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이탈리아 역사 84. 탈공업화와 유럽공동체 가입 - 1980년대 재정적자와 마스트리히트 조약으로 가는 길

SSSCH 2025. 6. 24. 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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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말 두 차례 석유파동과 납의 시대를 겪으며 위기에 빠진 이탈리아는 1980년대 들어 경제 구조의 근본적 변화를 경험했다. 전통적인 중공업 중심에서 서비스업과 첨단 기술로의 전환이 가속화되었고, 동시에 유럽 통합에 적극 참여하며 국제적 위상을 회복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심각한 재정 적자가 누적되었고, 이는 1992년 마스트리히트 조약 체결과 유럽연합 출범을 앞두고 이탈리아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큰 과제가 되었다.

1980년대 경제 구조의 변화

1980년대 이탈리아 경제는 '탈공업화(deindustrializzazione)'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맞이했다. 1950-60년대 경제기적을 이끌었던 철강, 화학, 자동차 등 전통 제조업의 비중이 줄어들고, 대신 금융, 통신, 관광, 패션 등 서비스업이 급속히 성장했다. 이러한 변화는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했지만, 이탈리아의 경우 특히 두드러졌다.

북부 공업지대에서는 대기업들이 생산기지를 해외로 이전하거나 자동화를 통해 고용을 줄이는 현상이 나타났다. 피아트는 1980년 10월 35일간의 파업 끝에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했고, 이를 계기로 노동운동의 영향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반면 중소기업들은 유연한 생산 체계와 틈새 시장 공략을 통해 새로운 활로를 찾았다.

특히 주목할 만한 현상은 '제3이탈리아'의 부상이었다. 북동부의 베네토, 에밀리아 로마냐 지역과 중부의 토스카나, 마르케 지역에서 가족 기업 중심의 산업 클러스터가 형성되었다. 이들 지역은 전통 수공업 기술과 현대적 생산 방식을 결합해 패션, 가구, 기계 부품 등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확보했다.

서비스업의 급속한 성장

1980년대 들어 서비스업은 이탈리아 경제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부상했다. 특히 금융업의 발전이 두드러졌다. 밀라노는 런던, 프랑크푸르트와 함께 유럽의 주요 금융 중심지로 자리잡았고, 이탈리아 은행들은 국제 금융시장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관광업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였다.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등 예술 도시들과 토스카나, 움브리아 등 농촌 지역이 세계적인 관광 명소로 각광받았다. 1980년대 말 이탈리아를 찾는 외국인 관광객은 연간 5천만 명을 넘어섰고, 관광 수입은 국가 경제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패션과 디자인 산업도 이 시기 전성기를 맞았다. 밀라노는 파리와 함께 세계 패션의 양대 축으로 자리잡았고, 아르마니, 베르사체, 돌체앤가바나, 프라다 등 이탈리아 브랜드들이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1980년대 말 밀라노 패션위크는 뉴욕, 파리, 런던과 함께 세계 4대 패션위크로 인정받았다.

제조업의 혁신과 중소기업 모델

전통 제조업이 쇠퇴했지만, 이탈리아 기업들은 혁신을 통해 새로운 경쟁력을 확보했다. 특히 '메이드 인 이탈리' 브랜드의 가치가 크게 높아졌다. 품질과 디자인을 앞세운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시장을 공략하는 전략이 성공을 거두었다.

중소기업 중심의 산업 생태계도 이탈리아의 독특한 강점으로 부각되었다. 가족 경영 기업들은 빠른 의사결정과 유연한 경영으로 시장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했다. 또한 지역별로 특화된 산업 클러스터가 형성되어 기업 간 협력과 경쟁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에밀리아 로마냐의 모데나 지역은 자동차 부품과 포장기계 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페라리, 람보르기니, 마세라티 등 세계적 슈퍼카 브랜드들이 이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고, 관련 부품업체들도 함께 발전했다. 토스카나의 프라토는 텍스타일 산업의 메카로, 베네토의 비첸차는 보석과 금세공업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유럽 통합에의 적극적 참여

이탈리아는 1980년대 들어 유럽 통합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79년 유럽통화제도(EMS) 출범 시 창설 멤버로 참여했고, 1986년 단일유럽의정서 체결에도 앞장섰다. 특히 베티노 크락시 총리(1983-1987)는 유럽 통합을 통한 이탈리아의 국제적 위상 제고에 큰 관심을 보였다.

