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학생운동의 여파가 가라앉기 시작한 1970년대 초부터 1980년대 말까지 이탈리아는 극심한 정치 폭력에 시달렸다. 이 시기를 '납의 시대(Anni di piombo)'라고 부르는데, 총탄과 폭탄이 일상을 지배했던 암울한 현실을 표현한 말이다. 좌익 테러 조직인 적군파(Brigate Rosse)를 중심으로 한 극좌 세력과 극우 테러 단체들이 벌인 무차별 폭력은 이탈리아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들었다. 특히 1978년 기독민주당 당수 알도 모로의 납치와 살해 사건은 이 시대의 비극을 상징하는 충격적 사건이었다.
68운동 이후의 급진화
1968년 학생운동은 이탈리아 사회에 깊은 균열을 남겼다. 초기에는 대학 개혁과 사회 민주화를 요구하는 평화적 시위였지만, 점차 기존 체제에 대한 근본적 거부와 폭력적 저항으로 발전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체 게바라의 게릴라 이론 등이 젊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급속히 확산되었다.
기성 좌파 정당들인 공산당(PCI)과 사회당(PSI)이 의회주의 노선을 고수하며 체제 내 개혁을 추구하자, 실망한 급진 세력들은 무장투쟁을 통한 혁명을 꿈꾸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탈리아를 '미국의 신식민지'로 규정하고,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타도하기 위한 '도시 게릴라' 전술을 채택했다.
1969년 12월 밀라노 폰타나 광장의 농업은행에서 발생한 폭탄 테러는 납의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6명이 사망하고 88명이 부상한 이 사건은 처음에는 아나키스트들의 소행으로 여겨졌지만, 훗날 극우 단체의 조작된 테러임이 밝혀졌다. 이른바 '긴장 전략(strategia della tensione)'의 시작이었다.
적군파의 등장과 조직 구조
1970년 밀라노에서 결성된 적군파는 이탈리아 극좌 테러의 대표적 조직이었다. 창립자들인 레나토 쿠르초, 마라 카가돌, 알베르토 프란체스키니는 모두 트렌토 대학 사회학과 출신으로, 68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메트로폴리탄 게릴라'라는 새로운 형태의 도시 무장투쟁을 주창했다.
적군파의 조직 구조는 고도로 은밀하고 위계적이었다. 3-5명으로 구성된 작은 셀(cell) 단위로 나뉘어 활동했으며, 각 셀은 서로의 정체를 모르도록 엄격하게 격리되었다. 최고 지도부인 '전략 방향부'가 전체적인 활동 방침을 결정하고, 지역별로 '전투 대형'이 실제 테러를 실행하는 구조였다.
적군파는 자신들을 '제국주의에 맞서는 인민의 군대'라고 자처했다. 이들이 내세운 목표는 이탈리아를 NATO에서 탈퇴시키고, 미군을 철수시키며, 궁극적으로는 공산주의 혁명을 통해 소비에트 연방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기업가, 판사, 정치인, 언론인 등을 대상으로 한 납치와 살해에 주력했다.
극우 테러와 긴장 전략
좌익 테러와 함께 극우 세력의 폭력도 격화되었다. '흑색 질서(Ordine Nero)', '아방가르디아 나치오날레(Avanguardia Nazionale)', '핵클레이 아르마티 리볼루치오나리(NAR)' 등의 극우 단체들은 폭탄 테러를 통해 사회 불안을 조성했다. 이들의 목표는 혼란을 극대화해 군부 쿠데타나 권위주의 정권 수립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극우 테러의 특징은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무차별 폭탄 테러였다. 1974년 브레시아 광장 폭탄 테러(8명 사망), 1980년 볼로냐 기차역 폭탄 테러(85명 사망) 등은 극우 세력이 저지른 대표적인 학살 사건들이었다. 이러한 테러는 '긴장 전략'이라 불리는데, 사회적 공포와 혼란을 통해 강권 정치에 대한 국민적 열망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였다.
문제는 일부 극우 테러가 정보기관이나 외국 세력과 연계되어 있다는 의혹이었다. 냉전 체제 하에서 이탈리아의 좌경화를 막으려는 CIA와 NATO의 비밀 공작설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실제로 1990년대 들어 '글라디오(Gladio)' 같은 비밀 조직의 존재가 공개되면서 이러한 의혹들이 어느 정도 사실로 확인되었다.
알도 모로 납치 사건의 충격
납의 시대를 상징하는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1978년 3월 16일 발생한 알도 모로 납치 사건이었다. 기독민주당의 최고 지도자이자 5차례 총리를 역임한 모로는 이탈리아 정치사의 거물이었다. 그가 로마 시내에서 적군파에 의해 납치되고, 55일 후 시신으로 발견된 사건은 이탈리아 사회에 엄청한 충격을 주었다.
