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5년 6월 18일, 벨기에의 작은 마을 워털루에서 벌어진 전투는 유럽사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군과 웰링턴 공작이 지휘하는 연합군 사이의 이 결전은 25년간 계속된 나폴레옹 전쟁의 마지막 장을 장식했다. 하지만 워털루에서의 승리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영국이 나폴레옹을 굴복시킬 수 있었던 진짜 비결은 트라팔가 해전에서 확립한 절대적인 해군력이었다. 바다를 지배한 영국은 대륙봉쇄령을 무력화시키고 반프랑스 동맹을 계속 결성할 수 있었으며, 결국 유럽의 패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나폴레옹 전쟁의 시작과 영국의 전략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후 유럽은 오랫동안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1792년부터 시작된 혁명전쟁은 나폴레옹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1804년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유럽 전체를 프랑스의 패권 아래 두려는 야심찬 계획을 추진했다.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 같은 대륙의 강국들을 차례로 굴복시키면서 프랑스 제국은 유럽 대륙의 거의 전부를 장악하게 되었다.
영국은 이런 나폴레옹의 팽창에 맞서는 핵심 세력이었다. 하지만 영국의 육군 규모는 프랑스에 비해 턱없이 작았다. 1805년 트라팔가 해전 당시 영국 육군은 25만 명 정도에 불과했던 반면, 프랑스는 60만 명이 넘는 대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게다가 나폴레옹군은 혁명 이후 근대적인 징병제와 능력주의를 바탕으로 한 강력한 군대였다. 정면 대결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영국이 택한 전략은 해군력을 바탕으로 한 간접적 접근이었다. 세계 최강의 해군을 활용해서 프랑스를 해상으로 봉쇄하고, 대륙의 다른 강국들과 동맹을 맺어 프랑스를 포위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식민지와 해외 무역을 통해 얻은 막대한 자금으로 반프랑스 동맹국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는 '금 기니 작전'도 병행했다. 영국 혼자서는 나폴레옹을 이길 수 없지만, 유럽 전체를 상대로 싸우게 만들면 프랑스도 버틸 수 없다는 계산이었다.
트라팔가 해전과 해상 패권 확립
나폴레옹도 영국의 이런 전략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1805년 영국 본토 침공 계획을 세웠다.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함대로 영국 해협의 제해권을 장악한 다음, 16만 명의 침공군을 영국에 상륙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만약 이 계획이 성공했다면 나폴레옹 전쟁의 판도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1805년 10월 21일 스페인 트라팔가 곶 앞바다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영국 해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다. 호레이쇼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는 빌뇌브 제독의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완전히 격파했다. 영국군은 전함 1척도 잃지 않았던 반면, 연합함대는 33척 중 22척을 잃는 참패를 당했다. 넬슨 제독은 이 전투에서 전사했지만, 그의 희생으로 영국은 향후 100년간 지속될 해상 패권을 확립했다.
트라팔가 대승의 비결은 넬슨의 혁신적인 전술에 있었다. 기존의 해전에서는 양 함대가 일렬로 늘어서서 포격전을 벌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넬슨은 함대를 두 개의 종대로 나누어 적의 전열을 수직으로 돌파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이렇게 하면 일시적으로 적의 집중 공격을 받을 위험이 있지만, 일단 전열을 뚫고 들어가면 적함들을 개별적으로 격파할 수 있었다. 또한 영국 함대의 우수한 포술과 선원들의 숙련도도 승리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트라팔가 해전 이후 나폴레옹은 영국 본토 침공을 완전히 포기해야 했다. 대신 그는 대륙봉쇄령을 통해 영국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려 했다. 1806년 11월 발표된 베를린 칙령으로 시작된 대륙봉쇄령은 유럽 대륙의 모든 항구에서 영국 상품의 수입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이를 통해 영국의 무역을 차단하고 경제적으로 굴복시키려 했다.
대륙봉쇄령과 영국의 대응
대륙봉쇄령은 분명히 영국 경제에 타격을 주었다. 유럽 대륙은 영국의 최대 수출 시장이었는데, 이 시장이 갑자기 차단된 것이다. 1807년과 1811년에는 경제 위기가 발생해서 실업률이 급증하고 사회 불안이 커지기도 했다. 특히 면직물 공업과 철강 공업 같은 수출 산업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영국은 해군력을 바탕으로 이런 위기를 극복해나갔다. 먼저 밀수를 통해 대륙봉쇄령을 우회했다. 네덜란드의 항구들이나 독일 북부 지역을 통해 영국 상품들이 계속 유럽으로 들어갔다. 나폴레옹이 아무리 봉쇄령을 강화해도 긴 해안선을 모두 감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영국 상인들은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높은 이윤을 얻을 수 있는 밀수에 나섰다.
