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영국 역사 54. 아일랜드 홈룰과 민족주의 - 글래드스턴·파넬의 자치 법안과 상원의 저지

SSSCH 2025. 5. 24.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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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 영국 정치에서 가장 뜨거운 쟁점 중 하나는 아일랜드 자치 문제였다. 수백 년간 영국의 지배를 받아온 아일랜드에서는 자치권을 요구하는 홈룰 운동이 거센 물결을 이루며 전개되었다. 특히 윌리엄 글래드스턴 총리와 찰스 스튜어트 파넬의 협력으로 추진된 홈룰 법안들은 영국 정치사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들은 상원의 완강한 저지에 부딪혀 좌절되었고, 이는 아일랜드 민족주의를 더욱 급진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아일랜드 문제의 역사적 배경

아일랜드와 영국의 갈등은 수세기에 걸친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12세기 앵글로-노르만족의 침입 이후 아일랜드는 점진적으로 영국의 지배 하에 들어갔고, 16-17세기 종교개혁 시기에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종교적 갈등이 정치적 대립과 결합되었다. 1800년 연합법으로 아일랜드 의회가 해산되고 웨스트민스터 의회에 통합된 후, 아일랜드는 직접적인 영국 통치를 받게 되었다.

19세기 아일랜드 사회는 심각한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대부분의 토지는 앵글로-아이리시 지주들이 소유하고 있었고, 아일랜드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살아가야 했다. 지주들은 대부분 프로테스탄트였고 런던에 거주하면서 아일랜드 땅에서 나오는 지대만 받아가는 부재지주가 많았다. 반면 농민들은 대부분 가톨릭 신자로, 종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이중의 차별을 받았다.

1845-1849년 대기근은 아일랜드 사회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감자 역병으로 인한 흉작이 계속되면서 약 100만 명이 굶어 죽고, 또 다른 100만 명이 미국과 다른 나라로 이주했다. 영국 정부의 구호 정책은 자유방임주의에 입각해 소극적이었고, 이는 아일랜드인들의 영국에 대한 불신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대니얼 오코넬과 초기 민족주의 운동

19세기 초 아일랜드 민족주의 운동의 아버지라 불리는 대니얼 오코넬은 가톨릭 해방 운동을 통해 아일랜드 정치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1829년 가톨릭 해방법이 통과되면서 가톨릭 신자들도 의회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오코넬은 이후 연합 폐지(Repeal) 운동을 전개하며 1800년 연합법의 폐지를 요구했다.

오코넘은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수단을 통한 변화를 추구했다. 그는 대규모 집회를 조직하고 여론을 동원하여 압력을 가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1843년 클론타프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집회는 100만 명이 참석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영국 정부의 금지 명령에 따라 취소되었다. 오코넬은 폭력 사태를 우려해 집회 취소를 결정했지만, 이는 그의 정치적 영향력이 쇠퇴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코넬 사후 아일랜드 민족주의는 더욱 급진적인 방향으로 발전했다. 1858년 결성된 아이리시 공화당 형제단(IRB)은 무력을 통한 독립을 추구했고, 1867년 페니언 봉기를 일으켰다. 비록 이 봉기는 실패했지만, 아일랜드 민족주의가 단순한 자치를 넘어 완전한 독립을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아이작 버트와 홈룰 연맹 창설

1870년대 들어 아일랜드 정치에 새로운 흐름이 나타났다. 아이작 버트라는 프로테스탄트 변호사가 주도한 홈룰 운동이 바로 그것이었다. 버트는 완전한 독립보다는 연방제 형태의 자치를 추구했다. 1870년 홈 거버넌트 협회를 결성하고, 1873년에는 홈룰 연맹으로 발전시켰다.

홈룰의 기본 개념은 아일랜드가 내정에 관해서는 자체 의회를 가지고 자치권을 행사하되, 외교와 국방, 통화 등은 여전히 영국 의회의 관할 하에 두자는 것이었다. 이는 캐나다나 호주 같은 자치령의 지위와 유사한 것으로, 완전한 독립과 현상유지 사이의 절충안이었다.

버트의 접근법은 매우 온건하고 신사적이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의회에서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 홈룰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러한 온건한 접근법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영국 정치인들은 아일랜드 자치 요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찰스 스튜어트 파넬의 등장과 새로운 전략

1875년 웨스트민스터 의회에 진출한 찰스 스튜어트 파넬은 아일랜드 정치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 파넬은 프로테스탄트 지주 가문 출신이었지만, 아일랜드 민족주의에 헌신했다. 그는 버트의 온건한 접근법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보다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전략을 구사했다.

