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9년 8월 16일 맨체스터 세인트 피터 광장에서 벌어진 사건은 영국 정치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의회 개혁을 요구하며 평화적으로 모인 6만 명의 시민들에게 기마대가 돌진해서 11명이 죽고 400여 명이 다쳤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워털루 전투를 빗대어 '피터루 대학살'이라고 불렀다. 외국의 적과 싸워 승리한 워털루와 달리, 피터루에서는 영국 정부가 자국민을 상대로 칼을 뽑은 것이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영국 사회에 정치 개혁의 필요성을 각인시켰고, 이후 30년간 계속된 의회 개혁 운동과 차티스트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의 사회 변화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1815년 이후 영국 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전쟁 중에 급성장한 산업도시들에는 새로운 사회 계층이 형성되었다. 공장주와 상인들로 구성된 산업 부르주아지는 경제적으로는 큰 힘을 가졌지만 정치적으로는 소외되어 있었다. 기존의 정치 시스템은 여전히 토지 귀족들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회 선거제도는 중세 이래 거의 변하지 않은 채로 남아있었다. 하원 의원 658명 중 절반 가량이 인구 2천 명 미만의 소규모 선거구에서 선출되었다. 심지어 올드 사럼 같은 곳은 주민이 7명뿐인데도 의원 2명을 배출했다. 이런 '썩은 선거구'들은 대부분 토지 귀족들이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반면 맨체스터, 버밍엄, 셰필드 같은 신흥 공업도시들은 인구가 수십만 명이 넘었는데도 의회 대표권이 전혀 없었다.
선거권도 극히 제한적이었다. 잉글랜드에서는 연간 40실링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자유보유농만 투표할 수 있었다. 도시에서는 지역마다 기준이 달랐는데, 대부분 중세부터 내려온 복잡한 자격 요건을 적용했다. 전체 성인 남성 중 투표권을 가진 사람은 5% 정도에 불과했다. 여성은 아예 정치적 권리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다.
이런 불합리한 제도에 대한 불만은 전쟁이 끝나면서 표출되기 시작했다. 전쟁 중에는 국가적 위기 상황이라 정치 개혁 요구가 억눌려 있었지만, 평화가 오자 그동안 쌓였던 불만이 터져나온 것이다. 특히 1815년 도입된 곡물법은 불만을 더욱 증폭시켰다. 곡물법은 외국산 곡물 수입을 제한해서 국내 곡물 가격을 높게 유지하는 정책이었는데, 이는 지주들에게는 유리했지만 도시 주민들에게는 생활비 부담을 늘렸다.
급진파 운동의 성장
이런 상황에서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급진파 운동이 활발해졌다. 급진파들은 보통선거권 도입, 의회 선거구 재조정, 곡물법 폐지 등을 요구했다. 이들의 주장은 18세기 말 토머스 페인의 『인간의 권리』나 윌리엄 고드윈의 정치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의 자유·평등·박애 이념도 영향을 미쳤다.
급진파 운동의 중심 인물 중 하나는 윌리엄 코벳이었다. 그는 『정치 주간지』라는 신문을 발행하면서 의회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코벳의 신문은 2펜스라는 저렴한 가격으로 노동자들 사이에서 폭넓게 읽혔다. 그는 복잡한 정치 이론보다는 구체적인 생활 문제와 연결해서 개혁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높은 세금과 곡물 가격, 열악한 노동 조건 등이 모두 불합리한 정치 제도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헨리 헌트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뛰어난 연설가로서 전국 각지에서 개혁 집회를 열었다. 헌트는 점진적 개혁보다는 급진적 변화를 주장했다. 그는 모든 성인 남성에게 선거권을 주고, 의회를 매년 선출하며, 비밀투표를 실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런 주장은 당시로서는 매우 혁명적인 것이었다.
1816년부터 1819년까지 전국 각지에서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대규모 집회들이 열렸다. 1816년 12월 런던 스파 필즈에서 열린 집회에는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 1817년 3월에는 맨체스터에서 런던까지 도보 행진을 벌이는 '담요 행진'이 시도되기도 했다. 이는 실업자들이 담요를 메고 런던에 가서 국왕에게 청원하겠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이런 움직임을 탄압했지만, 개혁 요구는 계속 확산되었다.