더 중요한 것은 새로운 시장의 개척이었다. 영국은 남미와 아시아, 북미 등 해외 시장으로 수출을 확대했다. 특히 1808년 스페인이 나폴레옹에게 점령당한 후 남미의 스페인 식민지들이 독립 운동을 벌이자, 영국은 이들과 적극적으로 교역했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등으로 영국 상품이 대량 수출되었다. 인도와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도 급속히 확대되었다.
이런 시장 다변화는 영국 경제에 장기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유럽에만 의존하던 수출 구조에서 벗어나 진정한 의미의 세계 시장을 개척하게 된 것이다. 1812년 무렵에는 영국의 수출액이 대륙봉쇄령 이전 수준을 회복했고, 1814년에는 오히려 더 늘어났다. 반면 프랑스는 영국산 원료와 상품 없이는 경제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설탕, 커피, 면화 같은 식민지 산물들이 부족해지면서 프랑스 국민들의 불만도 커져갔다.
반프랑스 동맹의 결성과 붕괴
영국의 또 다른 전략은 지속적인 반프랑스 동맹 결성이었다. 나폴레옹이 아무리 대륙의 강국들을 굴복시켜도 영국은 바다 건너에서 새로운 동맹을 조직해서 프랑스를 압박했다. 제1차부터 제7차까지 이어진 반프랑스 동맹은 구성원과 결속력에서 차이가 있었지만, 공통점은 영국이 주도하고 영국의 자금이 뒷받침되었다는 것이었다.
1805년의 제3차 동맹에서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참여했다. 비록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나폴레옹에게 패배해서 동맹이 붕괴되었지만, 같은 해 트라팔가에서 영국이 해상 패권을 확립한 것은 더 큰 의미가 있었다. 1806년의 제4차 동맹에는 프로이센이 핵심 역할을 했지만,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이 궤멸되면서 또다시 실패했다.
하지만 영국은 굴복하지 않았다. 1807년 틸지트 조약으로 러시아마저 프랑스 편에 서게 되어 유럽 대륙에서 완전히 고립되었지만, 해군력과 경제력은 여전히 건재했다. 영국은 스페인에서 벌어진 반도 전쟁을 적극 지원하면서 나폴레옹의 발목을 잡았다. 웰링턴 공작이 이끄는 영국군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 프랑스군과 게릴라전을 벌였다. 이 전쟁은 나폴레옹에게 '스페인의 궤양'이라고 불릴 정도로 골치 아픈 문제가 되었다.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는 전세를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60만 대군으로 시작한 러시아 원정에서 살아 돌아온 병사는 3만 명에 불과했다. 이 참패를 계기로 유럽 각국이 프랑스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1813년 제6차 동맹에는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스웨덴이 모두 참여했고,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나폴레옹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
나폴레옹의 몰락과 첫 번째 퇴위
1814년 3월 연합군이 파리에 입성하면서 나폴레옹의 제1제정은 끝이 났다. 나폴레옹은 엘바 섬으로 유배되었고, 부르봉 왕조가 복고되었다. 하지만 루이 18세의 통치는 불안정했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를 거치면서 변화된 프랑스 사회를 구체제로 되돌리려는 시도는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상황을 노린 나폴레옹이 1815년 3월 엘바 섬을 탈출해서 프랑스로 돌아왔다. 루이 18세가 보낸 체포군들이 오히려 나폴레옹 편에 서면서 '100일 천하'가 시작되었다. 나폴레옹은 다시 황제 자리에 올랐지만, 유럽 각국은 즉시 제7차 반프랑스 동맹을 결성해서 그를 제거하기로 결의했다.
나폴레옹은 연합군이 완전히 집결하기 전에 각개격파하려 했다. 벨기에에 주둔하고 있던 웰링턴의 영국-네덜란드군과 블뤼허의 프로이센군을 따로따로 공격해서 제거한 다음,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군이 도착하기 전에 전쟁을 끝내겠다는 계산이었다. 6월 16일 리니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격파한 나폴레옹은 이제 웰링턴군만 물리치면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워털루 전투의 전개
1815년 6월 18일 아침, 워털루 남쪽 평원에서 결정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나폴레옹은 7만 2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있었고, 웰링턴은 6만 8천 명의 영국-네덜란드 연합군을 지휘했다. 병력에서는 프랑스군이 약간 우세했지만, 질적으로는 영국군이 더 정예였다. 특히 영국군의 보병 스퀘어(방진) 전술과 포병의 화력은 유럽 최고 수준이었다.
나폴레옹의 전술은 전통적인 것이었다. 먼저 포병으로 적진을 흔든 다음, 기병으로 돌격해서 전열을 흩트리고, 마지막에 보병이 총공격을 가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웰링턴은 워털루 남쪽의 몽생장 고지에 방어선을 구축하면서 나폴레옹의 공격을 기다렸다. 역사를 통틀어 방어 전투의 명수였던 웰링턴은 지형을 최대한 활용했다.