모로 납치는 정치적 맥락에서 더욱 복잡한 의미를 가졌다. 당시 모로는 공산당과의 '역사적 타협(compromesso storico)'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는 기독민주당과 공산당이 연립정부를 구성해 이탈리아의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자는 구상이었다. 냉전 시대에 서유럽 최대 공산당인 이탈리아 공산당이 정권에 참여하는 것은 국제적으로도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다.
적군파는 모로를 납치한 후 그를 '인민법정'에 세워 '30년간의 반인민적 정치'에 대해 심판한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공산당과의 타협을 추진하는 모로를 '반혁명 세력의 대표'로 규정하고, 감옥에 수감된 동지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하지만 정부는 테러리스트와의 협상을 거부하는 강경 입장을 고수했다.
모로 사건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
모로 납치 기간 동안 이탈리아 정치권은 극심한 분열을 보였다. 줄리오 안드레오티 총리와 기독민주당 주류는 '국가의 이유'를 내세워 테러리스트와의 어떤 협상도 거부했다. 반면 모로의 가족과 일부 정치인들은 인명 구조를 위해 협상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흥미롭게도 공산당은 정부의 강경 노선을 지지했다. 엔리코 베를링게르 서기장은 "국가는 테러에 굴복할 수 없다"며 협상 거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는 공산당이 책임감 있는 정치 세력임을 보여주려는 의도였지만, 동시에 역사적 타협의 추진 동력을 상실하는 결과를 낳았다.
모로 자신은 감금 기간 중 가족과 정치인들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 자신의 석방을 위해 노력해 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정치권은 이를 '압박 하에서 쓰인 것'이라며 무시했다. 결국 1978년 5월 9일 모로의 시신이 로마 시내 한 승용차 트렁크에서 발견됨으로써 사건은 비극적으로 끝났다.
사회적 파장과 반테러 대응
모로 사건은 이탈리아 사회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테러가 더 이상 먼 이야기가 아니라 일상을 위협하는 현실임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정치인들은 경호를 대폭 강화했고, 시민들은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렸다. 정치적 토론이나 집회 참여를 기피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정부는 테러 척결을 위한 강력한 대응에 나섰다. 1978년 반테러 특별법이 제정되어 수사기관의 권한이 대폭 확대되었다. 영장 없는 체포, 장기간 구금, 통신 감청 등이 허용되었고, 테러범에 대한 형량도 크게 늘어났다. 또한 '회개자(pentiti)' 제도를 도입해 동료를 고발하는 테러범에게는 형량 감경 혜택을 제공했다.
카를로 알베르토 달라 키에사 판사를 중심으로 한 반테러 수사팀은 적군파의 조직망을 체계적으로 해체해 나갔다. 회개자들의 증언을 통해 테러 조직의 내부 구조가 속속 밝혀졌고, 주요 지도부들이 차례로 체포되었다. 1980년대 중반이 되자 적군파는 거의 무력화되었다.
납의 시대의 종료와 유산
1980년대 후반 들어 정치 테러는 급격히 감소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와 소련 해체로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환상이 깨졌고, 이탈리아 경제가 안정되면서 사회적 불만도 줄어들었다. 또한 강력한 반테러 수사와 회개자 제도의 효과로 테러 조직들이 와해되었다.
하지만 납의 시대가 남긴 상처는 깊었다. 약 400명이 테러로 목숨을 잃었고, 수천 명이 부상당했다. 무엇보다 정치적 신뢰가 크게 훼손되었다. 극좌와 극우의 폭력은 온건한 정치 세력들 간의 대화와 타협을 어렵게 만들었고, 이탈리아 민주주의의 발전을 크게 저해했다.
이 시기의 경험은 훗날 이탈리아 정치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정치적 극단주의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졌고, 폭력을 통한 정치적 목표 달성은 철저히 거부되었다. 동시에 국가 보안과 시민적 자유 사이의 균형에 대한 성찰도 깊어졌다.
결론
납의 시대는 이탈리아 현대사에서 가장 어두운 장 중 하나였다. 좌익과 우익 극단주의자들이 벌인 무차별 폭력은 민주주의의 기초를 뒤흔들고 수많은 무고한 생명을 앗아갔다. 특히 알도 모로 납치 살해 사건은 정치적 대화와 타협의 가능성을 차단하며 이탈리아 정치 발전에 큰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이러한 시련을 통해 이탈리아는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재확인했고, 폭력이 아닌 평화적 방법을 통한 문제 해결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납의 시대가 남긴 교훈은 오늘날에도 정치적 극단주의와 폭력에 맞서는 중요한 지침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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