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7년 6월 20일, 18세의 어린 공주 빅토리아가 영국의 왕위에 올랐다. 당시 아무도 이 작은 소녀가 63년간 재위하며 영국을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제국으로 만들어낼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빅토리아 시대(1837-1901)는 영국이 명실상부한 세계 패권국으로 군림한 황금기였다. 세계 GDP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전 세계 해상 무역의 절반을 장악하며, 런던이 세계 금융의 중심지로 우뚝 선 시대였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는 표현이 과장이 아니었던 유일한 시기, 영국은 그야말로 '팍스 브리타니카'의 절정을 구가했다.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와 초기 과제들
빅토리아가 왕위에 오른 1837년의 영국은 여러 면에서 전환기에 있었다. 1832년 제1차 선거법 개정으로 정치 개혁이 시작되었고, 산업혁명의 성과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시에 차티스트 운동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갈등도 심각했고, 아일랜드 문제와 식민지 관리라는 과제도 산적해 있었다.
18세의 어린 여왕에게는 강력한 조력자가 필요했다. 초기에는 어머니인 켄트 공작부인과 그녀의 측근인 존 콘로이가 큰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지만, 빅토리아는 이들의 간섭을 단호히 거부했다. 대신 그녀는 초대 수상이었던 휘그당의 윌리엄 램 멜버른 자작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멜버른은 빅토리아에게 정치적 조언자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가 되었다.
빅토리아의 즉위 초기 가장 큰 과제는 왕권의 위상을 재정립하는 것이었다. 조지 4세와 윌리엄 4세의 치세 동안 왕실의 위신은 크게 떨어진 상태였다. 방탕한 생활과 정치적 무능으로 국민들의 신뢰를 잃었던 것이다. 빅토리아는 도덕적 품행과 성실한 공무 수행으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려 했다.
1840년 빅토리아와 독일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의 알베르트 공자와의 결혼은 이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알베르트는 뛰어난 지성과 도덕적 품격을 갖춘 인물로서 빅토리아의 정치적 파트너가 되었다. 두 사람은 9명의 자녀를 두었고, 이들 대부분이 유럽 각국의 왕실과 결혼하면서 빅토리아는 '유럽의 할머니'로 불리게 되었다.
알베르트 공자는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과학과 기술 발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1851년 대영박람회를 기획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또한 교육과 예술 진흥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빅토리아와 알베르트의 결혼 생활은 당시로서는 매우 모범적이었고, 이는 중산층의 가족 이상과도 부합했다.
1840년대 자유무역 체제의 확립
빅토리아 시대 초기의 가장 중요한 정책 변화는 자유무역 체제의 확립이었다. 1846년 로버트 필 수상이 주도한 곡물법 폐지는 영국이 완전한 자유무역 체제로 전환하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곡물법은 외국산 곡물 수입을 제한해서 지주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법이었지만, 산업자본가들과 노동자들에게는 부담이었다.
곡물법 폐지를 위한 운동은 맨체스터의 면직물 공장주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되었다. 리처드 코브든과 존 브라이트가 이끄는 곡물법 반대 동맹은 전국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이들은 자유무역이 모든 계층에게 이익이 된다고 주장했다. 값싼 외국산 곡물 수입으로 식료품 가격이 내려가면 노동자들의 생활이 개선되고, 동시에 임금 부담이 줄어든 기업들은 더 많은 상품을 수출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1845년 아일랜드 감자 기근이 곡물법 폐지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감자 역병으로 아일랜드 전역에서 기근이 발생했는데, 곡물법 때문에 값싼 외국산 곡물을 수입할 수 없어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100만 명 이상이 굶어죽는 참상을 목격한 필 수상은 곡물법 폐지를 결단했다. 비록 이 결정으로 토리당이 분열되고 필 내각이 무너졌지만, 자유무역 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곡물법 폐지 이후 영국은 다른 분야에서도 관세를 대폭 인하했다. 1850년대까지 대부분의 공산품에 대한 관세가 폐지되거나 크게 낮아졌다. 영국은 자국의 압도적인 산업 경쟁력을 바탕으로 전 세계에 자유무역을 확산시키려 했다. 다른 나라들과 통상협정을 체결할 때도 호혜적 관세 인하를 조건으로 내걸었다.
