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웨섹스와 앨프레드의 등장
871년 웨섹스 왕국은 존망의 기로에 서 있었다. 바이킹 대군단이 머시아와 동앵글리아를 점령한 후 웨섹스마저 위협하고 있었다. 이 위기의 순간, 앨프레드가 형 에셀레드 1세의 죽음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즉위 직후부터 바이킹과의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 같은 해에만 무려 아홉 번의 전투가 벌어졌고, 앨프레드는 애슈다운 전투에서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윌튼 전투에서 패배했다. 결국 그는 바이킹과 일시적 평화 협정을 맺으며 숨 고를 시간을 벌었다.
앨프레드는 21세의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이미 뛰어난 지도력과 전략적 사고를 보여주었다. 그는 단순히 군사적 지도자가 아니라 학자이자 행정가, 입법자였다. 어린 시절 로마로 두 차례 순례를 다녀온 경험이 있었고, 라틴어에 능통했으며 광범위한 독서를 통해 지식을 쌓았다. 이러한 배경은 그가 후에 군사 전략뿐 아니라 문화적, 행정적 개혁을 추진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878년 에딩턴 전투와 앨프레드의 부활
바이킹과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876년 바이킹 지도자 구트룸이 이끄는 새로운 군대가 웨섹스를 침공했다. 초기에 앨프레드는 몇 차례 승리를 거두었지만, 878년 1월 바이킹은 기습 공격으로 앨프레드의 궁정이 있던 칩넘을 점령했다. 앨프레드는 소수의 충신들과 함께 서머셋의 애슬니(Athelney) 습지로 피신해야 했다.
역사의 중대한 순간, 앨프레드는 거의 모든 것을 잃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습지에 요새를 구축하고 게릴라전을 펼치며 저항을 이어갔다. 이 시기에 앨프레드가 농부의 오두막에 숨어 있다가 빵을 태워 주인에게 꾸중을 들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역사적 사실보다는 후대의 창작일 가능성이 높지만, 이 이야기는 앨프레드가 어려운 시기를 겪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봄이 되자 앨프레드는 비밀리에 군사를 모았다. 5월 에딩턴 평원에서 구트룸의 바이킹 군대와 결전을 벌였고, 앨프레드의 군대는 대승을 거두었다. 패배한 구트룸은 웨드모어에서 앨프레드와 협상을 진행했고, 여기서 역사적인 협정이 체결되었다. 구트룸은 기독교로 개종하고(세례명은 앨프레드의 대부 역할을 한 앨프레드에 의해 애슬스탄으로 지어짐), 바이킹은 웨섹스에서 철수하여 동앵글리아에 정착하기로 했다. 이로써 영국은 앨프레드가 통치하는 웨섹스와 바이킹이 지배하는 다네로우(Danelaw)로 나뉘게 되었다.
버그(Burh) 네트워크와 방어 체계 혁신
에딩턴 전투의 승리 이후 앨프레드는 방어 체계를 전면적으로 개편했다. 가장 중요한 혁신은 '버그'(burh) 네트워크의 구축이었다. 버그는 요새화된 정착지로, 앨프레드는 전략적 위치에 이러한 요새들을 건설했다. 그는 고대 로마 식민지의 폐허를 재활용하거나, 기존 정착지를 강화하거나, 아예 새로운 요새를 건설했다.
'버그할 히드로'(Burghal Hidage)라는 문서는 앨프레드가 구축한 33개의 버그 목록을 제공한다. 각 버그는 주변 땅의 크기(하이드 단위로 측정)에 따라 방어해야 할 성벽의 길이가 결정되었고, 이에 따라 필요한 병력이 배치되었다. 이 체계는 놀라울 정도로 정교했으며, 어떤 웨섹스 주민도 버그에서 20마일 이상 떨어진 곳에 살지 않도록 계획되었다. 즉, 바이킹 습격이 있을 경우 하루 안에 안전한 요새로 대피할 수 있었다.
옥스퍼드, 윈체스터, 웨어햄, 엑서터 같은 주요 버그들은 단순한 군사 요새가 아니라 상업과 행정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이 버그 네트워크는 후에 영국 도시 발전의 기초가 되었다.
해군력 강화와 바이킹에 대한 맞대응
앨프레드는 또한 해군력 강화에도 힘썼다. 바이킹의 강점 중 하나는 뛰어난 선박과 항해 기술이었다. 앨프레드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새로운 디자인의 전함을 건조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그의 배는 "두 배 길고, 더 높고, 덜 흔들리며, 더 빠른" 특징을 가졌다. 이 함대는 896년 바이킹 선단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며 그 효과를 입증했다.
