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영국은 '세계의 공장'이라 불릴 정도로 산업 생산력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번영도 때로는 급격한 경제 위기에 직면했다. 1825년과 1847년에 발생한 두 차례의 대공황은 영국 경제에 큰 충격을 주었지만, 동시에 영국이 진정한 글로벌 제국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금융 버블의 붕괴로 시작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영국은 해외 식민지와 새로운 시장으로 수출을 대폭 확대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은 단순히 유럽의 강국을 넘어서 세계를 무대로 하는 제국이 되었고, 자유무역 체제를 전 세계에 확산시키는 주역이 되었다.
산업혁명과 새로운 경제 체제
18세기 말부터 시작된 산업혁명은 19세기 들어 본격적으로 꽃을 피웠다. 증기기관의 개량과 보급으로 생산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철도 건설로 운송 혁명도 일어났다. 맨체스터의 면직물 공업, 버밍엄의 철강 공업, 셰필드의 철강 제품은 세계 시장을 석권했다. 1820년대 영국은 전 세계 철 생산량의 절반, 면직물 생산량의 3분의 2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런 급속한 산업 발전은 새로운 종류의 경제 위기도 낳았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주로 흉작이나 전쟁 때문에 경제 위기가 일어났다면, 산업 사회에서는 과잉 생산과 투기로 인한 위기가 주를 이뤘다. 공장제 대량 생산은 전례 없는 양의 상품을 쏟아냈지만, 이를 소비할 시장은 제한되어 있었다. 국내 노동자들의 구매력은 낮았고, 해외 시장도 아직 충분히 개척되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금융 시스템도 복잡해지면서 새로운 위험 요소가 생겨났다. 은행들이 투기적 사업에 과도하게 자금을 대출해주고, 주식 투자 열풍이 일어나면서 경제 전체가 불안정해졌다. 특히 철도 건설, 광산 개발, 해외 투자 같은 분야에서 투기 열풍이 심했다. 이런 투기 버블이 터질 때마다 경제 전체가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영국의 경제 성장도 이전과는 다른 패턴을 보였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경제 성장이 매우 완만했지만, 산업 사회에서는 급성장과 급락이 반복되는 순환 구조를 보였다. 호황기에는 투자와 생산이 급증하지만, 어느 시점에서 과잉 공급과 수요 부족이 맞물리면서 불황이 찾아오는 것이었다. 이런 경기 순환은 자본주의 경제의 기본적인 특징이 되었다.
1825년 제1차 대공황의 발생과 전개
19세기 영국 최초의 본격적인 경제 공황은 1825년에 일어났다. 이 위기는 남미 투자 붐의 붕괴에서 시작되었다. 1810년대부터 남미의 스페인 식민지들이 독립하면서 새로운 투자 기회가 열렸다고 여겨졌다. 영국의 투자자들은 남미 각국의 정부 채권을 사들이고, 광산 개발 회사에 투자하며, 새로운 공화국들과의 무역을 기대했다.
1822년부터 1825년까지 런던 증권 거래소에는 남미 투자 열풍이 불었다. 페루, 칠레, 콜롬비아, 브라질, 멕시코 등의 정부 채권이 런던에서 발행되었고, 영국 투자자들이 앞다퉈 매입했다. 남미 광산 개발 회사들의 주식도 치솟았다.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는 광산 회사의 주식까지 거래될 정도였다. 1824년에는 무려 624개의 신규 회사가 설립되었는데, 이 중 상당수가 남미 관련 사업이었다.
하지만 1825년 들어 남미 투자의 실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남미 신생국들은 정치적으로 불안정했고, 경제 기반도 취약했다. 정부 채권의 이자를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는 나라들이 속출했다. 광산 개발도 기대만큼 수익을 내지 못했다. 기술적 어려움과 정치적 혼란으로 많은 프로젝트가 실패했다.