자유무역 정책은 영국 경제에 즉각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원료 수입 비용이 낮아지면서 제조업의 경쟁력이 더욱 강화되었고, 수출도 크게 늘어났다. 1850년대 영국의 수출은 1840년대 대비 80% 이상 증가했다. 특히 면직물, 철강제품, 기계류의 수출 증가가 두드러졌다. 영국은 '세계의 공장'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대영박람회와 영국의 기술적 우월성 과시
1851년 5월 1일부터 10월 15일까지 런던 하이드파크에서 열린 대영박람회는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자신감과 자부심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건이었다. 이 박람회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국제 산업 박람회로서, 영국의 산업 기술과 제품을 전 세계에 과시하는 무대였다.
박람회의 상징인 크리스털 팰리스는 그 자체로 영국 기술력의 걸작이었다. 조지프 팩스턴이 설계한 이 건물은 철골과 유리로만 만들어진 혁신적 구조물이었다. 길이 563미터, 폭 124미터의 거대한 온실 같은 건물은 불과 17주 만에 완공되었다. 7만 평방미터의 전시 공간에는 전 세계 34개국에서 온 10만여 점의 전시품이 진열되었다.
하지만 박람회의 진짜 주인공은 영국 전시관이었다. 전체 전시 공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영국관에는 최신 증기기관, 정밀 기계류, 철도 장비, 직물 기계 등이 전시되었다. 관람객들은 영국 기술의 정교함과 혁신성에 감탄했다. 특히 코흐스 다이아몬드(106캐럿)와 같은 식민지에서 온 보석들은 영국 제국의 광대함을 보여주었다.
박람회 기간 중 무려 604만 명이 관람했는데, 이는 당시 영국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철도 발달로 지방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런던을 찾았다. 1실링(5펜스)이라는 저렴한 입장료 덕분에 노동자들도 박람회를 관람할 수 있었다. 이는 계급을 초월한 국가적 축제가 되었다.
대영박람회는 경제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입장료 수입만으로도 18만 6천 파운드의 흑자를 기록했다. 더 중요한 것은 영국 제품에 대한 전 세계적 관심이 급증한 것이었다. 박람회를 통해 영국 기업들은 새로운 해외 고객을 확보했고, 수출 주문이 대폭 늘어났다. 1850년대 영국 수출 증가의 상당 부분이 대영박람회 효과였다고 평가된다.
박람회는 또한 영국인들의 자신감과 자부심을 크게 높였다. 영국이 산업 기술에서 다른 나라들을 압도한다는 사실이 명확히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진보'와 '문명'의 선도국이라는 영국인들의 자의식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런 자신감은 이후 영국의 적극적인 해외 진출과 제국 확장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철도 시대의 개막과 국내 시장 통합
1840년대부터 본격화된 철도 건설은 영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1830년 리버풀-맨체스터 철도가 개통된 이후 철도 건설 붐이 일어나면서 1850년대까지 영국 전역에 철도망이 구축되었다. 1850년 영국의 철도 총연장은 1만 킬로미터를 넘어섰고, 1870년에는 2만 4천 킬로미터에 달했다.
철도는 단순한 교통수단을 넘어서 경제와 사회 전반을 변화시키는 혁명적 기술이었다. 우선 운송비가 대폭 절감되면서 상품의 전국적 유통이 가능해졌다. 석탄, 철강, 농산물 등 대량 화물의 장거리 운송이 경제적으로 타산이 맞게 되었다. 맨체스터의 면직물이 런던이나 리버풀까지 빠르고 저렴하게 운송될 수 있었다.
철도 건설 자체도 영국 경제에 큰 자극을 주었다. 철도 한 킬로미터를 건설하려면 수백 톤의 철강과 수만 개의 침목이 필요했다. 1840년대 영국 철 생산량의 절반 이상이 철도 건설에 사용되었다. 기관차와 객차, 화차 제조업도 급성장했다. 철도 건설 과정에서 수십만 명의 일자리가 창출되었다.
