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셀레드 '준비되지 않은 왕'과 영국의 위기
10세기 말, 영국은 다시 한번 바이킹의 집중적인 공격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978년 에셀레드 2세가 이복형 에드워드를 암살하고 왕위에 올랐지만, 그는 위기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역사가들은 그에게 '언레디'(Unready, 준비되지 않은)라는 별명을 붙였다. 사실 이 별명은 '레드리스'(Redeless, 조언을 듣지 않는)라는 중세 영어 단어와 그의 이름 에셀레드(Aethelred, 고귀한 조언)의 언어유희에서 비롯된 것이다.
에셀레드의 통치 기간은 바이킹 습격의 재개와 맞물렸다. 특히 991년 말던 전투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 전투에서 앵글로색슨 군대는 올라프 트리그바손이 이끄는 노르웨이 바이킹에게 참패했다. 이 패배 이후 에셀레드는 '대네겔드'(Danegeld, 데인인에게 주는 돈)라는 무거운 세금을 도입하여 바이킹에게 공물을 바쳤다. 이는 일시적인 평화를 가져왔지만, 결국 더 많은 바이킹 침략자를 끌어들이는 결과를 낳았다.
상황이 악화되자 에셀레드는 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 1002년 성 브라이스의 날(St. Brice's Day) 대학살에서 그는 영국에 거주하는 모든 덴마크인을 살해하라고 명령했다. 이 무모한 명령은 영국에 정착한 많은 덴마크인의 목숨을 앗아갔고, 덴마크 왕 스베인 포크베아드(Sweyn Forkbeard)의 분노를 샀다. 스베인의 누이가 이 학살의 희생자 중 하나였다고 전해진다.
스베인과 커누트의 잉글랜드 정복
에셀레드의 치명적인 실수 이후, 덴마크 왕 스베인은 복수를 위해 잉글랜드를 침공했다. 1013년, 그는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잉글랜드 북부와 동부를 신속하게 정복했다. 데인법 지역의 주민들은 대부분 스베인을 환영했고, 머시아와 웨섹스도 곧 그에게 항복했다. 런던만이 잠시 저항했지만, 결국 스베인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에셀레드는 노르망디로 망명했다.
하지만 스베인의 승리는 짧았다. 1014년 2월, 잉글랜드 정복 후 불과 5주 만에 그는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덴마크 군대는 스베인의 아들 커누트를 왕으로 선포했지만, 영국 귀족들은 망명 중이던 에셀레드를 다시 불러들였다. 커누트는 일시적으로 덴마크로 물러났다가 1015년 더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1016년 4월, 에셀레드 역시 사망했고, 그의 아들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Edmund Ironside)가 왕위를 계승했다. 에드먼드는 뛰어난 군사 지도자였고 커누트의 군대에 맞서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 그해 10월, 애슐다운 전투에서 두 군대가 맞붙었고, 무승부로 끝났다. 이후 에드먼드와 커누트는 잉글랜드를 분할 통치하기로 합의했다. 에드먼드는 웨섹스를, 커누트는 나머지 지역을 통치하기로 했다.
그러나 불과 몇 주 후인 11월 30일, 에드먼드가 갑자기 사망했다. 그의 죽음의 정확한 원인은 불분명하지만, 암살설도 제기되었다. 어쨌든 에드먼드의 죽음으로 커누트는 잉글랜드 전체의 왕이 되었다.
커누트의 통치 방식과 정책
커누트는 덴마크 출신이었지만, 잉글랜드의 전통을 존중하며 통치했다. 그는 정복자로서가 아니라 합법적인 왕으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즉위 직후, 그는 에드먼드의 아들들과 에셀레드의 다른 자녀들을 제거하지 않고 해외로 추방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에드먼드의 아들들은 헝가리로 보내졌고, 에셀레드와 노르망디 엠마의 아들들인 알프레드와 에드워드(후의 에드워드 참회왕)는 노르망디에 머물렀다.
커누트는 영국과 덴마크의 결합을 강화하기 위해 에셀레드의 미망인인 엠마와 결혼했다. 이 정치적 결혼은 노르망디와의 동맹을 강화하고, 잉글랜드 귀족들 사이에서 그의 지위를 합법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엠마는 강력한 정치적 인물이었고, 커누트의 통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행정적으로 커누트는 잉글랜드를 네 개의 대영지(earldom)로 나누어 통치했다: 웨섹스, 머시아, 이스트앵글리아, 노섬브리아. 각 지역은 실력 있는 백작(earl)에 의해 통치되었다. 특히 고드윈(Godwin)은 웨섹스의 백작으로 임명되어 커누트의 가장 신뢰받는 조언자가 되었다. 고드윈은 후에 잉글랜드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강력한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
커누트는 에셀레드 시대의 법률과 화폐 체계를 대부분 유지했다. 그는 '커누트의 법'(Laws of Cnut)을 발표했는데, 이는 기존 앵글로색슨 법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그는 또한 에셀레드가 도입한 대네겔드를 유지했지만, 이제 그 돈은 바이킹에게 공물로 지불되는 대신 커누트의 군대와 함대를 유지하는 데 사용되었다.