1825년 말 남미 관련 투자들이 연쇄적으로 부실화되면서 금융 시스템 전체가 흔들렸다. 투자자들이 일제히 자금을 회수하려 하면서 주식 가격이 폭락했다. 과도한 대출을 해준 은행들도 연쇄 부도 위기에 몰렸다. 12월에는 런던의 주요 은행 6곳이 파산했고, 지방 은행 73곳도 문을 닫았다. 영국 전체에서 약 800개의 기업이 도산했다.
금융 위기는 곧 실물 경제로 전이되었다. 신용 경색으로 기업들이 운영자금을 구하기 어려워졌고, 생산 활동이 급격히 위축되었다. 실업률이 급증하면서 소비도 줄어들었다. 면직물, 철강, 기계 제조업 등 영국의 주력 산업들이 모두 타격을 받았다. 1826년에는 전체 생산량이 전년 대비 25% 이상 감소했다.
정부와 영란은행의 대응
1825년 공황에 직면한 영국 정부와 영란은행은 처음에는 적절한 대응책을 찾지 못했다. 당시의 경제학 이론으로는 이런 규모의 위기를 설명하거나 해결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아담 스미스의 고전 경제학에서는 시장의 자동 조절 기능을 강조했는데, 실제로는 시장이 스스로 회복되지 못하고 있었다.
영란은행은 처음에는 금리를 인상해서 금 유출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신용 경색을 악화시켰다. 은행들이 대출을 더욱 꺼리게 되면서 기업들의 자금난이 심해졌다. 12월 중순 상황이 극도로 악화되자 영란은행은 방침을 바꿔서 적극적으로 유동성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할인율을 낮추고 어음 할인을 늘려서 시중에 자금을 풀었다.
정부는 남미 투자 손실을 개인 투자자들이 감당하도록 했다. 정부가 나서서 손실을 보전해주지는 않았지만, 은행 시스템의 붕괴는 막으려 했다. 영란은행을 통해 주요 은행들에 긴급 자금을 지원했고, 예금자들의 인출 요구에 대응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는 중앙은행의 최종 대부자 역할에 대한 초기 경험이었다.
1826년부터는 점진적으로 경기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남미 투자 열풍이 꺼지면서 투기적 요소가 제거되었고, 실물 경제의 기초 여건은 여전히 건전했기 때문이다. 영국의 산업 기술과 생산 능력은 그대로 남아있었고, 세계 시장에서의 경쟁력도 유지되고 있었다. 정부는 이 기회에 금융 규제를 강화하고 은행 제도를 개선했다.
하지만 1825년 공황은 영국 경제에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해외 투자와 수출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의 위험성이 드러났지만, 동시에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오히려 해외 시장 확대가 필요하다는 점도 명확해졌다. 국내 시장만으로는 영국의 거대한 생산 능력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유무역 정책의 확산과 식민지 시장 개척
1825년 공황을 겪으면서 영국은 보호무역에서 자유무역으로 정책을 전환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보호무역 정책은 국내 산업을 보호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수출 확대에는 걸림돌이 되었다. 다른 나라들도 영국에 대해 보복 관세를 부과하면 영국 상품의 수출이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1820년대부터 윌리엄 허스키슨 상무장관이 주도해서 관세 인하 정책을 추진했다. 원료와 반제품에 대한 관세를 대폭 낮춰서 제조 비용을 줄이고, 동시에 완제품 수출을 늘리려 했다. 상호주의 원칙도 도입해서 영국에 유리한 조건으로 통상 협정을 체결하는 나라에는 관세 혜택을 주었다.
이런 자유무역 정책은 1846년 곡물법 폐지로 절정에 달했다. 곡물법은 외국산 곡물 수입을 제한해서 지주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법이었지만, 제조업자들과 노동자들에게는 부담이었다. 리처드 코브든과 존 브라이트가 이끄는 곡물법 반대 동맹의 지속적인 운동 끝에 곡물법이 폐지되면서 영국은 완전한 자유무역 체제로 전환했다.