철도는 또한 영국을 하나의 통합된 시장으로 만들었다. 이전에는 지역마다 가격 차이가 컸던 상품들이 철도를 통해 전국적으로 균등한 가격을 형성하게 되었다. 런던의 금융시장과 지방의 산업지대가 긴밀하게 연결되면서 자본과 정보의 흐름도 빨라졌다.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통합된 국내 시장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사회적으로도 철도는 큰 변화를 가져왔다. 여행 시간이 대폭 단축되면서 사람들의 이동이 활발해졌다. 런던에서 에든버러까지 마차로는 2주가 걸렸던 것이 철도로는 하루 만에 가능해졌다. 이는 전국적인 신문 유통, 우편 서비스 확대, 관광업 발달 등으로 이어졌다. 빅토리아 시대의 '시공간 압축' 현상이 시작된 것이다.
철도는 사회 계층에도 영향을 미쳤다. 1등석, 2등석, 3등석으로 구분된 객차는 계급 사회를 반영했지만, 동시에 하층민들도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철도 여행은 새로운 대중 문화의 한 부분이 되었고, 해변 휴양지나 산업 도시 견학 같은 새로운 형태의 여가 활동도 생겨났다.
해외 제국의 확장과 체계화
빅토리아 시대는 영국 제국이 지리적으로 최대 규모에 달한 시기였다. 1837년 빅토리아 즉위 당시 영국 제국의 면적은 약 1천만 평방킬로미터였지만, 1901년 그녀가 사망할 때는 3천 4백만 평방킬로미터로 확장되었다. 이는 지구 육지 면적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인도는 영국 제국의 핵심이었다. 1857년 세포이 항쟁(인도 대반란) 이후 영국은 동인도회사 통치를 폐지하고 직접 통치 체제로 전환했다. 1858년 인도 통치법으로 인도 총독부가 설치되었고, 1876년에는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 황제(Empress of India) 칭호를 받았다. 인도는 영국에게 거대한 시장이자 원료 공급지, 그리고 동양 진출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캐나다는 자치 식민지로 발전했다. 1850년대 오스트레일리아 골드러시로 인구가 급증하면서 자치 정부가 수립되었다. 캐나다도 1867년 영국령 북아메리카법으로 자치령이 되었다. 이들 자치 식민지는 영국 본토와 긴밀한 경제적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상당한 독립성을 가졌다.
아프리카에서는 1870년대부터 본격적인 식민지 확장이 시작되었다. 수에즈 운하 주식 매입(1875), 이집트 점령(1882) 등을 통해 동아프리카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남아프리카에서는 다이아몬드와 금광 발견으로 영국인들의 진출이 활발해졌다. 세실 로즈 같은 모험가들이 광대한 영토를 영국 영향권에 편입시켰다.
아시아에서는 중국과 동남아시아로의 진출이 계속되었다. 1842년 제1차 아편전쟁 후 홍콩을 할양받았고, 1856-1860년 제2차 아편전쟁으로 중국 시장을 더욱 확대했다.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버마 등도 차례로 영국 식민지가 되었다. 이들 지역은 동서 무역의 중요한 중계지 역할을 했다.
태평양에서는 수많은 섬들이 영국 영향권에 들어왔다. 피지, 솔로몬 제도, 길버트 제도 등이 영국 보호령이나 식민지가 되었다. 이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를 연결하는 해상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영국은 태평양에서도 해상 패권을 확립했다.
