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대영제국은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동시에 제국 유지에 따른 무거운 부담도 경험하기 시작했다. 특히 남아프리카에서 벌어진 보어전쟁은 영국에게 제국 경영의 현실적 한계를 깨닫게 해준 결정적 사건이었다. 광활한 영토와 수많은 식민지를 다스리는 것이 단순히 영광스러운 일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명확해졌고, 늘어나는 군사비와 행정비용은 영국 정부의 큰 고민거리가 되었다.
제국 확장의 정점과 그 대가
19세기 후반 영국 제국은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고 있었다. 인도 아대륙에서 캐나다, 호주에서 남아프리카까지, 지구상 육지 면적의 4분의 1이 영국의 지배 하에 있었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는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닐 정도로 영국의 영향력은 전 세계에 미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광대한 제국을 유지하는 데는 엄청난 비용이 들어갔다. 각 식민지에 총독부를 설치하고 행정관을 파견해야 했으며, 현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군대도 상주시켜야 했다. 또한 식민지 간을 연결하는 교통망과 통신망을 구축하고 유지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더 큰 문제는 식민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반란과 저항이었다. 인도에서는 1857년 세포이 항쟁이 일어났고,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지속적인 부족 저항이 이어졌다. 이집트와 수단에서도 마디 봉기 같은 대규모 반란이 발생했다. 이러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본국에서 대규모 원정군을 파견해야 했고, 이는 막대한 군사비 지출로 이어졌다.
영국 정부는 1870년대부터 국방비가 급격히 증가하는 것을 경험했다. 1870년 약 2,300만 파운드였던 국방비는 1900년에는 7,000만 파운드를 넘어섰다. 이는 같은 기간 전체 정부 예산에서 국방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30%에서 50% 이상으로 증가했음을 의미했다.
남아프리카의 복잡한 상황
남아프리카는 영국 제국주의 정책의 복잡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지역이었다. 이곳에는 네덜란드계 정착민인 보어인들이 건설한 트란스발 공화국과 오렌지 자유국이 있었고, 영국이 직접 통치하는 케이프 식민지와 나탈이 있었다. 여기에 줄루족, 코사족 등 아프리카 원주민들까지 더해져 매우 복잡한 민족적, 정치적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1886년 트란스발에서 세계 최대 규모의 금광이 발견되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위트워터스란드 금광지대는 전 세계 금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 이 금광을 둘러싸고 영국과 보어인들 사이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영국 자본가들과 광산업자들이 금광 개발을 위해 대거 몰려들었지만, 트란스발 정부는 이들을 외국인(우이틀란더)으로 분류해 정치적 권리를 제한했다. 세실 로즈를 비롯한 영국 자본가들은 이러한 차별에 불만을 품고 영국 정부에 개입을 요구했다.
세실 로즈는 케이프 식민지 총리이자 드비어스 다이아몬드 회사의 창업자로, 아프리카 대륙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영국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카이로에서 케이프타운까지" 영국의 철도와 전신선이 연결되는 것을 꿈꿨고, 이를 위해서는 보어 공화국들을 영국의 지배 하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보어전쟁의 발발과 전개
긴장이 고조되던 1899년 10월, 드디어 보어전쟁이 발발했다. 트란스발과 오렌지 자유국이 연합하여 영국에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영국은 초기에 이 전쟁을 쉽게 승리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보어인들의 총 인구는 20만 명 정도에 불과했고, 정규군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보어인들은 뛰어난 기마술과 사격 실력을 바탕으로 게릴라 전술을 구사했다. 그들은 영국군의 대규모 부대가 접근하면 흩어져서 도망가다가, 영국군이 분산되면 기습 공격을 가하는 전술을 반복했다. 광활한 벨트 평원에서 이러한 전술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전쟁 초기 영국군은 연이어 패배를 당했다. 1899년 12월 한 주 동안 영국군은 스톰베르크, 마거스폰테인, 콜렌소에서 연속으로 패배했다. 이를 "검은 주(Black Week)"라고 부를 정도로 영국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영국 정부는 서둘러 대규모 증원군을 파견했다. 로버츠 경과 키치너 경이 지휘하는 40만 명의 대군이 남아프리카로 향했다. 이는 당시 영국이 해외에 파견한 군대 중 최대 규모였다. 영국군은 압도적인 물량으로 보어군의 주요 거점들을 차례로 점령했고, 1900년 6월에는 트란스발의 수도 프리토리아를 함락시켰다.
하지만 전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보어인들은 산발적인 게릴라전을 계속했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영국군은 더욱 강경한 수단을 동원해야 했다. 키치너 장군은 보어인 가족들을 강제수용소에 집어넣고, 농장을 불태우는 초토화 작전을 펼쳤다. 이러한 강경책은 국제적으로 큰 비판을 받았다.
강제수용소와 인도주의적 위기
영국군이 실시한 강제수용소 정책은 보어전쟁의 가장 어두운 측면이었다. 게릴라전을 벌이는 보어군의 보급을 차단하기 위해 영국군은 보어인 가족들을 강제수용소에 수용했다. 약 12만 명의 보어인 여성과 어린이들이 이러한 수용소에 갇혔다.