커누트는 기독교 교회에도 큰 지원을 보냈다. 그는 많은 수도원에 토지와 보물을 기부했고, 1027년에는 로마를 순례하기도 했다. 이 순례 중에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드 2세와 만났고, 영국 상인과 순례자를 위한 특권을 협상했다. 커누트는 또한 덴마크와 노르웨이에 기독교를 더욱 확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북해 제국의 건설
커누트는 잉글랜드만 통치한 것이 아니었다. 1019년, 그의 형 하랄드가 사망하자 커누트는 덴마크의 왕위도 계승했다. 이로써 그는 잉글랜드와 덴마크를 아우르는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1028년에는 노르웨이까지 정복하여 그의 제국은 북해 전체를 아우르게 되었다.
이 '북해 제국'(North Sea Empire)은 현대 덴마크, 노르웨이, 잉글랜드, 스코틀랜드의 일부, 스웨덴 일부, 그리고 발트해 연안의 지역을 포함하는 광대한 영토였다. 이는 바이킹 시대 최대의 정치적 성취였으며, 스칸디나비아와 영국의 역사를 연결하는 독특한 시기였다.
커누트는 이 광대한 제국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각 왕국에 부왕을 임명했다. 그의 아들 하르타커누트(Harthacnut)는 덴마크를, 그의 아들 스베인(Sweyn)은 노르웨이를 다스렸다. 잉글랜드는 커누트가 직접 통치했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북해 제국은 무역과 문화 교류의 번영기를 가져왔다. 런던, 요크, 더블린, 헤디비(현 슐레스비히), 비르카 등의 도시들은 활발한 무역망으로 연결되었다. 이 시기에 발견된 고고학적 증거들은 스칸디나비아 예술 양식이 영국에 널리 퍼졌음을 보여준다. 또한 기독교는 스칸디나비아에서 더욱 확고히 자리 잡았다.
커누트의 인간적 모습과 전설
역사적 인물로서의 커누트는 복잡하고 다면적인 성격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냉혹한 정복자이자 현명한 통치자였고, 덴마크인이자 잉글랜드의 왕이었으며, 이교도 전통을 가진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커누트에 관한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그가 바다의 파도에게 명령했다는 전설이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아첨꾼 신하들이 커누트의 위대함을 칭송하며 그가 자연까지도 통제할 수 있다고 말하자, 커누트는 바닷가에 의자를 놓고 밀려오는 파도에게 물러가라고 명령했다. 물론 파도는 그의 명령을 듣지 않았고, 커누트는 신하들에게 왕의 권력에도 한계가 있으며, 오직 신만이 자연을 통제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 이야기는 12세기 역사가 헨리 오브 헌팅던에 의해 기록되었으며, 커누트의 겸손함과 지혜를 보여주는 예로 자주 인용된다.
커누트는 또한 시인과 음악가를 후원하는 문화 애호가였다. 그는 스스로도 시를 지었다고 전해지며, 궁정에 많은 스칸디나비아 시인들을 초청했다. 그중 일부는 '커누트의 찬가'(Knútsdrápa)라는 시를 지어 그의 업적을 칭송했다.
영국인들에게 커누트는 앨프레드 대왕 이후 가장 성공적인 통치자 중 한 명으로 기억된다. 그의 통치 기간은 평화와 번영의 시기였으며, 바이킹 시대의 혼란 후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제국의 붕괴와 커누트의 유산
커누트는 1035년 11월, 샤프츠버리에서 40대 초반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가 건설한 제국의 빠른 붕괴로 이어졌다. 커누트는 두 번의 결혼에서 세 명의 아들을 두었다: 첫 번째 부인 앨프기푸(Aelfgifu)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해럴드 헤어풋(Harold Harefoot)과 스베인, 그리고 엠마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하르타커누트.
커누트는 하르타커누트를 자신의 주요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그는 부왕 역할을 하던 덴마크에 있었다. 이 권력 공백을 해럴드 헤어풋이 이용하여 잉글랜드의 왕좌를 차지했다. 노르웨이에서는 올라프 2세의 아들 마그누스가 스베인을 축출하고 왕국을 되찾았다.