세계 경제의 중심지 런던
빅토리아 시대 런던은 명실상부한 세계 경제의 중심지였다. 세계 금융의 심장부이자 국제 무역의 허브로서 런던의 위상은 독보적이었다. 런던 시티의 금융가들은 전 세계 어디든 자본을 공급할 수 있었고, 런던 증권거래소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영란은행은 사실상의 세계 중앙은행 역할을 했다. 파운드화는 국제 기축통화로서 전 세계 무역 결제의 표준이 되었다. 금본위제 하에서 파운드화의 안정성은 국제 금융 시스템의 근간이었다. 런던의 할인시장에서 결정되는 이자율은 전 세계 자본 이동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해상보험 시장에서도 런던이 절대적 우위를 점했다. 로이드 해상보험조합은 전 세계 선박과 화물의 보험을 담당했다. 런던에서 보험에 가입하지 않으면 국제 무역을 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는 영국이 세계 해상 무역을 통제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상품 거래소도 런던에 집중되었다. 면화, 양모, 곡물, 금속, 차, 설탕 등 주요 원자재의 국제 가격이 런던에서 결정되었다. 발틱 거래소는 곡물과 해운업의 중심지였고, 금속거래소는 구리, 주석, 아연 등의 가격을 좌우했다. 런던의 상인들은 직접 생산에 참여하지 않고도 전 세계 원자재 유통을 통제할 수 있었다.
런던 항구는 세계 최대의 무역항이었다. 템스강 하류에는 거대한 부두들이 줄지어 있었고, 전 세계에서 온 선박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었다. 1860년대 런던 항구의 화물 처리량은 연간 1천만 톤을 넘어섰다. 이는 당시 다른 모든 유럽 항구들을 합친 것보다 많은 규모였다.
이런 경제적 중심지로서의 지위는 런던에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었다. 금융업, 해운업, 보험업, 중개업 등에서 얻는 수익은 제조업 수출 못지않게 중요한 소득원이었다. '보이지 않는 수출'이라고 불린 서비스업 수익 덕분에 영국은 무역 적자에도 불구하고 국제수지 흑자를 유지할 수 있었다.
산업 생산력의 절대 우위
1850년대 영국은 세계 제조업 생산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철 생산량에서는 세계 전체의 50%, 석탄 생산량에서는 60%, 면직물 생산량에서는 무려 70%를 차지했다. 이는 다른 모든 나라들을 압도하는 수준이었다. 당시 프랑스나 독일, 미국의 산업 생산량을 모두 합쳐도 영국 한 나라에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철강업에서 영국의 우위는 특히 압도적이었다. 1850년 영국의 철 생산량은 연간 225만 톤으로, 이는 프랑스(40만 톤), 독일(21만 톤), 미국(56만 톤)을 크게 앞섰다. 영국의 철강 기술도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헨리 베세머가 1856년 개발한 베세머 제철법은 강철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했고, 이는 영국의 기술적 우위를 더욱 확고히 했다.
면직물 공업에서도 영국은 독보적이었다. 맨체스터를 중심으로 한 랭커셔 지역의 면직물 공장들은 전 세계 면직물의 70% 이상을 생산했다. 영국산 면직물은 품질과 가격 경쟁력에서 다른 나라 제품을 압도했다. 인도, 중국, 남미, 아프리카 등 전 세계 어디서든 영국산 면직물을 찾을 수 있었다.
기계 제조업에서도 영국이 선두였다. 증기기관, 방직기계, 철도 장비, 선박 등 산업 기계의 대부분이 영국에서 만들어졌다. 다른 나라들이 산업화를 추진하려면 영국에서 기계를 수입해야 했다. 이는 영국에게 막대한 수출 수익을 안겨주는 동시에 다른 나라들의 산업 발전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했다.
조선업에서는 영국의 독점이 더욱 심했다. 1850년대 전 세계 선박 건조량의 80% 이상이 영국에서 나왔다. 영국 조선소들은 목선에서 철선으로, 범선에서 증기선으로의 전환을 주도했다. 1838년 대서양을 횡단한 최초의 증기선 그레이트 웨스턴호도 영국에서 건조되었다. 영국 상선대는 전 세계 해상 운송의 절반 이상을 담당했다.
이런 압도적인 산업 생산력은 영국에게 무역에서 절대 우위를 가져다주었다. 1860년 영국의 수출액은 1억 6천만 파운드로, 이는 프랑스(8천만 파운드), 독일(7천만 파운드), 미국(4천만 파운드)를 크게 앞서는 규모였다. 영국은 전 세계 수출의 25% 이상을 차지했다.
