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 유럽은 거대한 화약고와 같았다. 산업혁명의 성과를 바탕으로 급성장한 독일이 기존 질서에 도전하면서, 영국은 자신의 패권을 지키기 위한 새로운 전략을 모색해야 했다. 바로 삼국협상(Triple Entente)이라는 외교적 연합체 구축이었다. 프랑스, 러시아와 손을 잡은 영국의 선택은 단순한 동맹이 아니라 다가오는 세계대전의 운명을 결정짓는 역사적 분기점이 되었다.
독일의 부상과 영국의 위기감
19세기 말 독일의 급속한 성장은 영국에게 전례 없는 위협이었다. 1871년 통일을 이룬 독일은 강력한 육군력을 바탕으로 유럽 대륙의 패권을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해군력 증강을 통해 영국의 절대적 우위를 흔들기 시작했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추진한 '세계정책(Weltpolitik)'은 식민지 확장과 해군 건설을 통해 영국과 정면 대결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드러냈다.
특히 독일의 함대법(Fleet Act)은 영국에게 직접적인 충격을 안겼다. 1898년과 1900년에 제정된 이 법은 독일이 체계적으로 해군력을 증강하여 영국 해군에 맞서겠다는 의도를 명확히 했다. 드레드노트급 전함의 건조 경쟁이 시작되면서, 영국은 '두 강국 기준(Two-Power Standard)'을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군비를 투입해야 했다.
동시에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와 삼국동맹(Triple Alliance)을 결성하여 유럽 대륙에서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는 영국이 전통적으로 추구해던 '영광스러운 고립(Splendid Isolation)' 정책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만들었다. 유럽 대륙의 균형이 독일에게 유리하게 기울어지면서, 영국은 능동적인 동맹 정책으로의 전환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불협상 - 숙적에서 동맹으로
영국의 첫 번째 선택은 전통적인 숙적이었던 프랑스와의 화해였다. 1904년 체결된 영불협상(Entente Cordiale)은 두 나라의 식민지 분쟁을 해결하는 동시에 독일 견제를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이 협정에서 영국은 프랑스의 모로코 지배권을 인정하는 대신, 프랑스는 영국의 이집트 지배를 승인했다.
표면적으로는 식민지 문제를 다룬 협정이었지만, 실제로는 독일 포위망의 첫 번째 고리였다. 두 나라는 독일의 도전에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한 외교적 협력 체제를 구축했고, 이는 이후 군사적 협력으로까지 발전했다. 프랑스 외무장관 델카세와 영국 외무장관 랜스다운의 정교한 외교술은 수백 년간 이어진 영불 갈등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협력의 시대를 열었다.
영불협상의 진정한 의미는 1905년 제1차 모로코 위기에서 드러났다. 독일이 프랑스의 모로코 정책에 개입하며 압박을 가하자, 영국은 프랑스를 적극 지지했다. 이는 단순한 외교적 지지를 넘어 실질적인 군사적 협력을 포함했다. 영국 해군과 프랑스 해군 간의 비밀 협상이 시작되었고, 독일의 위협에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들이 수립되었다.
영러협상과 포위망 완성
영국의 두 번째 중요한 선택은 러시아와의 화해였다. 1907년 영러협상(Anglo-Russian Convention)은 19세기 내내 지속된 '거대한 게임(Great Game)'을 종료시키고, 중앙아시아에서의 세력 분할을 확정했다. 이 협정으로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의 영향권으로, 외몽골과 북페르시아는 러시아의 영향권으로 인정되었으며, 티베트는 중립 지역으로 설정되었다.
영러협상은 영국에게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러시아의 남진 정책이 인도 제국을 위협한다고 여겨왔던 영국으로서는, 이 협정을 통해 인도 방어선을 안정화할 수 있었다. 동시에 유럽에서 독일 견제를 위한 동방 파트너를 확보한 것이었다.