자유무역 정책과 함께 영국은 식민지 시장 개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기존의 중상주의적 식민지 정책에서 벗어나 식민지를 영국 상품의 시장이자 원료 공급지로 체계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인도는 이런 정책의 가장 중요한 대상이었다. 동인도회사를 통해 인도의 전통 수공업을 해체하고 영국 제품 시장으로 만들었다.
1833년 동인도회사의 상업 독점권이 폐지되면서 민간 상인들의 인도 진출이 활발해졌다. 영국은 인도에서 면화와 아편을 수입하고, 대신 면직물과 철제품을 수출했다. 이런 무역 구조는 인도 경제를 영국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았지만, 영국에게는 안정적인 시장과 원료 공급처를 확보해주었다.
1840년대 철도 투자 붐과 제2차 대공황
1825년 공황이 진정된 후 영국 경제는 다시 성장세로 돌아섰다. 특히 1840년대에는 철도 건설 붐이 일어나면서 경제가 급속히 팽창했다. 1825년 세계 최초의 여객 철도인 스톡턴-달링턴 철도가 개통된 이후 철도의 경제적 가치가 입증되자, 전국 각지에서 철도 건설 계획이 쏟아졌다.
1840년대 철도 투자 열풍은 1820년대 남미 투자 붐을 훨씬 넘어서는 규모였다. '철도광시대(Railway Mania)'라고 불린 1845-1847년 기간에는 무려 272개의 철도 회사가 설립되었다. 총 투자 규모는 2억 파운드에 달했는데, 이는 당시 영국 국민소득의 절반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온 국민이 철도 주식 투자에 뛰어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철도 투자 붐은 처음에는 실물 경제에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철도 건설로 철강, 기계, 석탄 산업이 크게 성장했다. 1840년대 초 영국의 철 생산량은 연간 150만 톤에서 200만 톤으로 늘어났다. 기관차와 철로 제조업도 급성장했다. 철도 건설에 필요한 대량의 노동력 수요로 실업률도 낮아졌다.
하지만 1845년 무렵부터 철도 투자의 문제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수익성이 의심스러운 노선들까지 무분별하게 계획되었고, 경쟁 노선들이 중복 건설되면서 투자 효율이 떨어졌다. 런던-요크 구간에는 무려 5개의 경쟁 노선이 계획되기도 했다. 주식 가격도 실제 가치와 동떨어진 수준까지 올랐다.
1847년 들어 철도 주식 가격이 폭락하기 시작했다. 투자자들이 손실을 최소화하려고 일제히 매도에 나서면서 주가가 연쇄 하락했다. 철도 회사들의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면서 건설 공사가 중단되는 사례가 속출했다. 철도 관련 산업들도 연쇄적으로 타격을 받았다. 철강 생산량이 급감하고 기계 제조업체들도 주문 취소에 시달렸다.
1847년 금융 위기와 실물 경제 침체
철도 투자 붕괴는 곧 전면적인 금융 위기로 번졌다. 철도 회사들에 과도하게 대출해준 은행들이 부실화되기 시작했다. 1847년 10월에는 런던의 유명한 상업은행들이 연쇄 부도했다. 지방 은행들도 예금 인출 사태에 직면했다. 정부는 은행법을 일시 정지하고 영란은행이 긴급 자금을 공급하도록 허용했지만, 금융 시스템의 신뢰는 크게 훼손되었다.
실물 경제도 급격히 위축되었다. 신용 경색으로 기업들의 운영자금 조달이 어려워졌고, 소비와 투자가 동시에 줄어들었다. 1848년에는 공업 생산이 전년 대비 20% 이상 감소했다. 실업률도 급증해서 맨체스터, 버밍엄 같은 공업도시에서는 10%를 넘어섰다. 사회 불안도 커져서 1848년 차티스트 운동이 재활성화되기도 했다.