사회 개혁과 중산층 문화의 확산
빅토리아 시대는 경제적 번영과 함께 사회 개혁도 활발했던 시기였다. 1830년대 차티스트 운동의 압력으로 시작된 정치 개혁이 계속되었고, 노동 조건 개선과 교육 확대 등 사회 전반의 변화가 일어났다. 이런 개혁들은 영국 사회의 안정과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1844년과 1847년 공장법으로 여성과 아동의 노동 시간이 제한되었다. 1847년 공장법은 여성과 18세 미만 남성의 노동 시간을 하루 10시간으로 제한했다. 이는 산업혁명 초기의 가혹한 노동 조건을 개선하는 중요한 진전이었다. 1850년에는 토요일 오후 근무가 금지되어서 '주말'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교육 분야에서도 큰 발전이 있었다. 1833년부터 정부가 초등교육에 예산을 지원하기 시작했고, 1870년 초등교육법으로 의무교육 제도가 도입되었다. 사립학교와 공립학교가 경쟁하면서 교육의 질도 향상되었다. 중등교육과 대학교육도 확대되어서 중산층 자녀들의 교육 기회가 늘어났다.
사회보장 제도의 기초도 마련되었다. 1834년 새로운 구빈법으로 빈민 구제 제도가 개선되었고, 1848년 공중보건법으로 상하수도와 보건 위생이 향상되었다. 콜레라 같은 전염병 예방을 위한 공중보건 시설 확충으로 도시 생활 환경이 크게 개선되었다.
빅토리아 시대는 또한 중산층 문화가 꽃핀 시기였다. 산업혁명으로 부를 축적한 중산층들은 독특한 생활 양식과 가치관을 발전시켰다. 근면, 검소, 도덕성을 중시하는 '빅토리아적 가치'가 사회 전반에 확산되었다. 가정은 사회의 기본 단위로 여겨졌고, 여성은 '가정의 천사'로서 도덕적 순결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관념이 강화되었다.
중산층의 여가 문화도 발달했다. 소설 읽기, 음악 감상, 연극 관람 등이 대중화되었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들은 연재 소설 형태로 발표되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올리버 트위스트』, 『데이비드 코퍼필드』, 『위대한 유산』 같은 작품들은 빅토리아 시대 영국 사회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과학과 기술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1859)은 진화론을 제시해서 큰 논란을 일으켰지만, 동시에 과학적 사고의 확산에 기여했다. 마이클 패러데이의 전기 연구, 제임스 맥스웰의 전자기학 이론 등 영국은 과학 혁명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해상 패권과 자유무역 체제의 수호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패권은 무엇보다 압도적인 해군력에 기반했다. 영국 해군은 '투파워 스탠더드' 정책을 유지했는데, 이는 영국 해군력이 다른 어떤 두 나라 해군을 합친 것보다 강해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1860년대 영국은 전 세계 군함의 절반 이상을 보유하고 있었다.
1850년대부터 시작된 철갑함 시대에도 영국이 선두를 달렸다. 1860년 HMS 워리어는 세계 최초의 철갑 전함으로서 해군사에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었다. 영국은 계속해서 신기술을 도입하며 해군의 우위를 유지했다. 1870년대에는 어뢰와 어뢰정도 개발했다.
전 세계에 흩어진 해군 기지들은 영국 해군력 투사의 핵심이었다. 지브롤터, 몰타, 수에즈, 아덴, 봄베이, 홍콩, 시드니 등에 주요 해군 기지를 두고 전 세계 해상 교통로를 통제했다. 이들 기지는 석탄 보급과 수리 시설을 제공해서 영국 상선과 군함이 전 세계 어디든 갈 수 있게 해주었다.
영국은 이런 해군력을 바탕으로 자유무역 체제를 전 세계에 확산시켰다. 다른 나라들이 보호무역 정책을 펼치면 영국은 외교적 압력을 가하거나 때로는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시장을 개방시켰다. 1854년 일본의 개항, 1858년 중국의 추가 개방 등이 그런 사례들이었다.