파넬의 핵심 전략은 의회 내 방해 전술(obstruction)이었다. 아일랜드 의원들이 무관한 법안에 대해서도 장시간 연설을 하고 무수한 수정안을 제출하여 의회 진행을 마비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술은 영국 정치인들에게 아일랜드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의회 운영이 불가능하다는 압박감을 주었다.

1879년 파넬은 아일랜드 토지연맹을 결성하여 토지 개혁 운동을 전개했다. "토지를 농민에게"라는 슬로건 하에 지주에 대한 소작료 거부 운동과 보이콧 전술을 구사했다. 특히 찰스 보이콧 선장에 대한 집단 따돌림에서 "보이콧"이라는 용어가 탄생했다.

1882년 킬메인햄 조약을 통해 파넬은 글래드스턴 정부와 타협에 성공했다. 정부는 토지법을 개정하여 농민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파넬은 폭력적인 토지 운동을 중단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 파넬은 아일랜드 정치의 확실한 지도자로 자리잡았다.

글래드스턴의 아일랜드 정책 전환

윌리엄 글래드스턴은 처음에는 아일랜드 홈룰에 반대했다. 하지만 1885년 총선에서 아일랜드 의석 103석 중 86석을 홈룰당이 차지하는 것을 보고 생각을 바꾸었다. 아일랜드 민족주의가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글래드스턴의 홈룰 지지는 여러 동기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첫째, 정의감과 자유주의적 신념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아일랜드인들이 자신들의 일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둘째, 실용적 고려도 있었다. 홈룰당 의원들의 방해 전술로 의회 운영이 어려워지는 상황을 해결해야 했다. 셋째, 정치적 계산도 작용했다. 홈룰당과의 연합을 통해 보수당에 맞설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1885년 12월 글래드스턴이 홈룰을 지지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영국 정치계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이는 "호크스든 카이트(Hawarden Kite)"라고 불리는 사건으로, 글래드스턴의 아들이 아버지의 의견을 언론에 흘린 것이었다. 이로 인해 자유당 내부에서도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제1차 홈룰 법안(1886)의 추진과 좌절

1886년 2월 글래드스턴이 다시 총리가 된 후, 그는 즉시 홈룰 법안 준비에 착수했다. 4월 8일 하원에서 제1차 홈룰 법안이 발표되었다. 이 법안의 핵심 내용은 아일랜드에 자체 의회와 정부를 설치하고, 내정에 관한 권한을 이양한다는 것이었다.

법안에 따르면 아일랜드 의회는 더블린에 설치되고, 103명의 의원으로 구성될 예정이었다. 아일랜드 의회는 교육, 보건, 농업, 지방 정부 등에 관한 권한을 가지지만, 외교, 국방, 통화, 관세 등은 여전히 웨스트민스터 의회가 관할하도록 되어 있었다. 또한 아일랜드는 영국 의회에 더 이상 의원을 보내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이 법안은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보수당은 물론 자유당 내에서도 강한 반발이 일어났다. 조셉 체임벌린을 비롯한 자유통합주의자들은 홈룰이 영국 제국의 해체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하며 반대했다. 특히 "아일랜드에 홈룰을 주면 다음에는 인도가 요구할 것"이라는 우려가 컸다.

아일랜드 내에서도 반대 세력이 있었다. 얼스터 지방의 프로테스탄트들은 가톨릭이 다수인 아일랜드 의회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을 강력히 거부했다. 그들은 "로마의 지배(Rome Rule)"를 받느니 차라리 현상을 유지하겠다고 주장했다.

6월 7일 하원 표결에서 홈룰 법안은 343표 대 313표로 부결되었다. 자유당 의원 93명이 반대표를 던진 것이 결정적이었다. 글래드스턴은 즉시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했지만, 보수당과 자유통합주의자 연합이 승리했다. 이로써 제1차 홈룰 법안은 완전히 무산되었다.

자유당의 분열과 정치 재편

홈룰 문제로 인한 자유당의 분열은 영국 정치사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조셉 체임벌린이 이끄는 자유통합주의자들은 자유당을 탈당하여 보수당과 연합했다. 이들은 자유제국주의(Liberal Imperialism)를 표방하며 제국의 통합과 강화를 주장했다.