농업 부문도 큰 타격을 받았다. 1845년부터 시작된 아일랜드 감자 기근이 1847년까지 계속되면서 식료품 가격이 폭등했다. 이는 도시 주민들의 구매력을 더욱 악화시켰다. 아일랜드에서는 100만 명 이상이 굶어죽거나 질병으로 사망했고, 대규모 이민이 시작되었다. 영국 본토에서도 식료품 부족으로 사회적 긴장이 높아졌다.
1847년 공황은 1825년보다 더 광범위하고 깊각한 영향을 미쳤다. 철도라는 신기술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투자가 빚어낸 결과였다. 하지만 이 위기를 통해 영국은 또다시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국내 투자만으로는 과잉 자본을 모두 흡수할 수 없으며,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위해서는 해외 시장과 해외 투자가 필수적이라는 점이었다.
위기 극복을 위한 해외 시장 확대 전략
1840년대 말 경제 위기에 직면한 영국은 해외 시장 확대를 통한 돌파구를 모색했다. 국내 시장의 한계가 명확해진 상황에서 해외 수출 증대만이 과잉 생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영국 정부와 기업들은 기존 식민지 시장을 더욱 체계적으로 개발하는 동시에 새로운 시장 개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인도 시장 확대가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1840년대까지 인도는 주로 면화와 아편의 공급지 역할을 했지만, 이제는 영국 제품의 대량 소비 시장으로 발전시켜야 했다. 영국은 인도의 교통 인프라 건설에 대규모 투자를 시작했다. 1853년 봄베이에서 타네까지 첫 철도가 개통된 것을 시작으로 인도 전역에 철도망 건설이 추진되었다.
철도 건설은 일석이조의 효과를 가져왔다. 건설 과정에서 영국산 철강, 기관차, 철도 장비가 대량 수출되었고, 완공 후에는 인도 내 상품 유통이 활발해져서 영국 제품의 판매도 늘어났다. 1850년대에 인도로의 영국 상품 수출은 1840년대 대비 3배 이상 증가했다. 면직물, 철제품, 기계류가 주요 수출품이었다.
중국 시장 개척도 적극 추진되었다. 1839-1842년 제1차 아편전쟁으로 5개 항구가 개방되었지만, 아직 본격적인 시장이 형성되지는 않았다. 영국은 1856년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켜서 중국 시장을 더욱 확대했다. 1858년 톈진조약으로 10개 항구가 추가 개방되었고, 장강 내륙 항해권도 확보했다. 이로써 중국 내륙 시장까지 영국 상품이 침투할 수 있게 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캐나다 같은 자치 식민지들도 중요한 시장으로 부상했다. 1850년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골드러시가 일어났고, 인구가 급증했다. 영국은 오스트레일리아로 대량의 생활용품과 산업 기계를 수출했다. 캐나다도 철도 건설과 함께 영국 제품의 중요한 시장이 되었다.
남미와 아프리카 시장 진출
기존 식민지 외에도 영국은 남미와 아프리카에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1820년대 남미 투자 실패의 교훈을 바탕으로 이번에는 더욱 신중하고 체계적으로 접근했다. 정치적 안정을 확보한 나라들부터 단계적으로 진출하면서 리스크를 최소화했다.
브라질은 남미에서 가장 중요한 시장이었다. 1850년 영국-브라질 통상협정으로 영국 상품에 대한 관세가 대폭 인하되었다. 브라질의 커피 수출 증가로 구매력이 향상되면서 영국산 면직물과 철제품 수입이 크게 늘었다. 1850년대 브라질로의 영국 수출은 연평균 15% 이상 증가했다.
아르헨티나도 유망한 시장으로 떠올랐다. 1850년대부터 아르헨티나의 목축업이 발달하면서 쇠고기와 양모 수출이 늘어났다. 영국은 아르헨티나에 철도와 항구 건설 자금을 투자하고, 대신 영국 제품의 판매권을 확보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중심으로 한 철도망 건설로 아르헨티나 전역이 영국 상품의 시장이 되었다.