'포함 외교(Gunboat Diplomacy)'라고 불린 이런 정책은 영국의 경제적 이익을 확보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영국은 정치적 지배 없이도 경제적 영향력만으로 다른 나라들을 통제할 수 있었다. 이는 직접적인 식민지 통치보다 비용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영국의 자유무역 정책은 다른 나라들에게는 양날의 검이었다. 값싸고 질 좋은 영국 제품을 수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자국 산업 발전을 저해한다는 단점도 있었다. 많은 나라들이 영국에 원료를 수출하고 제품을 수입하는 종속적 관계에 고착되었다.
사회 모순과 계급 갈등
찬란한 번영 속에서도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는 심각한 사회 모순이 존재했다. 산업혁명의 혜택이 모든 계층에게 고르게 돌아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자본가와 지주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노동자들의 생활 조건은 여전히 열악했다. 런던의 이스트엔드나 맨체스터의 공장 지구에는 빈민가가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1840년대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영국이 '두 개의 국가'로 나뉘어 있다고 표현했다. 하나는 부유한 상류층과 중산층의 영국이고, 다른 하나는 가난한 노동자들의 영국이었다. 이 두 계층 사이의 격차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1867년과 1884년 선거법 개정으로 참정권이 확대되었지만, 경제적 불평등은 지속되었다.
노동 운동도 계속 발전했다. 1850년대부터 숙련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신모델 조합'이 등장했다. 이들은 파업보다는 협상을 통한 문제 해결을 선호했고, 상호부조 기능도 강화했다. 1868년 노동조합회의(TUC)가 결성되면서 노동 운동이 전국적으로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1880년대에는 '신노조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기존의 숙련 노동자 중심 조합과 달리 부두 노동자, 가스 노동자 같은 비숙련 노동자들도 조합을 결성했다. 1888년 런던 성냥 공장 여성 노동자들의 파업, 1889년 런던 부두 노동자들의 파업 등이 대표적 사례였다. 이들은 더욱 투쟁적인 성격을 보였다.
아일랜드 문제도 계속되는 골칫거리였다. 1845-1851년 대기근으로 100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200만 명이 이민을 떠난 후에도 아일랜드인들의 반영 감정은 강했다. 1870년대부터 아일랜드 홈룰 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찰스 스튜어트 파넬이 이끄는 아일랜드 의회당은 자치 정부 수립을 요구했다.
문화와 예술의 황금기
빅토리아 시대는 영국 문화와 예술의 황금기이기도 했다. 문학에서는 찰스 디킨스, 조지 엘리엇, 토머스 하디, 루이스 캐럴 등 세계적인 작가들이 활동했다. 이들의 작품은 급변하는 산업 사회의 모습을 다양한 시각에서 그려냈다. 특히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서 노동자들의 삶이나 도시 빈민 문제를 다룬 '사회 소설'이 유행했다.
시에서는 알프레드 테니슨, 로버트 브라우닝, 엘리자베스 바렛 브라우닝 등이 활동했다. 테니슨의 「율리시스」나 「티투노스」 같은 작품들은 빅토리아 시대의 진취적 정신을 잘 보여준다. 후기로 갈수록 오스카 와일드 같은 작가들이 기존의 빅토리아적 가치에 도전하는 작품을 써서 주목받았다.
미술에서는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 운동이 독특했다.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존 에버렛 밀레이, 윌리엄 홀먼 헌트 등이 주도한 이 운동은 산업화에 대한 반발로서 중세적 이상향을 추구했다. 이들의 작품은 정교한 세부 묘사와 강렬한 색채로 유명했다.
건축에서는 고딕 리바이벌 양식이 유행했다. 찰스 배리와 아우구스투스 퓨긴이 설계한 새 웨스트민스터 궁전(국회의사당)이 대표작이었다. 1834년 화재로 소실된 구 건물을 재건하면서 고딕 양식을 채택했는데, 이는 영국의 전통과 정체성을 상징하려는 의도였다.