체임벌린은 홈룰을 "영국 제국에 대한 배신"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아일랜드에 자치를 허용하면 다른 식민지들도 비슷한 요구를 할 것이고, 결국 대영제국이 분해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한 홈룰이 실현되면 아일랜드가 독립으로 나아갈 것이고, 이는 영국의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글래드스턴을 따르는 자유당 주류는 홈룰을 자유주의 원칙의 당연한 결과로 여겼다. 그들은 아일랜드인들이 자치를 원한다면 이를 허용하는 것이 자유주의적 정의에 부합한다고 믿었다. 또한 홈룰이 실현되면 아일랜드인들이 영국에 대한 감정이 좋아져서 오히려 제국의 결속이 강화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분열로 인해 자유당은 1886년부터 1892년까지 야당 신세를 면치 못했다. 보수당과 자유통합주의자 연합은 솔즈베리 경의 지도 하에 안정적인 집권을 계속했다. 이 시기 영국 정치는 홈룰 찬반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2차 홈룰 법안(1893)의 시도와 상원의 벽

1892년 총선에서 자유당이 다시 승리하면서 글래드스턴은 네 번째로 총리가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83세였지만, 홈룰에 대한 열정은 여전했다. 1893년 2월 제2차 홈룰 법안이 의회에 제출되었다.

제2차 법안은 제1차 법안의 문제점들을 보완한 것이었다. 가장 큰 변화는 아일랜드가 웨스트민스터 의회에 계속 의원을 보내도록 한 것이었다. 다만 의석수는 103석에서 80석으로 줄어들었다. 또한 아일랜드 의회의 권한도 더 명확하게 규정했다.

하원에서의 논쟁은 치열했다. 보수당은 여전히 강력히 반대했고, 자유통합주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글래드스턴의 강력한 리더십과 아일랜드 의원들의 지지로 법안은 간신히 통과되었다. 9월 1일 하원 표결에서 347표 대 304표로 가결된 것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상원이었다. 상원은 압도적으로 보수적이었고, 홈룰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9월 8일 상원 표결에서 홈룰 법안은 419표 대 41표라는 압도적인 차이로 부결되었다. 찬성표를 던진 의원이 고작 41명에 불과할 정도로 상원의 반대는 완고했다.

이로써 제2차 홈룰 법안도 무산되었다. 글래드스턴은 상원의 거부권을 비판하며 상원 개혁의 필요성을 제기했지만,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1894년 글래드스턴이 은퇴하면서 홈룰 운동은 또다시 좌절을 맛보았다.

파넬의 몰락과 아일랜드 정치의 분열

1889년 파넬의 정치적 몰락이 시작되었다. 윌리엄 오시어 대위의 이혼 소송에서 파넬이 제3자로 지목된 것이다. 파넬은 오시어의 아내 키티와 10년간 불륜 관계를 유지해왔고, 이는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 기준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파넬을 지지하던 글래드스턴도 여론의 압력에 못 이겨 파넬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아일랜드 가톨릭 교회도 파넬을 강력히 비난했다. 이로 인해 아일랜드 의회당(Irish Parliamentary Party)은 분열되었고, 파넬파와 반파넬파로 나뉘어 격렬하게 대립했다.

1891년 10월 파넬이 45세의 나이로 급사하면서 아일랜드 정치는 큰 혼란에 빠졌다. 파넬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으로 단결되어 있던 홈룰 운동은 여러 파벌로 분열되었고, 이는 홈룰 운동의 추진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존 레드먼드가 1900년 아일랜드 의회당을 재통합했지만, 파넬 시대의 영향력을 회복하지는 못했다. 또한 이 시기 아일랜드에서는 게일어 부흥 운동과 같은 문화적 민족주의가 대두하기 시작했고, 일부에서는 물리적 무력주의(Physical Force)를 지향하는 급진적 민족주의도 부상하기 시작했다.

제3차 홈룰 법안과 의회법 개혁

20세기에 들어와 홈룰 문제는 다시 영국 정치의 중심 무대로 돌아왔다. 1910년 1월과 12월 두 차례 총선을 통해 자유당이 집권했지만, 보수당과는 근소한 차이였다. 이로 인해 아일랜드 의회당이 캐스팅보트를 쥐게 되었고, 이들은 홈룰 법안을 조건으로 자유당을 지지했다.

하지만 상원의 거부권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아스퀴스 자유당 정부는 1911년 의회법(Parliament Act)을 통과시켰다. 이 법에 따라 상원은 하원이 통과시킨 법안을 최대 2년간 지연시킬 수 있을 뿐, 영구적으로 거부할 수는 없게 되었다.

1912년 4월 아스퀴스 총리는 제3차 홈룰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이 법안은 이전 법안들보다 더 포괄적이었고, 아일랜드 의회의 권한도 더 광범위했다. 하지만 여전히 외교, 국방, 관세 등은 웨스트민스터 의회의 관할로 남겨두었다.

