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8월, 유럽을 뒤덮은 전쟁의 광기는 '크리스마스까지는 끝날 것'이라는 낙관론을 철저히 배신했다. 대신 서부전선에는 벨기에에서 스위스 국경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참호선이 구축되었고, 영국군은 프랑스 땅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소모전에 휘말리게 되었다. 솜 강과 이프르에서 벌어진 혈투는 단순한 군사작전을 넘어, 영국 사회 전체를 전쟁 기계로 변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참호전의 시작과 서부전선 교착
독일의 슐리펜 계획이 실패하면서 서부전선은 빠르게 교착 상태에 빠졌다. 1914년 11월부터 양군은 북해에서 스위스까지 700킬로미터에 걸친 참호선을 구축했다. 기관총과 철조망, 포병의 위력이 증명되면서 기존의 기동전은 불가능해졌고, 대신 지리한 소모전이 시작되었다.
영국 원정군(BEF)은 초기에는 소규모였지만,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급속히 확대되었다. 정규군과 영토군, 그리고 새로 창설된 키치너 군단이 차례로 프랑스에 투입되었다. 키치너 육군장관의 "당신의 조국이 당신을 필요로 한다"는 모병 포스터는 수십만 명의 자원병을 끌어모았고, 이들은 곧 서부전선의 지옥 같은 현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참호전의 일상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었다. 진흙과 물에 잠긴 참호에서 병사들은 쥐와 이가 들끓는 환경을 견뎌야 했다. '참호족'이라 불리는 감염병과 포탄 쇼크, 그리고 끝없는 포격의 공포는 병사들의 정신을 갉아먹었다. 무인지대를 사이에 두고 대치한 양군은 저격수의 위협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나갔다.
솜 강 대전투 - 영국군 최악의 하루
1916년 7월 1일, 솜 강에서 벌어진 대공세는 영국 군사사상 가장 비극적인 날로 기록되었다. 더글러스 헤이그 사령관은 일주일간의 포격으로 독일군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독일군의 깊은 지하 벙커는 포격을 견뎌냈고, 철조망도 제대로 파괴되지 않았다.
공격 첫날 영국군은 6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 중 2만 명이 전사했는데, 이는 단일 전투에서 영국군이 입은 최대 피해였다. 키치너 군단의 젊은 자원병들이 대거 희생되면서, 영국 전역에 비탄의 소식이 전해졌다. 특히 '팰스 대대(Pals Battalions)'라 불리는 같은 지역 출신 부대들이 몰살당하면서, 어떤 마을에서는 한 세대의 남성이 통째로 사라지는 참극이 벌어졌다.
솜 강 전투는 11월까지 계속되었지만, 영국군이 얻은 것은 고작 몇 킬로미터의 땅뿐이었다. 총 100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이 중 42만 명이 영국군이었다. 헤이그는 독일군도 큰 피해를 입었다며 전략적 승리를 주장했지만, 영국 국민들에게는 무능한 지휘부에 대한 분노만 남겼다.
이프르 전투와 독가스의 공포
벨기에의 이프르는 영국군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곳이었다. 1914년 제1차 이프르 전투에서 영국 정규군의 정예부대가 거의 전멸했지만, 독일군의 해안 진출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곳은 독일군 점령지 한복판에 튀어나온 돌출부로, 영국군에게는 전략적 요충지이면서 동시에 끊임없는 공격 목표였다.
1915년 4월 22일, 제2차 이프르 전투에서 독일군은 인류 최초로 독가스를 사용했다. 염소가스가 바람을 타고 퍼지자 프랑스군과 캐나다군 진지에서 황록색 구름이 피어올랐다. 가스에 노출된 병사들은 질식하며 고통스럽게 죽어갔고, 살아남은 자들도 평생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독가스의 등장은 전쟁의 성격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초기에는 방독면도 없어 젖은 헝겊으로 입과 코를 막는 것이 전부였지만, 곧 정교한 방독면과 화학 방어 장비가 개발되었다. 영국도 독일의 독가스 공격에 보복하기 시작했고, 화학전은 서부전선의 일상이 되었다. 윌프레드 오언의 시 '돌체 에트 데코룸 에스트'는 독가스로 죽어가는 병사의 참상을 생생히 묘사하며, 전쟁의 명예로운 죽음이라는 신화를 완전히 파괴했다.