음악에서는 아서 설리번과 윌리엄 길버트가 협력한 희가극들이 인기를 끌었다. 『HMS 피나포』, 『미카도』, 『베니스의 곤돌라 사공들』 등은 영국적 유머와 풍자를 담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에드워드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도 빅토리아 시대 말의 대표작이었다.
이런 문화적 성취들은 영국의 '소프트 파워'를 증대시켰다. 영국 문학과 예술이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영어의 위상도 높아졌다. 영국식 교육과 문화가 식민지에 전파되면서 영국의 영향력은 정치·경제적 지배를 넘어서 문화적 차원까지 확대되었다.
과학 기술의 혁신과 발전
빅토리아 시대는 과학 기술 혁신의 시대이기도 했다. 찰스 다윈의 진화론은 생물학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의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종의 기원』(1859)과 『인간의 유래』(1871)는 인간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비록 종교계와 보수층의 강한 반발을 받았지만, 과학적 사고의 확산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물리학에서는 마이클 패러데이와 제임스 맥스웰의 업적이 돋보였다. 패러데이는 전기와 자기의 관계를 밝혀냈고, 맥스웰은 전자기학 이론을 완성했다. 이들의 연구는 훗날 전기 시대의 기초가 되었다. 1860년대부터 전신이 실용화되면서 정보 전달 속도가 혁명적으로 빨라졌다.
화학에서도 중요한 발전이 있었다. 존 돌턴의 원자론, 험프리 데이비의 전기분해 연구, 마이클 패러데이의 전기화학 법칙 등이 현대 화학의 토대를 마련했다. 1856년 윌리엄 퍼킨이 최초의 합성 염료인 모브를 개발한 것은 화학 공업의 출발점이 되었다.
의학 분야에서는 조제프 리스터의 외과 수술 소독법, 존 스노의 콜레라 연구 등이 주목할 만했다. 리스터는 카볼산을 이용한 소독법으로 수술 사망률을 크게 낮췄다. 스노는 1854년 런던 콜레라 창궐 때 수도 펌프가 감염원이라는 것을 밝혀내서 역학의 기초를 마련했다.
교통과 통신 기술의 발전도 놀라웠다. 1838년 그레이트 웨스턴호의 대서양 횡단 성공은 증기선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1866년 대서양 해저 케이블이 완전히 연결되면서 유럽과 북미 사이의 즉시 통신이 가능해졌다. 이는 '지구촌'의 시작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이런 과학 기술의 발전은 영국의 산업 경쟁력을 더욱 강화했다. 새로운 기술들이 곧바로 산업에 응용되면서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었다. 영국은 과학 연구와 기술 개발, 산업 응용이 선순환하는 혁신 시스템을 구축했다.
결론
빅토리아 여왕의 63년 치세는 영국사상 가장 찬란했던 시대였다. 세계 GDP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전 지구 육지 면적의 4분의 1을 지배했던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절정기였다. 런던은 세계 경제의 중심지로서 금융, 무역, 해운의 허브 역할을 했고, 영국의 산업 기술과 문화는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이런 패권의 기초는 산업혁명으로 확보한 압도적인 생산력과 기술력,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해군력이었다. 자유무역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며 전 세계 시장을 개방시키고, 식민지와 반식민지를 통해 원료를 공급받고 제품을 판매하는 구조를 만들어냈다. 영국의 자유무역 제국주의는 19세기 세계 경제 질서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빅토리아 시대의 번영에는 그림자도 있었다. 국내적으로는 계급 간 불평등이 심했고, 아일랜드 문제 같은 민족 갈등도 지속되었다. 대외적으로는 다른 나라들의 종속과 수탈을 바탕으로 한 번영이었다. 19세기 말로 갈수록 독일과 미국의 추격으로 영국의 상대적 우위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빅토리아 시대는 영국이 세계사에 남긴 가장 큰 족적이었다. 의회 민주주의, 자유무역, 법치주의, 과학 기술 등 근대 문명의 핵심 요소들이 이 시대에 확립되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을 딴 이 시대는 영국뿐만 아니라 인류 문명사에서도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다. 1901년 빅토리아 여왕이 서거하면서 하나의 시대가 막을 내렸지만, 그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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