1819년 8월 16일, 피터루의 비극
1819년 여름 맨체스터의 급진파들은 대규모 집회를 계획했다. 헨리 헌트를 연사로 초청해서 의회 개혁을 요구하는 평화적인 집회를 열겠다는 것이었다. 집회 장소는 맨체스터 중심가의 세인트 피터 광장으로 정해졌다. 주변 지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예정이었다.
8월 16일 오전부터 사람들이 맨체스터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올덤, 로치데일, 스톡포트 등 주변 공업도시에서 온 노동자들과 가족들이 행렬을 이뤄 걸어왔다. 많은 사람들이 정장을 입고 깃발을 들고 왔는데, 이는 질서있고 평화적인 집회임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여성들과 어린이들도 많이 참여했다.
오후 1시경 헨리 헌트가 도착했을 때 광장에는 6만 명 가량이 모여있었다. 헌트는 연단에 올라가 의회 개혁의 필요성에 대해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군중들은 질서정연하게 연설을 듣고 있었다.
하지만 맨체스터 치안 판사들은 이 집회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헌트를 체포하기로 결정했다. 오후 1시 30분경 특별 치안관들이 헌트를 체포하려 했지만 군중에 막혀 접근할 수 없었다. 이때 치안 판사들이 기마대에 출동을 명령했다. 맨체스터 의용군과 정규 기병대가 광장으로 돌진했다.
기마대는 군중을 해산시키려 했지만, 6만 명이 모인 좁은 광장에서는 사람들이 빠져나갈 곳이 없었다. 공황상태에 빠진 군중들이 서로 밀치면서 넘어지기 시작했다. 기병들은 칼을 뽑아들고 사람들을 위협했고, 일부는 실제로 칼을 휘둘렀다. 15분 만에 광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피터루의 충격과 여론의 반응
피터루 사건의 피해는 참혹했다. 11명이 죽고 400여 명이 다쳤다. 희생자 중에는 여성과 어린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2세 아기를 안고 있던 메리 히스는 기병의 칼에 맞아 죽었고, 여성 개혁 운동가인 메리 필즈도 중상을 입었다. 대부분의 부상자들은 칼에 베이거나 말발굽에 밟혀서 다친 것이었다.
사건 소식이 전해지자 영국 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평화적인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에게 정부가 무력을 사용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더욱 분노를 자아낸 것은 정부의 반응이었다. 당시 내무장관 시드머스 자작은 맨체스터 치안 판사들의 조치를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심지어 섭정 왕자(훗날 조지 4세)는 치안 판사들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타임스』를 비롯한 주요 신문들은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시인 바이런과 셸리도 피터루를 규탄하는 시를 썼다. 셸리의 「자유의 노래」는 "일어나라, 영국의 민중들이여! 밭고랑마다 씨앗이 뿌려졌다"라는 구절로 유명하다. 전국 각지에서 피터루를 규탄하고 개혁을 요구하는 집회들이 열렸다.
하지만 정부는 오히려 탄압을 강화했다. 1819년 말 이른바 '6법'을 제정해서 집회의 자유를 더욱 제한했다. 500명 이상의 정치 집회는 사전 허가를 받아야 했고, 무기 훈련을 금지했으며, 신문 발행에 대한 인지세를 늘렸다. 정부는 피터루 사건을 계기로 급진파 운동을 뿌리뻑기 하려 했다.
개혁 운동의 재편과 발전
피터루 사건은 개혁 운동에 일시적 타격을 주었지만,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개혁의 필요성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820년대 들어서면서 개혁 운동은 새로운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급진적인 방법보다는 점진적이고 합법적인 개혁을 추구하는 흐름이 주류가 되었다.
이런 변화를 주도한 것은 중산층이었다. 산업 부르주아지들은 혁명적 변화보다는 기존 체제 내에서의 개혁을 선호했다. 이들의 목표는 노동자들과 함께 기존 귀족 정치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기존 정치 엘리트에 편입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보통선거권 같은 급진적 요구보다는 재산 기준을 낮춰서 중산층에게 참정권을 주는 것에 집중했다.