전투는 오전 11시 30분 프랑스군의 우고몽 농장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이 농장은 영국군 우익을 위협할 수 있는 요지였지만, 영국 근위대가 끝까지 버텨내면서 프랑스군의 공격을 무산시켰다. 오후 1시 30분부터는 프랑스군이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대포 84문이 일제히 포격을 가한 후 달롱 군단의 보병이 돌격했다.
하지만 영국군의 방어는 견고했다. 웰링턴은 병사들을 고지 뒤편에 엎드려 기다리게 했다가 프랑스 보병이 고지 위에 나타나는 순간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프랑스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후퇴해야 했다. 오후 3시 30분부터는 네이 원수가 이끄는 기병 5천 기가 연속 돌격을 감행했지만, 영국군의 방진을 뚫지 못하고 계속 패퇴했다.
프로이센군의 도착과 나폴레옹의 최후
전투가 교착 상태에 빠진 가운데 오후 4시 30분 무렵 전장 동쪽에서 먼지구름이 일어났다. 나폴레옹은 처음에 이것이 그루시 원수의 군단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이었다. 리니 전투에서 패배한 후 퇴각했던 프로이센군이 재정비를 마치고 워털루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프로이센군의 접근으로 나폴레옹은 급격히 불리해졌다. 양면 작전을 펼쳐야 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었다. 오후 6시 나폴레옹은 최정예 부대인 구근위대를 투입해서 최후의 돌격을 명령했다. "근위대는 죽어도 항복하지 않는다"는 전설을 가진 구근위대의 공격은 그야말로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웰링턴도 최후의 힘을 짜냈다. 영국 근위대가 프랑스 구근위대와 정면 충돌했고,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이때 웰링턴이 모자를 들어 신호하자 영국군 전체가 일제히 반격에 나섰다. 동시에 프로이센군도 전장 동쪽에서 공격을 가하면서 프랑스군은 완전히 포위되었다. 무적이라고 여겨졌던 구근위대가 후퇴하자 프랑스군 전체가 총붕괴되었다.
저녁 9시 웰링턴과 블뤼허가 워털루 남쪽 벨 알리앙스 여관에서 만나 승리를 축하했다. 나폴레옹은 간신히 전장을 빠져나왔지만, 그의 정치 생명은 끝났다. 6월 22일 나폴레옹은 다시 퇴위를 선언했고, 이번에는 남대서양의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되어 1821년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빈 체제와 유럽 질서의 재편
워털루 전투 이후 유럽은 빈 체제라는 새로운 질서 아래 들어갔다. 1814년부터 1815년까지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회의에서 유럽 각국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뒤바뀐 국경과 왕조를 재조정했다.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 외상이 주도한 이 체제는 정통주의와 세력균형을 기본 원칙으로 삼았다.
영국은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수혜자가 되었다. 영국은 유럽 대륙에서는 세력균형을 유지하면서도 해외에서는 독보적인 지위를 확보했다. 몰타, 아이오니아 제도, 케이프 식민지, 실론, 모리셔스 등 전략적 요충지들을 영구히 차지했다. 특히 지브롤터와 몰타를 확보함으로써 지중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빈 체제는 또한 신성동맹과 사중동맹이라는 보수적 국제체제를 만들어냈다.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이 주도한 신성동맹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서 혁명과 자유주의를 억압하려 했다.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의 사중동맹은 프랑스의 재팽창을 막고 유럽의 현상유지를 도모했다. 이런 보수 연대는 1848년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약 30년간 유럽의 평화를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영국 패권의 확립과 산업혁명의 가속
나폴레옹 전쟁의 승리는 영국에게 19세기 전체를 지배할 패권국의 지위를 안겨주었다. 더 이상 프랑스라는 라이벌이 없어진 상황에서 영국은 '팍스 브리타니카'의 시대를 열어갔다. 세계 최강의 해군력을 바탕으로 전 세계 바다를 지배하면서 자유무역 체제를 확산시켰다.
전쟁 중에 발전한 영국의 산업력도 평시에 더욱 빛을 발했다. 전쟁 수요로 성장한 철강업과 조선업은 철도와 증기선 건설로 이어졌다. 1825년 스톡턴-달링턴 간 철도가 개통된 것을 시작으로 영국 전역에 철도망이 깔리기 시작했다. 1830년 리버풀-맨체스터 철도는 세계 최초의 승객용 철도로 큰 화제를 모았다.
해외 시장도 급속히 확대되었다. 남미 신생 독립국들과의 교역이 본격화되었고, 인도와 중국 시장도 더욱 적극적으로 개척되었다. 1833년 동인도회사의 중국 무역 독점권이 폐지되면서 민간 상인들의 중국 진출이 활발해졌다. 이는 훗날 아편전쟁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금융업에서도 영국의 우위가 확고해졌다. 런던은 세계 금융의 중심지로 부상했고, 파운드화는 국제 기축통화 역할을 하게 되었다. 로스차일드 가문 같은 국제적인 금융 재벌들이 런던을 거점으로 활동하면서 세계 각국에 영국 자본이 진출했다.