유럽공동체 내에서 이탈리아의 발언권도 점차 커졌다. 1985-1995년 유럽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자크 들로르와 함께 이탈리아 출신 위원들이 통합 정책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지역 정책과 사회 정책 분야에서 이탈리아의 경험과 노하우가 반영되었다.

하지만 유럽 통합 과정에서 이탈리아가 직면한 가장 큰 과제는 경제 수렴 기준 달성이었다. 인플레이션 억제, 재정 적자 축소, 공공부채 감소 등 유럽연합 가입을 위한 조건들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구조 개혁이 필요했다.

1980년대 재정 위기의 심화

1980년대 이탈리아 경제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급증하는 재정 적자였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방만한 재정 운용이 1980년대 들어 통제 불능 상태에 이르렀다. 1980년 GDP 대비 8%였던 재정 적자는 1985년 13%로 급증했고, 공공부채도 GDP의 80%를 넘어섰다.

재정 적자 증가의 주요 원인은 여러 가지였다. 우선 관대한 연금 제도와 사회보장 지출이 급증했다. 1970년대 도입된 조기 퇴직 제도와 장애 연금의 남용으로 연금 지출이 폭증했다. 1980년대 말 이탈리아의 연금 지출은 GDP의 14%에 달해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이었다.

공공 부문의 비효율성도 재정 악화의 주요 원인이었다. 국영기업들의 만성적 적자, 지방정부의 방만한 지출, 그리고 정치적 목적의 보조금 남발이 재정 건전성을 크게 훼손했다. 특히 남부 개발을 명목으로 한 각종 지원 사업들이 효과적인 성과 없이 예산만 낭비하는 경우가 많았다.

인플레이션과 화폐 정책의 딜레마

1980년대 이탈리아는 높은 인플레이션에도 시달렸다. 1980년 21%에 달했던 인플레이션율은 점차 감소했지만, 여전히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이는 이탈리아 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탈리아 중앙은행(Banca d'Italia)은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긴축 통화 정책을 추진했지만, 정부의 재정 적자 증가와 상충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금리 인상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었지만, 동시에 정부의 이자 부담을 증가시켜 재정 적자를 더욱 악화시켰다.

1981년 '이혼(divorzio)'이라 불리는 중앙은행과 재무부 간의 협약 해지는 이탈리아 통화 정책사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중앙은행이 더 이상 정부 채권을 자동으로 인수하지 않기로 함으로써 통화 정책의 독립성이 강화되었다. 하지만 이는 정부가 시장에서 더 높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해야 함을 의미했다.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향한 여정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독일 통일은 유럽 통합에 새로운 동력을 제공했다. 1991년 12월 마스트리히트에서 열린 유럽이사회에서 경제통화동맹(EMU) 설립과 유럽연합(EU) 창설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탈리아도 이 역사적 합의에 적극 참여했지만, 동시에 엄격한 수렴 기준 달성이라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마스트리히트 조약이 제시한 수렴 기준은 이탈리아에게 매우 도전적이었다. 인플레이션율 3% 이하, 재정 적자 GDP 대비 3% 이하, 공공부채 GDP 대비 60% 이하, 장기 금리 2% 이하 등의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구조 개혁이 불가피했다.

특히 재정 건전성 확보가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 1990년 이탈리아의 재정 적자는 GDP의 11.1%, 공공부채는 97.8%에 달해 수렴 기준과 큰 격차를 보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연금 개혁, 공공 부문 구조조정, 세제 개편 등 광범위한 개혁이 필요했다.

결론

1980년대 이탈리아는 탈공업화와 서비스업 중심의 경제 구조 전환을 경험하며 새로운 발전 모델을 모색했다. 중소기업 중심의 유연한 생산 체계와 고부가가치 제품에 특화한 전략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고, 유럽 통합에의 적극적 참여는 국제적 위상 제고에 기여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누적된 재정 적자와 공공부채는 심각한 구조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1992년 마스트리히트 조약 체결은 이탈리아에게 유럽연합이라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지만, 동시에 엄격한 경제 수렴 기준 달성이라는 도전 과제를 안겨주었다. 이는 1990년대 이탈리아가 겪게 될 정치적 격변과 경제 개혁의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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