아프리카에서는 서아프리카가 주요 진출 대상이었다. 1807년 노예무역 폐지 이후 서아프리카와의 합법적 무역을 확대하려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팜오일, 땅콩, 목재 등 아프리카 원료를 수입하고 대신 영국 제품을 수출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1850년대에는 서아프리카로의 영국 상품 수출이 크게 늘어났다.
이런 해외 시장 확대 전략은 분명한 효과를 거두었다. 1850년대 영국의 전체 수출은 1840년대 대비 80% 이상 증가했다. 특히 식민지와 신시장으로의 수출 증가가 두드러졌다. 인도, 오스트레일리아, 남미로의 수출이 전체 수출 증가의 60% 이상을 차지했다.
자유무역 제국주의의 완성
1850년대까지의 경험을 통해 영국은 독특한 형태의 제국주의를 완성했다. 이는 전통적인 영토 정복 방식이 아니라 자유무역을 내세운 경제적 지배였다. 영국은 군사력을 배경으로 다른 나라들의 시장을 강제로 개방시키고, 자유무역이라는 명분으로 경제적 종속 관계를 만들어냈다.
이런 자유무역 제국주의는 영국에게 여러 가지 이점을 제공했다. 우선 직접적인 식민지 통치에 따른 비용과 부담을 줄일 수 있었다. 군사 기지와 해군력만으로 통상로를 확보하고, 현지 정부는 그대로 두면서 경제적 이익만 취하는 방식이었다. 또한 자유무역이라는 보편적 원칙을 내세워서 다른 강대국들의 반발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동시에 이는 다른 나라들에게는 매우 불리한 구조였다. 영국의 압도적인 산업 기술과 자본력 앞에서 자유경쟁을 하면 결국 영국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인도, 중국, 남미 국가들은 원료 공급지와 제품 시장이라는 주변부 역할에 고착화되었다. 자국의 산업 발전 기회는 박탈당하고 영국 경제의 보완 역할만 하게 된 것이다.
영국의 자유무역 제국주의는 19세기 중반 절정에 달했다. 세계 해상 무역의 3분의 1을 영국이 담당했고, 세계 제조업 생산의 절반을 차지했다. 런던은 세계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고, 파운드화는 국제 기축통화 역할을 했다. 영국은 말 그대로 '세계의 공장이자 은행'이 되었다.
결론
1825년과 1847년 두 차례의 대공황은 영국 경제에 큰 충격을 주었지만, 동시에 영국이 진정한 글로벌 제국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었다. 투기 버블의 붕괴로 시작된 위기들은 영국으로 하여금 국내 시장의 한계를 인식하게 만들었고, 해외 시장 확대의 필요성을 절감시켰다.
첫 번째 공황인 1825년 위기는 남미 투자 붐의 붕괴에서 비롯되었지만, 영국은 이를 통해 투기적 해외 투자의 위험성과 동시에 체계적인 시장 개척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두 번째 공황인 1847년 위기는 철도 투자 열풍이 낳은 결과였지만, 이 역시 영국이 과잉 자본과 과잉 생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해외 진출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남겼다.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영국은 자유무역 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해외 식민지 시장을 체계적으로 개발했다. 인도와 중국 시장 확대, 오스트레일리아와 캐나다 같은 자치 식민지 개발, 남미와 아프리카 진출 등을 통해 영국은 전 세계를 무대로 하는 경제 활동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완성된 자유무역 제국주의는 19세기 후반 영국 패권의 핵심 기반이 되었다.
두 차례의 공황은 또한 자본주의 경제의 순환적 특성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호황과 불황이 반복되는 경기 순환은 자본주의 경제의 구조적 특징이었고, 영국은 이런 변동성을 해외 시장 확대를 통해 완충하려 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영국의 전략은 결국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기초를 마련했다. 1850년대 영국은 세계 GDP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명실상부한 세계 경제의 패권국으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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