1820년대의 대표적인 개혁 운동은 가톨릭 해방 운동이었다. 아일랜드의 가톨릭 신자들은 정치적 권리에서 배제되어 있었는데, 다니엘 오코넬이 이끄는 운동이 큰 성과를 거뒀다. 1829년 가톨릭 해방법이 통과되면서 가톨릭 신자들도 의회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종교적 관용의 확대인 동시에 정치 개혁의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였다.
곡물법 폐지 운동도 활발해졌다. 1838년 맨체스터에서 결성된 곡물법 반대 동맹은 리처드 코브든과 존 브라이트를 중심으로 전국적인 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자유무역의 이익을 강조하면서 곡물법이 토지 귀족들만을 위한 악법이라고 주장했다. 곡물법 반대 운동은 산업 부르주아지와 노동자들이 공동의 이익을 가진 첫 번째 사례였다.
1832년 제1차 선거법 개정
피터루 이후 13년이 지난 1832년, 마침내 영국 역사상 첫 번째 의회 개혁이 이뤄졌다. 제1차 선거법 개정은 영국 정치사의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다. 이 개혁은 완전한 민주주의는 아니었지만, 기존의 귀족 정치에 균열을 가하는 중요한 첫걸음이었다.
개혁의 배경에는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의 영향이 컸다. 프랑스에서 부르봉 왕조가 무너지고 시민왕 루이 필리프가 즉위하는 것을 본 영국 정치인들은 개혁 없이는 혁명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1830년 휘그당이 집권하면서 개혁의 가능성이 열렸다. 찰스 그레이 수상은 적당한 개혁으로 혁명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1832년 개혁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56개의 썩은 선거구가 폐지되고, 맨체스터, 버밍엄, 리즈 같은 신흥 공업도시들이 새로 선거구로 편입되었다. 선거권도 확대되어서 도시에서는 연간 10파운드 이상의 집세를 내는 사람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다. 그 결과 선거권자는 기존의 43만 명에서 65만 명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이 개혁은 여전히 제한적이었다. 전체 성인 남성의 20% 정도만 투표권을 얻었을 뿐이다. 노동자들 대부분은 여전히 선거권에서 제외되었고, 여성은 아예 고려 대상도 아니었다. 비밀투표도 도입되지 않아서 매수와 협박이 계속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개혁은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정치 권력이 토지 귀족에서 산업 부르주아지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차티스트 운동의 등장
1832년 개혁으로 중산층은 정치적 권리를 얻었지만, 노동자들은 여전히 배제되어 있었다. 이에 실망한 노동자들과 급진파들은 더욱 포괄적인 정치 개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1838년 『인민 헌장』이 발표되면서 차티스트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인민 헌장은 6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모든 성인 남성에게 선거권을 주고, 비밀투표를 실시하며, 재산 자격 없이 의원이 될 수 있게 하고, 의원에게 급여를 지급하며, 매년 선거를 실시하고, 선거구를 인구에 비례해서 조정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피터루에서 헨리 헌트가 주장했던 내용과 거의 같았다.
차티스트 운동은 전국적인 규모로 발전했다. 1839년, 1842년, 1848년 세 차례에 걸쳐 대규모 청원 운동을 벌였다. 1842년에는 330만 명이 서명한 청원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의회는 매번 이를 거부했다. 차티스트들은 대규모 집회와 파업을 통해 압력을 가했지만, 정부의 탄압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차티스트 운동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었다. 윌리엄 로베트와 프랜시스 플레이스로 대표되는 '도덕적 힘' 파는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방법을 고집했다. 반면 퍼거스 오코너의 '물리적 힘' 파는 필요하다면 폭력도 불사한다는 입장이었다. 1839년 웨일스 뉴포트에서는 존 프로스트가 이끄는 차티스트들이 무력봉기를 시도하기도 했다.