1917년 제3차 이프르 전투(파스샨델 전투)는 더욱 참혹했다. 4개월간 계속된 전투에서 영국군은 32만 5천 명의 사상자를 내고도 고작 8킬로미터를 전진하는 데 그쳤다. 끝없는 비로 전장은 진흙탕이 되었고, 부상병들은 포탄구덩이에서 익사하기도 했다. 이 전투는 헤이그의 무능함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새로운 전술과 기술의 등장
참호전의 교착을 깨기 위해 다양한 새로운 전술과 무기가 도입되었다. 1916년 플레르스-쿠르셀렛 전투에서 영국군은 세계 최초로 탱크를 실전에 투입했다. 마크 I 탱크는 기술적 결함이 많았지만, 독일군에게 심리적 충격을 주었고 참호전 돌파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탱크는 '육상 전함'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했다. 윈스턴 처칠이 해군부 장관 시절 추진한 이 프로젝트는 기관총과 철조망을 돌파할 수 있는 새로운 무기 체계였다. 초기 탱크는 속도가 느리고 고장이 잦았지만, 전쟁 후반기에는 크게 개선되어 1918년 독일군 방어선 돌파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항공전도 급속히 발전했다. 초기에는 정찰용으로만 사용되던 항공기가 점차 전투기로 발전했고, 공중전이 일상화되었다. 영국 공군은 1918년 독립된 군종으로 창설되었는데, 이는 세계 최초의 독립 공군이었다. 에이스 파일럿들의 활약은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었지만, 평균 수명이 몇 주에 불과할 정도로 위험한 임무였다.
포병도 혁신적으로 발전했다. 정확한 사격을 위한 음향측정과 항공관측이 도입되었고, 유탄포와 박격포 같은 새로운 화기가 참호전에 특화되어 개발되었다. 크립 포격(Creeping Barrage)과 같은 새로운 전술도 등장하여, 보병의 공격을 포병이 엄호하는 협동작전이 체계화되었다.
총동원 체제의 구축
서부전선의 지리한 소모전을 지탱하기 위해 영국은 전례 없는 총동원 체제를 구축했다. 1916년 징병제가 도입되면서 모든 성인 남성이 전쟁 의무를 지게 되었다. 이는 전통적으로 자원병제를 유지해온 영국에게는 혁명적 변화였다.
군수산업이 급속히 확장되면서 '포탄 부족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대대적인 생산 체제가 구축되었다. 로이드 조지 군수장관(후에 총리)은 민간 기업들을 전쟁 생산에 총동원시켰고, 국가가 직접 군수공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기존 공장들은 민수품 생산을 중단하고 무기와 탄약 생산으로 전환했다.
여성들의 역할도 극적으로 변화했다. 남성들이 전선으로 떠나면서 여성들이 공장과 농장, 사무실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머니션 걸스(Munition Girls)'라 불리는 군수공장 여성 노동자들은 위험한 화약 작업을 담당했고, 이들 중 상당수가 화학물질 중독으로 피부가 노래져 '카나리아 걸스'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정부는 전쟁 경제를 관리하기 위해 강력한 통제 권한을 확보했다. 1915년 군수법(Munitions Act)은 노동 분쟁을 금지하고 핵심 산업 노동자들의 이직을 제한했다. 주류 판매 시간 단축, 일광절약시간제 도입, 식료품 배급제 등 시민생활 전반에 국가 개입이 확대되었다.
전쟁 금융과 경제적 부담
1차 대전의 막대한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영국은 전례 없는 재정 정책을 펼쳤다. 전쟁 공채 발행을 통해 국민들로부터 자금을 조달했고, "당신의 돈이 총탄이 된다"는 슬로건으로 애국심에 호소했다. 소액 투자자들을 위한 전쟁 저축증서도 발행되어 일반 시민들까지 전쟁 자금 조달에 참여했다.
세제 개혁도 단행되었다. 소득세율이 대폭 인상되었고, 초과이익세가 신설되어 전쟁으로 이익을 얻는 기업들로부터 세수를 확보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쟁 비용을 모두 충당할 수는 없었고, 영국은 미국으로부터 대규모 차관을 도입해야 했다.