군사 조직도 개편했다. '파이어드'(fyrd)라 불리는 민병대 시스템을 개선하여 병력의 절반은 농사를 짓고, 나머지 절반은 군사 임무를 수행하는 교대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를 통해 지속적인 방어가 가능해졌고, 농업 생산성도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바이킹의 무기와 전술을 연구하여 그들의 강점을 앵글로색슨 전투 방식에 통합했다. 특히 기병대를 강화하여 기동성을 높이고, 바이킹의 갑작스러운 습격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게 했다.
던로(Danelaw)와의 공존
웨드모어 협정 이후, 영국은 웨섹스가 지배하는 남서부와 바이킹이 지배하는 북동부(던로)로 나뉘었다. 앨프레드는 이 상황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장기적으로 모든 앵글로색슨 지역을 통합하는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던로 지역과의 관계에서 앨프레드는 유연한 접근을 취했다. 무력 충돌을 피하면서 외교와 문화적 영향력을 통해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했다. 특히 구트룸의 개종은 중요한 외교적 성과였다. 기독교는 앵글로색슨과 바이킹 정착민들 사이의 문화적 다리 역할을 했다.
또한 앨프레드는 머시아의 일부를 장악하고 그의 딸 에셀플레다를 머시아의 귀족 에셀레드와 결혼시켜 정치적 동맹을 강화했다. 이 동맹은 후에 앨프레드의 후계자들이 던로 지역을 재정복하는 기반이 되었다.
문화적 부흥과 교육 개혁
앨프레드는 군사적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문화와 교육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바이킹의 침략으로 많은 수도원과 학문 중심지들이 파괴되었고, 앵글로색슨의 문해율은 심각하게 하락했다. 앨프레드는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학자들을 자신의 궁정으로 초빙했다. 웨일스의 아서, 프랑크 왕국의 그림발드, 플랜더스의 요한 등 유럽 각지에서 학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라틴어 작품들을 앵글로색슨어(고대 영어)로 번역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앨프레드 자신도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 교황 그레고리 1세의 「사목 지침」, 아우구스티누스의 「독백」, 오로시우스의 「이교도들에 대항한 역사」 등을 번역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오로시우스 작품의 번역 과정에서 앨프레드는 북유럽과 발트해 지역에 대한 정보를 추가하며 당시 지리적 지식을 확장했다.
앨프레드는 또한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편찬을 시작했다. 이 연대기는 영국 역사에 대한 중요한 기록으로, 후대까지 계속 업데이트되며 이어졌다.
교육 시스템도 개혁했다. 그는 모든 자유민의 자녀들이 기본적인 읽기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이를 위해 궁정 학교를 설립하고, 지방 영주들에게도 비슷한 학교를 세우도록 장려했다. 이러한 노력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통합 법전과 행정 개혁
앨프레드는 법과 정의 체계도 개혁했다. 그는 이전 앵글로색슨 왕들의 법률을 연구하고, 모세의 율법과 기독교 원칙을 통합하여 새로운 법전을 만들었다. 이 법전은 폭력 범죄, 재산권, 여성의 권리 등 다양한 영역을 다루었다.
특히 중요한 것은 보상 체계(wergild)의 정교화였다. 이는 살인이나 상해 등의 범죄에 대해 피해자나 그 가족에게 지불해야 하는 보상금을 정한 것으로, 혈족 간 복수의 순환을 막고 법적 해결을 촉진했다.
행정 제도도 개선했다. 왕국을 여러 샤이어(shire)로 나누고, 각 샤이어를 에얼도맨(ealdorman)이 다스리게 했다. 그 아래에는 샤이어 리브(shire-reeve, 후에 'sheriff'가 됨)가 왕의 이익을 대변하고 세금을 징수했다. 이 행정 구조는 후대 영국 지방 행정의 기초가 되었다.
결론
앨프레드 대왕은 영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그가 없었다면 영국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는 웨섹스가 바이킹에게 정복당할 위기에서 이를 구해냈을 뿐만 아니라, 효과적인 방어 체계인 버그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해군력을 강화했다. 그의 군사적 성과는 그의 후계자들이 던로 지역을 재정복하고 통일 영국의 기초를 닦는 토대가 되었다.
하지만 앨프레드의 업적은 군사적인 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문화적 부흥을 이끌고, 교육을 장려하고, 법률과 행정 제도를 정비했다. 라틴어 작품들을 앵글로색슨어로 번역하고,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편찬을 시작함으로써 영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강화했다.
앨프레드는 899년 10월 26일, 50대 초반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 당시 웨섹스는 바이킹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했고, 영국의 다른 지역을 회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의 아들 에드워드와 손자 애슬스탄은 앨프레드가 시작한 일을 계속해 나갔고, 결국 영국을 통일했다. 앨프레드가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영국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역사는 그에게 '대왕'(the Great)이라는 칭호를 부여했고, 그는 영국 역사상 이 칭호를 얻은 유일한 통치자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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