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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역사 17. 노르만 봉건제와 도메스데이 서베이 - 정복왕의 철저한 통치체제 확립

노르만식 봉건제도의 이식정복자 윌리엄은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승리한 후 잉글랜드 전역에 대한 지배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 본격적인 통치 체제 개편에 나섰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기존 앵글로색슨 귀족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자신의 노르만 추종자들에게 재분배하는 것이었다. 이는 단순한 보상이 아닌 철저한 통치 시스템의 재편이었다.윌리엄은 대륙에서 발전한 노르만식 봉건제를 잉글랜드에 도입했다. 이 제도의 핵심은 모든 토지가 궁극적으로 국왕에게 속한다는 원칙이었다. 국왕은 자신의 토지를 신하들에게 '봉토'(fief)로 나누어 주고, 그 대가로 충성과 군사적 봉사를 요구했다. 이렇게 토지를 받은 이들을 '직봉 영주'(tenant-in-chief) 또는 '왕관 봉신'(crown vassal)이라 불렀다.이 직봉 영주..

History/Europe 2025.05.20

영국 역사 16. 헤이스팅스 전투와 노르만 정복(1066) - 윌리엄의 승리와 영국의 운명이 바뀐 날

운명의 해 1066년과 세 명의 왕위 주장자1066년은 영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로 기록된다. 이 한 해에만 세 명의 왕이 잉글랜드의 왕좌에 앉았고, 마지막 앵글로색슨 왕조가 무너지는 역사적 순간이 찾아왔다. 에드워드 참회왕이 1066년 1월 5일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 위기가 시작됐다. 참회왕이 죽기 직전 웨식스 귀족 출신의 해럴드 고드윈슨을 후계자로 지목했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도 자신이 왕위 계승권을 약속받았다고 주장했다.여기에 노르웨이 왕 하드라다도 왕위에 대한 야심을 드러냈다. 복잡한 정통성 논쟁이 펼쳐지는 가운데, 해럴드 고드윈슨이 가장 먼저 왕관을 차지했다. 에드워드의 장례식 당일인 1월 6일, 웨스트민스터에서 즉위식을 치른 해럴드는 잉글랜드의 강..

History/Europe 2025.05.20

영국 역사 15. 복고된 웨식스와 에드워드 참회왕 - 웨식스 왕조가 부활하고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이 착공된 시대

커누트 이후의 권력 공백1035년 커누트 대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가 건설한 북해 제국에 권력 공백을 남겼다. 그의 유산을 두고 아들들 사이에 권력 쟁탈전이 벌어졌다. 영국과 덴마크의 지배권을 두고 해럴드 헤어풋(첫 번째 부인 앨프기푸의 아들)과 하르타커누트(엠마 왕비의 아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영국 귀족들은 두 파로 나뉘었고, 결국 해럴드가 잉글랜드의 왕좌를 차지했다. 하르타커누트는 덴마크를 지키느라 바빠 즉각적인 대응을 할 수 없었다.해럴드의 짧은 통치 기간(1035-1040)은 정치적 혼란의 시기였다. 그는 왕위 계승 경쟁자로 여겨질 수 있는 에셀레드와 엠마의 아들 알프레드가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체포하여 눈을 멀게 하고 죽게 했다. 이 잔혹한 행위는 에드워드(후에 참회왕으로 알려짐..

History/Europe 2025.05.20

영국 역사 14. 커누트 대왕의 북해 제국 - 덴마크 왕 커누트가 잉글랜드·노르웨이를 통합 지배한 시대

에셀레드 '준비되지 않은 왕'과 영국의 위기10세기 말, 영국은 다시 한번 바이킹의 집중적인 공격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978년 에셀레드 2세가 이복형 에드워드를 암살하고 왕위에 올랐지만, 그는 위기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역사가들은 그에게 '언레디'(Unready, 준비되지 않은)라는 별명을 붙였다. 사실 이 별명은 '레드리스'(Redeless, 조언을 듣지 않는)라는 중세 영어 단어와 그의 이름 에셀레드(Aethelred, 고귀한 조언)의 언어유희에서 비롯된 것이다.에셀레드의 통치 기간은 바이킹 습격의 재개와 맞물렸다. 특히 991년 말던 전투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 전투에서 앵글로색슨 군대는 올라프 트리그바손이 이끄는 노르웨이 바이킹에게 참패했다. 이 패배 이후 에셀레드는 '대네겔드..

History/Europe 2025.05.20

영국 역사 13. 데인법(Danelaw)의 형성 - 바이킹이 동부·북부를 지배하고 데인법 문화가 뿌리내린 시대

데인법 지역의 경계와 형성 과정878년 웨드모어 조약 이후, 영국 땅은 앵글로색슨이 지배하는 웨섹스 중심 지역과 바이킹(데인인)이 지배하는 동부 및 북부 지역으로 나뉘었다. 이 바이킹 지배 지역을 '데인법'(Danelaw)이라 부른다. 데인법 지역은 런던에서 시작해 체스터까지 이어지는 워틀링 가도(Watling Street)를 대략적인 경계로 동북쪽의 영토를 포함했다. 노섬브리아, 동앵글리아, 머시아 동부의 다섯 도시(Five Boroughs: 더비, 노팅엄, 레스터, 링컨, 스탬포드) 등 영국의 넓은 지역이 데인법에 포함되었다.데인법이라는 용어는 바이킹이 정착한 지역에서 앵글로색슨의 법 대신 덴마크식 법과 관습이 적용되었기 때문에 붙여졌다. 처음에는 앨프레드 대왕과 바이킹 지도자 구트룸 사이의 협정에 ..

History/Europe 2025.05.20

영국 역사 12. 앨프레드 대왕과 웨식스 방어선 - 버그 경계선 구축과 '던로' 요새 체계의 정비

위기의 웨섹스와 앨프레드의 등장871년 웨섹스 왕국은 존망의 기로에 서 있었다. 바이킹 대군단이 머시아와 동앵글리아를 점령한 후 웨섹스마저 위협하고 있었다. 이 위기의 순간, 앨프레드가 형 에셀레드 1세의 죽음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즉위 직후부터 바이킹과의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 같은 해에만 무려 아홉 번의 전투가 벌어졌고, 앨프레드는 애슈다운 전투에서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윌튼 전투에서 패배했다. 결국 그는 바이킹과 일시적 평화 협정을 맺으며 숨 고를 시간을 벌었다.앨프레드는 21세의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이미 뛰어난 지도력과 전략적 사고를 보여주었다. 그는 단순히 군사적 지도자가 아니라 학자이자 행정가, 입법자였다. 어린 시절 로마로 두 차례 순례를 다녀온 경험이 있었고, 라틴어에 능..

History/Europe 2025.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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