차티스트 운동의 의의와 한계
차티스트 운동은 당시에는 실패했지만, 영국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무엇보다 노동자 계급이 독자적인 정치 세력으로 등장했다는 점이 중요했다. 이전의 개혁 운동이 중산층 주도였다면, 차티즘은 명확히 노동자들의 운동이었다. 이는 영국 정치사에서 계급 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차티스트들은 또한 근대적인 정치 조직과 운동 방식을 개발했다. 전국 조직을 만들고, 신문을 발행하며, 대중 집회를 열고, 청원 운동을 벌이는 등 오늘날의 정치 운동과 비슷한 방식을 사용했다. 『노던 스타』 같은 차티스트 신문은 노동자들의 정치 의식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여성의 정치 참여도 차티즘을 통해 처음으로 본격화되었다. 비록 인민 헌장에서는 여성 참정권을 명시하지 않았지만, 실제 운동에서는 많은 여성들이 활동했다. 여성 차티스트 협회들이 전국 각지에서 결성되었고, 도로시 톰슨 같은 여성 지도자들이 나타났다. 이는 훗날 여성 참정권 운동의 토대가 되었다.
하지만 차티스트 운동에는 한계도 있었다. 무엇보다 중산층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1832년 개혁으로 정치적 권리를 얻은 중산층은 더 이상의 급진적 개혁에 반대했다. 차티스트들 내부의 분열도 문제였다. 평화적 방법을 고수하는 파와 폭력을 불사하는 파 사이의 갈등은 운동의 효율성을 떨어뜨렸다.
경제적 배경도 운동의 성쇠에 영향을 미쳤다. 차티스트 운동이 활발했던 시기는 대부분 경제 불황기와 일치했다. 1840년대 중반 경기가 회복되면서 운동의 동력도 약해졌다. 노동자들에게는 정치 개혁보다 당장의 생계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점진적 개혁의 진전
차티스트 운동이 쇠퇴한 후에도 정치 개혁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혁명적 변화보다는 점진적 개선이 주를 이뤘다. 1867년 제2차 선거법 개정에서는 도시 노동자들에게 선거권이 확대되었다. 1884년 제3차 개정에서는 농촌 노동자들도 투표권을 얻었다. 1872년에는 비밀투표가 도입되었고, 1885년에는 선거구가 재조정되었다.
이런 점진적 개혁을 통해 차티스트들이 요구했던 6개 조항은 하나씩 실현되어갔다. 1918년에는 모든 성인 남성과 30세 이상 여성에게 선거권이 주어졌고, 1928년에는 여성도 21세부터 투표할 수 있게 되었다. 의원 급여 지급도 1911년에 도입되었다. 매년 선거만 빼고는 차티스트들의 요구가 모두 실현된 셈이다.
이런 점진적 개혁이 가능했던 것은 영국의 정치 문화 때문이었다. 혁명보다는 개혁을, 급진적 변화보다는 점진적 발전을 선호하는 전통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었다. 또한 산업혁명으로 전반적인 생활 수준이 향상되면서 노동자들도 체제 내 개혁에 만족하게 되었다.
결론
1819년 피터루 대학살은 영국 민주주의 발전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평화적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에게 정부가 무력을 사용한 이 사건은 영국 사회에 깊은 충격을 주었고, 정치 개혁의 필요성을 각인시켰다. 피터루의 희생자들은 단순히 죽은 것이 아니라, 영국 민주주의의 씨앗이 되었다.
피터루 이후 30년간 계속된 개혁 운동과 차티스트 운동은 영국을 귀족 정치에서 민주주의로 이끈 원동력이었다. 비록 차티스트들이 원했던 급진적 변화는 당시에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들이 제시한 민주주의의 비전은 결국 현실이 되었다. 모든 성인의 참정권, 비밀투표, 의원 급여 지급 등 차티스트들의 요구는 하나씩 실현되어갔다.
영국 민주주의의 발전은 혁명이 아닌 개혁을 통해 이뤄졌다. 피터루 같은 비극적 사건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는 평화적이고 점진적인 변화였다. 이는 영국의 정치 문화와 사회 구조가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터루에서 시작된 민주주의의 꿈은 한 세기에 걸쳐 서서히 현실이 되어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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