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영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뒤바꾼 두 개의 큰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 농업 혁명의 핵심인 인클로저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산업혁명으로 인한 급속한 도시화였다. 이 두 변화는 서로 맞물리면서 영국을 전통적인 농업 사회에서 근대적인 산업 사회로 탈바꿈시켰지만, 동시에 새로운 사회 문제를 낳았다. 농촌에서 밀려난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면서 형성된 노동자 계급과 도시 빈민 문제는 19세기 영국 사회의 가장 큰 과제가 되었다.
인클로저 운동의 배경과 전개
인클로저(Enclosure) 운동은 기존의 개방형 농지를 울타리로 둘러싸 사유지로 만드는 토지 개혁 운동이었다. 중세 이래 영국의 농촌은 공동체적 농업 방식을 유지해왔다. 농민들은 영주의 토지를 소작하면서도 공동 목초지나 황무지에서 가축을 기르고 연료를 채취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전통적인 농업 방식은 3포제를 기반으로 했는데, 농지를 세 구역으로 나누어 한 해는 밀, 다음 해는 귀리나 보리, 그 다음 해는 휴경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이런 전통적인 농업 방식에 변화가 일어났다. 네덜란드에서 도입된 새로운 농법과 감자, 순무 같은 신작물의 보급으로 농업 생산성을 크게 높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순무를 재배하면 토지를 휴경시키지 않고도 지력을 회복할 수 있었고, 동시에 가축 사료로도 활용할 수 있었다. 이런 신농법을 도입하려면 기존의 공동체적 농업 방식을 버리고 개별 농지를 울타리로 구분해야 했다.
인클로저 운동은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초기에는 지주들이 서로 합의해서 농지를 재분할하는 사적 합의 방식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의회가 개별 지역의 인클로저를 승인하는 법령을 제정하는 의회적 인클로저가 주류가 되었다. 1750년부터 1850년 사이에 무려 4,000여 건의 인클로저 법령이 의회를 통과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 전체 농지의 약 21%가 인클로저되었다.
농업 생산성 향상과 농촌 사회의 변화
인클로저 운동은 확실히 농업 생산성을 크게 향상시켰다. 새로운 농법을 도입한 인클로저 농장들은 기존 농지보다 40-50% 이상 높은 수확량을 기록했다. 특히 축산업의 발전이 두드러졌는데, 개량된 품종의 소와 양을 체계적으로 사육하면서 육류와 양모 생산이 급증했다. 이런 농업 혁명은 늘어나는 도시 인구를 먹여 살릴 식량을 공급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인클로저 운동은 농촌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가장 큰 변화는 소농민과 농업 노동자들의 몰락이었다. 전통적으로 영국 농촌은 대지주, 소지주, 자영농, 농업 노동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인클로저 과정에서 법적 절차와 측량 비용, 울타리 설치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던 소농민들은 자신의 토지를 잃거나 팔아야 했다. 공동 목초지와 황무지 이용권도 사라지면서 소규모 자급자족 농업은 더 이상 불가능해졌다.
그 결과 농촌 사회는 대지주, 대농장주, 농업 노동자의 3층 구조로 재편되었다. 대지주들은 토지 소유권을 바탕으로 지대 수입을 얻었고, 대농장주들은 대지주로부터 토지를 임차해서 상업적 농업을 경영했다. 반면 토지를 잃은 소농민들은 농업 노동자로 전락하거나 아예 농촌을 떠나야 했다. 18세기 말 영국 농촌 인구의 절반 이상이 토지 없는 농업 노동자가 되었다.
산업혁명과 도시화의 가속
인클로저로 농촌에서 밀려난 농민들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제공한 것은 바로 산업혁명이었다. 18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산업혁명은 면직물 공업을 중심으로 제조업을 급속히 발전시켰다. 제니 방적기, 워터 프레임, 뮬 방적기 같은 신기술이 도입되면서 면직물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780년대 들어서는 제임스 와트가 개량한 증기기관이 공장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산업혁명의 진전과 함께 맨체스터, 버밍엄, 셰필드, 리즈 같은 공업 도시들이 급속히 성장했다. 면직물 공업의 중심지인 맨체스터는 1750년 인구 2만 명에서 1801년 7만 명, 1851년에는 30만 명으로 폭증했다. 철강 공업의 중심지인 버밍엄도 1700년 1만 5천 명에서 1801년 7만 명으로 늘어났다. 런던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농촌이었던 영국에 산업도시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공장 시스템의 확산은 노동 방식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전통적인 수공업은 농가에서 가족 단위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다. 면직물 생산에서도 방적은 여성들이, 직조는 남성들이 맡아서 집에서 작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공장 시스템에서는 수십 명,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한 공간에서 기계의 리듬에 맞춰 일해야 했다. 노동 시간도 해가 뜨고 지는 자연의 리듬이 아니라 공장의 필요에 따라 정해졌다.