사회 변화와 정치 개혁의 압력
나폴레옹 전쟁의 승리는 영국 사회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전쟁 중에 급성장한 산업자본가들과 중산층은 이제 정치적 발언권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기존의 토지 귀족 중심 정치체제에 도전했다. 맨체스터, 버밍엄 같은 신흥 공업도시들은 인구는 많았지만 의회 대표권은 거의 없었다. 반면 인구가 줄어든 농촌 선거구들은 여전히 많은 의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전쟁 중에 연기되었던 정치 개혁 요구가 평화와 함께 다시 고개를 들었다. 1819년 맨체스터에서 일어난 피터루 대학살 사건은 이런 불만이 폭발한 대표적인 사례였다. 의회 개혁을 요구하는 평화적인 집회에 기마대가 돌진해서 11명이 죽고 400여 명이 다쳤다. 이 사건은 영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면서 정치 개혁의 필요성을 부각시켰다.
곡물법 폐지 운동도 활발해졌다. 전쟁 중에 도입된 곡물법은 외국산 곡물 수입을 제한해서 곡물 가격을 높게 유지하는 정책이었다. 이는 토지 귀족들에게는 유리했지만 도시 주민들과 산업자본가들에게는 부담이었다. 높은 식료품 가격은 노동자들의 생활비를 올리고, 그 결과 임금도 올라야 했기 때문이다. 맨체스터를 중심으로 한 자유무역 운동가들은 곡물법 폐지를 강력히 요구했다.
결론
워털루 전투는 단순한 군사적 승리를 넘어, 유럽 질서와 세계사의 향방을 뒤바꾼 거대한 전환점이었다.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하면서 25년에 걸친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이 마침표를 찍었고, 그 과정에서 유럽은 왕정 복고와 세력 균형 체제로 되돌아가는 듯했지만, 그 기저에는 새로운 시대의 흐름이 이미 움트고 있었다.
영국은 워털루 승리의 최대 수혜자였다. 트라팔가 해전에서 확립한 해상 패권, 그리고 금 기니 작전과 반프랑스 동맹을 통한 전략적 포위, 밀수와 신시장 개척으로 대륙봉쇄령을 돌파한 무역 역량, 반도 전쟁 등 간접 전장에 대한 집요한 개입—이 모든 요소가 쌓여 만들어낸 복합적 승리였다.
워털루 이후 빈 체제 아래에서 유럽은 겉보기엔 반동과 복고의 시기로 들어갔지만, 영국은 이를 기회로 삼아 본격적인 제국주의적 확장과 산업 자본주의의 주도권을 확보하게 된다. 세계 곳곳에서 식민지를 확보하고 자유무역체제를 구축한 영국은 19세기 전반 내내 ‘팍스 브리타니카(Pax Britannica)’, 즉 영국 주도의 세계 질서를 형성해 나갔다. 런던은 금융과 해운의 중심지가 되었고, 파운드화는 국제 결제의 표준으로 자리잡았으며, 철도·기계·섬유 산업의 중심국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또한 이 승리는 영국 내부의 정치사회적 변화를 촉진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산업자본가들과 중산층은 정치 참여를 요구하며 점차 개혁을 이끌어냈고, 이는 1832년 제1차 선거법 개정으로 이어졌다. 나폴레옹 전쟁은 결국 외세의 위협을 극복한 국민적 승리이자, 산업과 제국, 자유주의와 정치 개혁이 교차하는 복합적 전환점이었다.
따라서 워털루는 단순히 한 황제의 몰락이 아니라, 근대 유럽의 지각 변동과 영국 중심 세계 질서의 탄생을 상징하는 결정적 순간이었다. 19세기의 지구적 역학은 이 전투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History > Europ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국 역사 49. 1차·2차 대공황과 해외 식민지 수출 확대 - 위기를 기회로 바꾼 제국의 전략 (1) | 2025.05.23 |
---|---|
영국 역사 48. 1819년 피터루 대학살과 의회 개혁 운동 - 차티스트가 꿈꾼 민주주의 (0) | 2025.05.23 |
영국 역사 46. 인클로저 운동과 산업혁명이 낳은 도시 빈민 문제 (0) | 2025.05.23 |
영국 역사 45. 산업혁명의 시작 - 면직물과 증기기관이 바꾼 세계 (7) | 2025.05.23 |
영국 역사 44. 아메리카 독립전쟁의 충격 - 대영제국 최초의 식민지 상실과 새로운 제국 질서의 모색 (0) | 2025.05.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