수용소의 환경은 극도로 열악했다. 충분한 식량과 의료 지원이 제공되지 않았고, 위생 상태도 매우 나빴다. 이로 인해 질병이 만연했고, 특히 어린이들의 사망률이 매우 높았다. 전체 수용소 사망자는 2만 8천 명에 달했는데, 이 중 어린이가 2만 2천 명이었다.
이러한 참상이 알려지자 영국 내에서도 큰 논란이 일었다. 에밀리 홉하우스 같은 인권 운동가들이 수용소의 실상을 폭로했고, 자유당을 중심으로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집중수용소(concentration camp)"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된 것도 이때였다.
아프리카 원주민들도 전쟁의 피해자였다. 약 11만 명의 아프리카인들이 별도의 수용소에 갇혔고, 이들의 사망률은 보어인 수용소보다도 높았다. 하지만 당시 영국 사회는 아프리카인들의 피해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전쟁의 종료와 베레니힝 조약
3년간 지속된 전쟁은 1902년 5월 베레니힝 조약으로 끝났다. 보어 공화국들은 영국의 주권을 인정하고 무기를 내려놓았다. 대신 영국은 보어인들에게 자치권을 약속하고, 전후 복구를 위한 300만 파운드의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조약의 내용을 보면 영국이 군사적으로는 승리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상당한 양보를 했음을 알 수 있다. 보어어를 공용어로 인정했고, 보어인들이 자신들의 문화와 종교를 유지할 수 있도록 보장했다. 또한 아프리카 원주민의 참정권 문제는 나중에 자치정부가 결정하도록 미뤘는데, 이는 사실상 보어인들의 백인 우월주의 정책을 승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1910년 남아프리카 연방이 성립되면서 보어인들은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했다. 초대 총리 루이 보타와 2대 총리 얀 스뮤츠 모두 전직 보어군 장군이었다. 이는 영국이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정치적으로는 보어인들과 타협해야 했음을 보여준다.
전쟁의 비용과 영국에 미친 충격
보어전쟁이 영국에 미친 가장 큰 충격은 전쟁 비용이었다. 3년간 소요된 전쟁 비용은 약 2억 2천만 파운드에 달했다. 이는 당시 영국 정부 연간 예산의 3배가 넘는 천문학적 금액이었다.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영국 정부는 대규모 국채를 발행해야 했고, 이는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이 되었다.
인적 손실도 컸다. 영국군 전사자는 약 2만 2천 명이었는데, 이 중 전투에서 사망한 사람보다 질병으로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이는 영국군의 의료 체계와 보급 체계가 장기간의 해외 원정에 적합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더 큰 문제는 전쟁이 영국의 국제적 위상에 미친 타격이었다. 20만 명의 보어인을 상대로 40만 명의 대군을 동원하고도 3년이나 걸려 겨우 승리한 것은 영국군의 무능함을 전 세계에 드러낸 셈이었다. 특히 유럽 대륙의 열강들은 영국의 약점이 노출된 것으로 판단했다.
강제수용소 정책으로 인한 국제적 비판도 영국의 도덕적 권위에 타격을 입혔다. "문명화 사명"을 내세우며 제국 건설을 정당화하던 영국이 여성과 어린이를 수용소에 가두고 굶어 죽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영국의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 큰 균열을 만들었다.
제국 방어의 한계 인식
보어전쟁을 통해 영국은 자신의 제국이 생각보다 훨씬 취약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작은 보어 공화국 하나를 상대하는 데도 이렇게 큰 비용과 시간이 들었다면, 만약 러시아나 독일 같은 강대국이 영국의 식민지를 공격한다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특히 인도 방어 문제가 심각하게 논의되었다.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를 통해 인도를 침공한다면 영국으로서는 이를 막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연이은 실패는 영국의 육군력으로는 대륙 강국과의 정면 대결이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해군력에서도 한계가 드러났다. 독일과 미국이 급속한 해군 건설에 나서면서 영국의 해상 패권도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 "투 파워 스탠다드(Two Power Standard)" 정책, 즉 영국 해군이 다른 두 나라 해군의 합보다 강해야 한다는 원칙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군함 건조비가 필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은 "영광스러운 고립(Splendid Isolation)" 정책을 포기하고 동맹국을 찾기 시작했다. 1902년 일본과의 동맹, 1904년 프랑스와의 협상, 1907년 러시아와의 협정은 모두 제국 방어 부담을 줄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군사 개혁과 제도 정비
보어전쟁의 교훈을 바탕으로 영국은 대대적인 군사 개혁에 착수했다. 육군성 장관이었던 할데인 경은 영국군의 조직과 훈련 체계를 전면적으로 개편했다. 기존의 연대 중심 체제에서 사단 중심 체제로 개편하고, 참모 제도를 도입해 전문적인 군사 계획 수립 능력을 강화했다.