새로운 사회 계급의 형성
산업혁명과 도시화는 영국 사회에 완전히 새로운 계급을 탄생시켰다. 바로 산업 자본가인 부르주아지와 공장 노동자인 프롤레타리아트였다. 이들은 기존의 귀족이나 농민과는 전혀 다른 경제적 기반과 생활 방식을 가진 새로운 사회 집단이었다.
산업 자본가들은 공장과 기계를 소유하고 대량 생산을 통해 막대한 이윤을 축적했다. 맨체스터의 면직물 공장주나 버밍엄의 철강 사업가들은 전통적인 토지 귀족에 버금가는 부를 쌓아갔다. 이들은 점차 정치적 발언권도 요구하기 시작했다. 1832년 제1차 선거법 개정에서 산업 도시들이 새로 의회 선거구로 편입되고 재산 기준이 완화된 것은 이런 부르주아지의 정치 참여 요구가 반영된 결과였다.
반면 공장 노동자들은 생산 수단을 전혀 소유하지 못한 채 오직 자신의 노동력만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새로운 계급이 되었다. 이들은 농촌에서 온 소농민들과 수공업자들,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로 구성되었다.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정해진 시간에 출근해서 기계의 속도에 맞춰 단순 반복 작업을 해야 했다. 숙련도 필요 없는 단순 작업이 늘어나면서 여성과 아동 노동자들도 대거 공장으로 유입되었다.
도시 빈민의 생활 조건
급속한 도시화와 공업화는 심각한 주거 문제를 낳았다. 공장에서 일하려는 농촌 출신 노동자들이 도시로 몰려들었지만, 이들을 수용할 주택은 턱없이 부족했다. 특히 공장 근처의 값싼 주택 수요가 폭증하면서 무계획적인 개발이 이뤄졌다. 좁은 땅에 최대한 많은 주택을 지으려다 보니 건축 기준 같은 것은 무시되기 일쑤였다.
맨체스터의 공장 지구에는 '백투백(back-to-back)' 주택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노동자 주택이 들어섰다. 이는 집들이 서로 등을 맞대고 연결된 형태로, 한 채당 방 2-3개에 불과했다. 하나의 방에 온 가족이 몰려살기도 했고, 심지어 하숙인까지 받아들이는 경우도 많았다. 화장실과 우물은 여러 가구가 공동으로 사용했는데, 제대로 된 하수도 시설이 없어서 위생 상태는 극도로 열악했다.
런던의 동부 지역이나 리버풀의 항구 지역에는 지하실을 개조한 주택들도 많았다. 습기가 차고 환기가 안 되는 지하실에 온 가족이 살면서 각종 질병에 시달렸다. 1840년대 맨체스터 조사에 따르면, 노동자 가정의 평균 수명이 17세에 불과했다. 상류층 평균 수명이 38세였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격차였다.
공장 노동 조건의 현실
초기 공장의 노동 조건은 참으로 열악했다. 하루 12-14시간 노동은 기본이었고, 바쁜 시기에는 16시간까지 일하기도 했다.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쉬는 날이 거의 없었다. 공장 내부는 먼지와 솜털이 날리고 습도가 높아서 각종 호흡기 질환에 시달리기 쉬웠다. 방적기나 직조기 같은 기계들은 안전장치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서 손가락이나 팔이 끼이는 사고가 빈번했다.
특히 아동 노동 문제가 심각했다. 6-7세 어린이들도 공장에서 일했는데, 주로 기계 밑을 기어다니며 솜털을 치우거나 실이 끊어지면 이어주는 일을 했다. 어린이들은 성인보다 임금을 적게 줘도 되고 말을 잘 들어서 공장주들이 선호했다. 1833년 공장법이 제정되기 전까지는 9세 미만 아동의 공장 취업을 금지하는 법도 없었다.
임금 수준도 극도로 낮았다. 숙련 남성 노동자는 그나마 나았지만, 여성과 아동 노동자들의 임금은 최소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경기가 나빠지면 임금이 깎이거나 해고되기도 했다. 1811년부터 1816년까지 지속된 경제 불황 때는 대량 실업이 발생해서 도시 빈민들의 생활이 더욱 어려워졌다.