전쟁 초기 세계 최대 채권국이었던 영국은 전쟁이 끝날 무렵 미국에 막대한 빚을 진 채무국으로 전락했다. 해외 투자 자산을 대거 매각해야 했고, 금본위제 유지도 어려워졌다. 이는 전후 영국 경제의 구조적 취약성으로 이어졌고, 대영제국 쇠퇴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사회 변화와 계급 갈등
전쟁은 영국 사회의 계급 구조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전선에서는 출신 배경에 관계없이 동등하게 죽음의 위험에 노출되었지만, 장교와 사병 간의 계급적 차별은 여전했다. 공립학교 출신 장교들의 높은 전사율은 기존 지배층에 큰 타격을 주었다.
노동계급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향상되었다. 전쟁 생산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숙련 노동자들의 임금이 크게 오르고, 노동조합의 영향력도 강화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전시 통제로 인해 노동자들의 권리가 제약되기도 했다. 클라이드사이드 지역의 렌트 스트라이크나 1917년 파업 등 노동 분쟁이 빈발했다.
중산층도 전쟁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인플레이션으로 고정소득층의 실질소득이 감소했고, 전통적인 생활 방식이 크게 흔들렸다. 하인들이 군수공장으로 떠나면서 중산층 가정의 일상생활도 변화를 겪었다. 전쟁은 기존의 사회 질서를 뒤흔들고 새로운 변화의 동력을 제공했다.
전쟁의 정신적 상처
서부전선의 참혹한 경험은 영국 사회에 깊은 정신적 상처를 남겼다. '포탄 쇼크(Shell Shock)'라 불리는 전쟁 신경증 환자들이 대량으로 발생했지만, 당시에는 이를 비겁함이나 의지 박약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수많은 참전군인들이 평생 악몽과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했다.
전쟁 문학과 예술도 크게 변화했다. 윌프레드 오언, 지그프리드 사순 같은 전쟁 시인들은 전장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전쟁의 영광스러운 이미지를 완전히 파괴했다. 이들의 작품은 전쟁에 대한 기존의 낭만적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다.
종교계도 큰 충격을 받았다. 기독교 국가들끼리 벌이는 살육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많은 신학자들을 고민에 빠뜨렸다. 전쟁으로 인한 대규모 사망은 신에 대한 믿음 자체를 흔들었고, 전후 세속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계기가 되었다.
1918년 대반격과 승리
1918년 봄, 독일군은 러시아 혁명으로 동부전선이 소멸되자 서부전선에 모든 병력을 집중하여 마지막 대공세를 펼쳤다. 루덴도르프 공세로 불리는 이 공격으로 독일군은 파리 근교까지 진격했지만, 미군의 본격적인 참전과 연합군의 통합 지휘체제 구축으로 저지되었다.
8월부터 시작된 연합군의 대반격에서 영국군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미앵 전투에서 캐나다군단과 호주-뉴질랜드 군단(ANZAC)이 독일군 방어선을 성공적으로 돌파했고, 이후 100일 공세를 통해 독일군을 빠르게 후퇴시켰다. 이 과정에서 탱크와 항공기, 포병의 협동작전이 완벽하게 구현되었다.
독일군의 사기가 급속히 무너지면서 항복이 줄을 이었다. 킬 군항에서 시작된 수병 반란이 독일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카이저 빌헬름 2세가 퇴위하면서 독일은 공화국이 되었다. 1918년 11월 11일 오전 11시, 마침내 휴전협정이 발효되었다.
결론
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에서의 경험은 영국 역사의 분수령이 되었다. 솜 강과 이프르에서 벌어진 참혹한 소모전은 전쟁에 대한 기존 관념을 완전히 바꾸어놓았고, 영국 사회 전체를 뒤흔들었다. 총동원 체제의 구축은 국가의 역할을 크게 확대시켰고, 여성의 사회 진출과 노동계급의 지위 향상을 가져왔다.
전쟁의 대가는 너무도 컸다. 74만 명의 영국인이 전사했고, 더 많은 수가 부상을 당했다. 경제적으로도 영국은 세계 최대 채권국에서 채무국으로 전락했고, 대영제국의 쇠퇴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영국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가치를 지켜내었고, 파시즘의 도전에 맞서는 경험을 축적했다. 서부전선의 진흙탕 속에서 근대 영국의 새로운 모습이 탄생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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