러시아 역시 1904-1905년 러일전쟁 패배와 1905년 혁명 이후 극동에서의 영향력이 약화된 상황에서, 서방으로의 전략적 회귀를 필요로 했다. 특히 발칸반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경쟁이 격화되면서, 서유럽 강국들과의 협력이 절실했다. 영러협상은 이러한 양국의 전략적 필요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삼국협상 체제의 특징과 한계
프랑스, 러시아, 영국으로 구성된 삼국협상은 독일의 삼국동맹에 대응하는 균형 세력으로 기능했다. 하지만 이는 공식적인 군사동맹이 아니라 '우호적 이해(entente)'에 기반한 느슨한 협력 체제였다. 각국은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면서도, 독일의 위협에 대해서는 공동으로 대응한다는 암묵적 합의를 유지했다.
영국의 경우 전통적인 대륙 균형 정책의 연장선에서 삼국협상에 참여했다. 어느 한 국가가 유럽을 지배하는 것을 막겠다는 기본 원칙 하에, 독일의 패권 도전을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와 러시아와 손을 잡았다. 하지만 영국은 여전히 대륙 문제에 깊이 개입하는 것을 꺼려했고, 구체적인 군사적 의무는 최소화하려 했다.
프랑스는 1870년 보불전쟁 패배 이후 독일에 대한 복수심과 알자스-로렌 수복 의지를 바탕으로 적극적인 반독 연합을 추진했다. 러시아와의 동맹(1894)에 이어 영국과의 협상까지 성사시키면서, 독일을 동서로 포위하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프랑스에게 삼국협상은 단순한 방어적 연합이 아니라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한 공세적 도구였다.
러시아는 범슬라브주의를 바탕으로 발칸반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와 갈등을 빚고 있었다. 특히 1908년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병합은 러시아의 분노를 샀고,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지지하면서 러시아의 반독 감정은 더욱 격화되었다. 삼국협상은 러시아에게 발칸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서방의 지지 기반을 제공했다.
군비 경쟁과 긴장 고조
삼국협상 체제 하에서 유럽의 군비 경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영독 간의 해군 건조 경쟁은 양국 관계를 결정적으로 악화시켰다. 1906년 영국이 혁신적인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진수하자, 독일도 즉시 동급의 전함 건조에 착수했다. 이로 인해 기존의 모든 전함이 구식이 되었고, 새로운 차원의 해군 경쟁이 시작되었다.
영국 해군성은 '우리에게는 필수이지만 독일에게는 사치'라는 논리로 해군 증강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섬나라인 영국에게 해군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지만, 대륙 국가인 독일에게는 불필요한 도전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독일은 '세계 강국'이 되기 위해서는 해군력이 필수라고 반박하며 건조 계획을 멈추지 않았다.
육상에서도 군비 경쟁은 치열했다. 프랑스와 독일은 각각 3년 의무병역제를 도입하여 상비군을 확대했고, 러시아도 군 현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이러한 군비 증강은 각국의 재정에 심각한 부담을 주었지만, 어느 국가도 먼저 군축에 나설 수 없었다. 안보 딜레마가 전 유럽을 지배하면서, 평화는 점점 더 불안정해졌다.
발칸반도의 화약고
삼국협상 체제에서 가장 위험한 화약고는 발칸반도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의 세력 경쟁이 치열했던 이 지역은 범슬라브주의와 범게르만주의가 정면 충돌하는 무대였다. 1908년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병합, 1912-1913년 발칸전쟁을 통해 긴장은 계속 고조되었다.
세르비아는 남슬라브족 통합이라는 목표 하에 오스트리아-헝가리 내 슬라브족들의 독립을 지원했다. 이는 다민족 제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정교회와 슬라브족의 '형님' 역할을 자처하며 세르비아를 지원했고, 독일은 동맹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뒷받침했다.
