력의 배경이 되었다.

석유 수익의 대부분은 서구 기업들이 가져갔고, 현지 정부는 소액의 로열티만 받았다. 이는 경제적 종속 관계를 만들어냈고,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반감을 샀다.

팔레스타인 갈등의 심화

1920년대 들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이민이 본격화되면서 아랍인들과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유대인들은 헤브루 대학 설립, 키부츠 건설 등을 통해 실질적인 정착 기반을 구축했다. 하지만 이는 아랍인들의 경제적 지위를 위협했다.

1921년 야파 폭동, 1929년 예루살렘 폭동 등 대규모 유혈 충돌이 반복되었다. 영국은 유대인 이민 제한과 토지 매매 규제를 통해 아랍인들을 달래려 했지만, 근본적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아랍인들은 아민 후세이니를 중심으로 반유대, 반영 투쟁을 조직했다. 1936-1939년 아랍 대반란은 영국 통치에 심각한 도전이 되었다. 영국은 대규모 군사력을 동원해 진압했지만, 팔레스타인 갈등의 해결 불가능성이 드러났다.

백서 정책(1939)에서 영국은 유대인 이민을 대폭 제한하고 10년 후 팔레스타인 독립을 약속했다. 하지만 이는 유대인들의 강력한 반발을 샀고, 곧 2차 대전이 시작되면서 실행되지 못했다.

위임통치령의 한계와 저항

영국과 프랑스의 위임통치는 처음부터 정당성 문제에 시달렸다. 현지 주민들의 동의 없이 강요된 지배 체제였고, 독립 약속도 구체적 이행 계획이 없었다. 각지에서 저항 운동이 일어났다.

이라크에서는 1920년 대봉기가 일어나 영국군 1만여 명이 사상을 당했다. 시리아에서도 1925-1927년 드루즈족 봉기가 프랑스 지배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이집트에서는 1919년 혁명으로 영국이 보호령 지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경제적으로도 위임통치는 종속 관계를 만들어냈다. 원자재는 서구로 수출하고 공산품은 수입하는 구조가 고착화되었다. 교육과 행정 분야에서도 서구 방식이 강요되면서 전통 문화가 위축되었다.

하지만 위임통치 체제는 의도치 않게 민족 의식을 각성시키는 역할도 했다. 근대 교육을 받은 지식인층이 성장했고, 이들이 독립 운동의 중추가 되었다. 또한 인위적으로 그어진 국경선이 점차 국가 정체성의 기반이 되기도 했다.

결론

사이크스-피코 협정으로 시작된 중동 분할은 20세기 중동사의 출발점이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어놓은 국경선과 정치 체제는 현재까지도 중동 갈등의 근원이 되고 있다. 아랍인들의 독립 열망, 유대인들의 정착 요구, 쿠르드족의 자치 희망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해결 불가능한 갈등 구조가 만들어졌다.

위임통치령 체제는 전통적 식민주의와 달리 문명화 사명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였다. 현지 주민들의 의사를 무시한 채 서구 열강의 이익만을 고려한 정책은 필연적으로 저항과 갈등을 야기했다.

특히 팔레스타인 문제는 벨푸어 선언에서 시작되어 현재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영국이 아랍인과 유대인에게 동시에 상충하는 약속을 한 것이 갈등의 출발점이 되었다. 석유 자원의 발견은 서구 열강의 개입을 더욱 심화시켰고, 경제적 종속 관계를 고착화시켰다.

사이크스-피코 협정은 중동 지역에 근대 국가 체제를 이식했지만, 동시에 인위적 국경선과 정치 구조로 인한 불안정을 심어놓았다. 영국의 중동 정책은 제국의 이익 추구와 현지 민족주의 사이의 딜레마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되었다. 1차 대전 후 중동 분할의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이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가로막는 장벽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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