예비군 제도도 대폭 개선되었다. 기존의 민병대를 영토군(Territorial Force)으로 개편하고, 정규군과 연계한 훈련을 실시했다. 또한 장교 양성 제도를 개혁해 샌드허스트 왕립사관학교와 울위치 왕립포병사관학교의 교육 과정을 강화했다.
해군에서도 드레드노트급 전함의 건조를 시작으로 함대 현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또한 해군 정보부를 강화해 독일 해군의 동향을 면밀히 감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군사 개혁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갔다. 1900년대 영국의 국방비는 연간 7천만 파운드를 넘어섰고, 이는 정부 총예산의 절반에 달하는 수준이었다. 이로 인해 사회 개혁을 위한 예산은 상대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식민지 정책의 변화
보어전쟁은 영국의 식민지 정책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기존의 직접 통치 방식이 비효율적이고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이 입증되자, 영국은 가능한 한 간접 통치를 선호하게 되었다. 현지의 전통적 지배 계층을 활용하거나 자치정부를 허용하는 방식이 더 경제적이라는 판단이었다.
남아프리카에서도 이러한 정책 변화가 적용되었다. 1910년 남아프리카 연방 성립 시 영국은 보어인들에게 상당한 자치권을 허용했다. 이는 직접 통치의 비용을 절약하려는 의도였지만, 동시에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권리를 희생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캐나다와 호주에서도 자치령(Dominion) 지위가 강화되었다. 이들 자치령은 내정에서는 거의 완전한 독립을 누렸지만, 외교와 국방에서는 여전히 영국에 의존했다. 이는 영국으로서는 제국 방어 부담을 분담시키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경제적 부담과 사회 개혁의 지연
막대한 제국 유지 비용은 영국 내 사회 개혁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독일에서는 비스마르크가 이미 1880년대에 사회보험 제도를 도입했지만, 영국에서는 20세기 초까지도 본격적인 사회보장 제도가 마련되지 않았다. 국가 예산의 대부분이 국방비와 제국 행정비로 소요되었기 때문이다.
자유당 정부가 1906년 집권한 후에야 비로소 본격적인 사회 개혁이 시작되었다. 로이드 조지의 주도로 노령연금과 실업보험이 도입되었지만, 이를 위한 재원 마련은 큰 어려움이었다. 결국 "인민예산"이라는 이름으로 부유층에 대한 증세를 추진해야 했고, 이는 상원과의 격렬한 갈등으로 이어졌다.
보어전쟁 당시 징집 검사에서 드러난 영국 청년들의 열악한 신체 조건도 사회 개혁의 필요성을 부각시켰다. 도시 빈민층 출신 청년들의 영양 상태와 건강 상태가 너무 나빠서 군복무에 부적격 판정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제국 방어를 위해서라도 사회 개혁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
보어전쟁은 영국 내에서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촉발했다. J.A. 홉슨은 『제국주의론』에서 제국주의가 소수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 국민 전체가 비용을 부담하는 시스템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보어전쟁이 세실 로즈 같은 광산업자들의 이익을 위한 전쟁이었다고 주장했다.
자유당 내에서도 제국주의 정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보어전쟁을 "자본가들의 전쟁"이라고 비판했고, 헨리 캠벨-배너먼은 강제수용소 정책을 "야만적인 행위"라고 규탄했다.
이러한 비판은 영국의 제국주의 정책에 일정한 제동을 걸었다. 20세기 들어 영국은 이전보다 신중한 제국 정책을 추진했고, 가능한 한 평화적 수단을 통한 영향력 확대를 추구했다. 하지만 기본적인 제국주의 정책 자체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결론
스페인계승전쟁과 보어전쟁으로 상징되는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식민지 전쟁들은 영국에게 제국 유지의 현실적 한계를 깨닫게 해준 중요한 경험이었다. 특히 보어전쟁은 작은 적을 상대로도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소요된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이는 영국의 제국 정책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전쟁 비용의 급증은 영국 정부의 재정 구조를 바꾸어놓았다. 국방비가 정부 예산의 절반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사회 개혁은 후순위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독일 등 후발 산업국들이 사회보장제도를 통해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는 동안 영국이 상대적으로 뒤처지는 결과를 낳았다.
제국 방어의 한계 인식은 영국으로 하여금 "영광스러운 고립" 정책을 포기하고 동맹 체제를 구축하게 만들었다. 일본, 프랑스, 러시아와의 연이은 협정은 모두 제국 방어 부담을 줄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유럽의 세력 균형을 변화시키고 1차 대전의 전조가 되었다.
식민지 반발의 증가와 이를 진압하는 데 드는 비용은 영국으로 하여금 보다 유연한 제국 정책을 모색하게 했다. 직접 통치보다는 간접 통치를, 무력 진압보다는 협상과 타협을 선호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종종 현지 소수 지배층과의 타협을 통해 이루어졌고, 이는 식민지 다수 주민들의 희생을 수반하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보어전쟁과 같은 식민지 전쟁들은 영국 제국주의의 절정기이자 동시에 그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한 전환점이었다. 영국은 여전히 세계 최강의 제국이었지만, 그 제국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과 노력이 과거보다 훨씬 커졌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는 20세기 영국사의 전개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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