얼스터의 저항과 무장 위기

홈룰 법안이 현실화되자 얼스터 지방의 프로테스탄트들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에드워드 카슨과 제임스 크레이그이 이끄는 얼스터 연합주의자들은 "얼스터는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Ulster will fight and Ulster will be right)"는 슬로건을 내걸고 저항 운동을 전개했다.

1912년 9월 28일 벨파스트에서 "얼스터 서약(Ulster Covenant)"이 체결되었다. 약 45만 명의 남성과 23만 명의 여성이 서명한 이 서약서는 홈룰에 맞서 "모든 필요한 수단"을 동원해 저항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일부는 자신의 피로 서명하기도 했을 정도로 결의가 강했다.

1913년 1월 얼스터 의용군(Ulster Volunteer Force)이 결성되었다. 이들은 독일에서 무기를 수입하여 무장했고, 홈룰이 실시되면 무력으로 저항하겠다고 공언했다. 영국 육군의 일부 장교들도 얼스터에 대한 무력 사용을 거부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이에 대응해 남부 아일랜드에서도 1913년 11월 아일랜드 의용군(Irish Volunteers)이 결성되었다. 이들은 홈룰을 확실히 실현시키고 얼스터의 저항에 맞서겠다고 선언했다. 1914년에는 두 무장 조직이 각각 10만 명 이상의 병력을 보유하게 되어 내전의 위기가 고조되었다.

1914년 홈룰법의 통과와 중단

의회법에 따라 제3차 홈룰 법안은 1912년, 1913년 하원을 통과했지만 상원에서 거부되었다. 1914년 5월 세 번째로 하원을 통과한 법안은 상원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자동으로 법률이 되었다. 9월 18일 조지 5세가 홈룰법에 서명함으로써 아일랜드 자치가 마침내 법적으로 확정되었다.

하지만 같은 날 정부는 홈룰법의 시행을 중단한다는 법안에도 서명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상황에서 아일랜드 내전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홈룰법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시행이 연기되었고, 그 사이에 얼스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로 했다.

존 레드먼드를 비롯한 온건한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은 이러한 결정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전쟁에서 영국을 지원하면 전쟁 후 홈룰이 확실히 실현될 것이라고 믿었다. 많은 아일랜드인들이 영국군에 자원입대했고, 아일랜드 의용군의 상당수도 전쟁 지원에 동참했다.

하지만 급진적 민족주의자들은 다른 생각이었다. 그들은 "영국의 어려움이 아일랜드의 기회"라는 옛 격언을 믿었고, 전쟁 중에 독립을 위한 봉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는 결국 1916년 이스터 봉기로 이어지게 되었다.

결론

아일랜드 홈룰 운동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 영국 정치의 핵심 쟁점이었다. 찰스 스튜어트 파넬과 윌리엄 글래드스턴의 협력으로 추진된 홈룰 법안들은 비록 상원의 저지와 정치적 반대에 부딪혀 즉시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아일랜드 민족주의 발전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홈룰 운동은 평화적이고 의회적 수단을 통한 민족 자치 달성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다. 파넬과 글래드스턴은 무력이 아닌 정치적 협상과 타협을 통해 아일랜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이는 후에 간디의 비폭력 저항 운동이나 다른 식민지의 평화적 독립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홈룰 운동의 좌절은 아일랜드 민족주의를 더욱 급진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상원의 완고한 저지와 얼스터 연합주의자들의 무력 저항은 온건한 의회적 수단으로는 아일랜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이는 결국 1916년 이스터 봉기와 이후 독립전쟁으로 이어지는 급진적 민족주의의 부상을 초래했다.

영국 정치에서 홈룰 문제는 자유당의 분열을 가져와 20세기 초 정치 지형을 바꾸어놓았다. 자유통합주의자들의 이탈로 자유당은 약화되었고, 이는 보수당의 장기 집권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상원의 거부권 문제가 부각되면서 1911년 의회법 개혁으로 이어지는 등 영국 헌정사에도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홈룰 운동은 또한 민족 자결주의와 민주주의 원칙 사이의 긴장을 보여주었다. 아일랜드 전체로는 홈룰이 다수의 지지를 받았지만, 얼스터 지방에서는 반대가 압도적이었다. 이는 민족주의와 종교적 정체성, 그리고 민주적 의사 결정이 어떻게 복잡하게 얽혀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결국 홈룰 운동의 경험은 아일랜드 독립 과정뿐만 아니라 20세기 탈식민화 과정 전반에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평화적 수단을 통한 민족 자치 달성의 가능성과 한계, 그리고 기존 지배 세력의 저항이 어떻게 급진적 민족주의를 촉발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역사적 사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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