하르타커누트는 덴마크를 지키느라 바빴기 때문에 잉글랜드에 대한 권리를 즉시 주장할 수 없었다. 해럴드 헤어풋은 1040년까지 통치했고, 그가 사망하자 하르타커누트가 마침내 잉글랜드로 와서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그도 1042년, 22세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했다. 자식이 없었던 하르타커누트는 이복형제인 에드워드(에셀레드와 엠마의 아들)를 후계자로 지명했고, 이로써 앵글로색슨 왕조가 에드워드 참회왕으로 복귀했다.
커누트의 북해 제국은 그의 죽음 후 7년 만에 완전히 해체되었지만, 그 영향은 오래 지속되었다. 스칸디나비아와 영국 사이의 문화적, 경제적 연결은 계속되었고, 북유럽에서 기독교의 확산은 이 지역의 역사적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영국 내에서 커누트의 가장 중요한 유산 중 하나는 고드윈 가문의 부상이었다. 웨섹스 백작 고드윈은 에드워드 참회왕 시대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했고, 그의 아들 해럴드 고드윈슨(Harold Godwinson)은 1066년 잠시 잉글랜드의 마지막 앵글로색슨 왕이 되었다.
커누트 시대의 예술과 문학
커누트의 통치 시기는 영국과 스칸디나비아 예술의 흥미로운 융합을 보여준다. 스칸디나비아의 복잡한 동물 문양과 앵글로색슨의 섬세한 세공 기술이 결합된 독특한 예술 스타일이 발전했다. 윈체스터 양식(Winchester Style)으로 알려진 이 미술 형식은 화려한 장식과 생생한 색채가 특징이다.
문학적으로도 중요한 발전이 있었다. 커누트는 스칸디나비아 시인들을 후원했지만, 동시에 앵글로색슨 문학 전통도 보존했다. 이 시기에 「보우울프」와 같은 고대 영웅 서사시가 기록되기 시작했다고 여겨진다. 또한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계속 업데이트되어 커누트의 통치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종교 예술도 번창했다. 커누트와 엠마는 여러 교회와 수도원에 호화로운 성물과 필사본을 기증했다. 특히 뉴 민스터 리버(New Minster Liber Vitae)에는 커누트와 엠마가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는 그들이 자신들을 기독교 군주로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시각 자료다.
바이킹 시대의 끝과 새로운 시작
커누트의 통치는 영국에서 바이킹 시대의 정점이자 사실상의 종말을 의미했다. 그는 바이킹 정복자였지만, 동시에 전통적인 앵글로색슨 왕권을 받아들이고 기독교를 받아들인 통합자였다. 그의 죽음 이후, 북유럽과 영국의 관계는 계속되었지만, 이전의 급습과 정복의 패턴은 크게 감소했다.
1066년 노르만 정복까지의 짧은 기간 동안, 잉글랜드는 에드워드 참회왕과 해럴드 고드윈슨 하에서 다시 한번 앵글로색슨 통치를 경험했다. 그러나 노르웨이의 마지막 위대한 바이킹 왕 하드라다(Hardrada)가 1066년 잉글랜드를 침공했을 때, 그는 스탬포드 브리지 전투에서 해럴드 고드윈슨에게 패배했다. 이 전투는 종종 바이킹 시대의 끝으로 여겨진다.
역설적으로, 해럴드는 노르웨이 바이킹을 물리친 직후, 노르망디(원래 바이킹 정착지)에서 온 윌리엄에게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패배했다. 노르만 정복은 커누트 시대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외국 엘리트 계층을 영국에 들여왔지만, 이번에는 그 영향이 훨씬 더 근본적이고 지속적이었다.
결론
커누트 대왕의 북해 제국은 영국과 스칸디나비아 역사에서 독특하고 중요한 순간을 나타낸다. 단기간이었지만, 이 제국은 두 문화권을 연결하고 오랜 바이킹 시대의 혼란을 종식시키는 역할을 했다. 커누트는 정복자로 시작하여 존경받는 통치자로 발전했으며, 그의 통치는 중세 영국의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발전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그의 제국은 그의 죽음과 함께 해체되었지만, 영국과 스칸디나비아 사이의 연결은 계속되었다. 문화적 교류, 무역 네트워크, 그리고 공유된 종교적 유산은 수세기 동안 유지되었다. 커누트가 만든 평화와 안정의 시기는 후대 영국인들에게 황금기로 기억되었으며, 그는 앨프레드 대왕과 같은 성공적인 통치자의 반열에 올랐다.
바이킹 침략자의 아들로 시작하여 세 왕국의 기독교 군주로 끝난 커누트의 여정은 중세 초기 유럽의 급격한 변화를 상징한다. 그의 북해 제국은 짧았지만 강렬했으며, 영국과 스칸디나비아의 역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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