프랑스와 영국도 이 복잡한 발칸 정세에 깊이 개입했다. 프랑스는 러시아와의 동맹 관계상 슬라브족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고, 영국은 오스만 제국의 몰락 과정에서 러시아의 지중해 진출을 견제하면서도 독일의 중동 진출은 더욱 경계했다. 발칸반도는 이렇게 모든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얽힌 위험한 지역이 되었다.
위기 관리와 평화 노력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도 전쟁을 피하려는 노력들이 있었다. 1899년과 1907년 헤이그 평화회의는 국제법 체계를 정비하고 분쟁의 평화적 해결 방안을 모색했다. 또한 각종 위기 상황에서 외교적 해결을 통해 전면전을 피할 수 있었다. 1905년과 1911년 모로코 위기, 1908년 보스니아 위기, 1912-1913년 발칸전쟁 등이 그 예다.
영국의 외무장관 에드워드 그레이는 균형 외교를 통해 평화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독일과의 식민지 협상을 통해 긴장을 완화하려 했고, 발칸 문제에서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사이의 중재 역할을 자처했다. 하지만 동시에 독일의 위협에 대비한 군사적 준비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독일 역시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카이저 빌헬름 2세는 종종 호전적 발언을 했지만, 실제로는 평화적 해결을 선호했다. 독일의 목표는 전쟁이 아니라 '햇볕 아래 자리'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독일의 급속한 성장과 공세적 외교는 다른 강대국들에게 위협으로 인식되었고, 이는 독일을 더욱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전쟁 전야의 최종 국면
1914년 초 유럽의 상황은 극도로 불안정했다. 각국의 군비는 사상 최고 수준에 달했고, 동맹 체제는 경직되어 있었다. 작은 분쟁이라도 전 유럽을 전쟁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구조가 완성되어 있었다. 삼국협상과 삼국동맹은 서로를 견제하면서도, 동시에 전쟁 위험을 증대시키는 양날의 검이었다.
영국은 여전히 대륙 전쟁에 자동으로 개입할 의무는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독일이 벨기에를 침공할 경우 개입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분명했다. 1839년 런던 조약에 따라 벨기에 중립을 보장해야 했고, 더 중요하게는 독일이 프랑스를 완전히 제압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 유럽 균형이 완전히 깨지면 영국의 안보도 위험해질 것이었다.
프랑스는 독일과의 전쟁 가능성에 대비해 구체적인 군사 계획을 수립했다. 플랑 XVII은 알자스-로렌으로의 공세작전을 통해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었다. 러시아와의 군사 협력도 강화되어, 독일을 동서양면에서 압박하는 전략이 확정되었다.
러시아는 발칸반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대결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범슬라브주의라는 이념적 명분과 발칸 지역에서의 실질적 이익이 결합되면서, 러시아는 세르비아 지지를 통해 남하 정책을 계속 추진했다.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및 독일과의 충돌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결론
삼국협상은 20세기 초 유럽 정치의 핵심축이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세 나라의 협력은 독일의 도전에 맞서 기존 질서를 지키려는 시도였지만, 동시에 유럽을 두 개의 적대적 진영으로 분할하여 전쟁 위험을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영국이 전통적인 고립 정책을 포기하고 대륙 동맹에 참여한 것은 독일의 위협이 그만큼 심각했음을 보여준다.
삼국협상 체제는 표면적으로는 평화를 유지했지만, 실제로는 군비 경쟁을 가속화하고 외교적 경직성을 심화시켰다. 각국이 동맹 의무에 얽매이면서 유연한 대응이 어려워졌고, 작은 분쟁도 전면전으로 확산될 위험이 커졌다. 1914년 사라예보에서 벌어진 한 발의 총성이 전 유럽을 전쟁으로 끌어들인 것은 바로 이러한 경직된 동맹 체제의 결과였다. 삼국협상은 영국 외교사에서 고립에서 개입으로의 전환점이었으며, 동시에 대영제국이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시련에 직면하게 된 출발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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