사회 문제의 대두와 개혁 요구
이런 열악한 조건은 필연적으로 사회 문제와 갈등을 낳았다. 1811년부터 1816년까지 노팅엄 지방에서 일어난 러다이트 운동은 기계 파괴를 통해 산업 자본주의에 저항한 대표적인 사례였다. 실업에 내몰린 수공업자들이 네드 러드라는 가상의 인물을 내세우며 방적기와 직조기를 부수고 다녔다.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서 이를 진압했지만, 노동자들의 불만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1819년 8월 맨체스터의 세인트 피터 광장에서 일어난 피터루 대학살 사건도 사회 모순이 폭발한 사례였다. 의회 개혁과 곡물법 폐지를 요구하는 대규모 집회에 기마대가 돌진해서 11명이 죽고 400여 명이 다쳤다. 이 사건은 영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면서 정치 개혁의 필요성을 일깨웠다.
종교계와 지식인들도 산업화의 어두운 면을 고발하기 시작했다. 1842년 의회에 제출된 『광산에서의 아동 노동에 관한 보고서』나 1845년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쓴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 같은 저작들은 노동자들의 참상을 생생하게 고발했다. 이런 고발들은 점차 여론을 움직여서 공장법, 광산법 같은 노동 보호 입법으로 이어졌다.
초기 노동 운동의 전개
열악한 노동 조건에 맞서 노동자들은 스스로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직종별 기능공들이 중심이 된 직업별 조합이 주를 이뤘다. 이들은 임금 인상과 노동 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1799년과 1800년에 제정된 단결 금지법으로 노동조합 활동은 불법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의 결속은 계속되었다. 1824년 단결 금지법이 폐지된 후에는 본격적인 노동조합 운동이 시작되었다. 1834년에는 로버트 오웬의 주도로 전국 여러 직종의 노동조합이 연합한 '전국 노동조합 대연합'이 결성되기도 했다. 비록 6개월 만에 해체되었지만, 이는 영국 노동 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시도였다.
1830년대부터는 차티스트 운동이라는 정치적 노동 운동도 전개되었다. 차티스트들은 모든 성인 남성에게 선거권을 주고, 비밀 투표를 실시하며, 재산 자격 없이 의회에 진출할 수 있도록 하는 '인민 헌장'을 내걸었다. 이는 단순히 경제적 요구를 넘어서 정치적 권리를 주장한 것으로, 노동계급의 의식 성장을 보여주는 움직임이었다.
사회 개혁의 시작
이런 사회 문제들에 대응해서 점진적인 개혁도 시작되었다. 1833년 공장법은 9세 미만 아동의 공장 취업을 금지하고, 13세 미만 아동의 노동 시간을 하루 9시간으로 제한했다. 1842년 광산법은 10세 미만 아동과 모든 여성의 지하 작업을 금지했다. 1844년 공장법에서는 여성의 노동 시간을 하루 12시간으로 제한했다.
교육 분야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1833년부터 정부가 초등교육에 예산을 지원하기 시작했고, 1870년에는 초등교육법을 제정해서 공교육 체계의 기틀을 마련했다. 종교 단체들도 일요학교나 성인 교육을 통해 노동자들의 문해율 향상에 기여했다.
공중보건 분야의 개혁도 중요했다. 1848년 공중보건법은 지방 정부가 상하수도 시설을 정비하고 전염병을 예방할 의무를 규정했다. 콜레라 같은 전염병이 계급을 가리지 않고 확산되자 상류층도 공중보건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결론
인클로저 운동과 산업혁명은 영국을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변모시킨 결정적인 사건들이었다. 농업 생산성의 향상과 제조업의 발전은 영국을 '세계의 공장'으로 만들었고, 막대한 부와 국력의 기반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동시에 새로운 사회 문제를 낳았다. 농촌에서 밀려난 농민들이 도시 빈민이 되었고, 노동자 계급이라는 새로운 사회 집단이 형성되었다.
열악한 노동 조건과 주거 환경, 극심한 사회 불평등은 19세기 영국 사회의 가장 큰 과제가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문제들에 맞서는 개혁 운동과 노동 운동도 시작되었다. 공장법이나 공중보건법 같은 사회 입법과 노동조합 운동, 차티스트 운동 같은 정치 운동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초기 시도들이었다. 이런 갈등과 개혁의 과정을 통해 영국은 점차 현대적인 민주주의 사회로 발전해나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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