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통일을 완성한 이탈리아는 유럽의 새로운 강국으로 자리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트렌티노와 트리에스테 같은 '이탈리아계 미회복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이는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에게 큰 골칫거리였다. 1914년 사라예보에서 총성이 울리며 유럽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때, 이탈리아는 마침내 이 '미완의 통일'을 완성할 기회를 포착했다.
중립에서 참전까지의 복잡한 선택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이탈리아는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와 함께 삼국동맹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정작 전쟁이 시작되자 이탈리아는 '신성한 이기주의'라는 명분 하에 중립을 선언했다. 삼국동맹은 방어적 성격의 조약이었는데,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먼저 세르비아를 공격했기 때문에 이탈리아는 참전 의무가 없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탈리아 정부와 국민들 사이에는 참전을 둘러싸고 깊은 분열이 있었다. 자유주의 정치인 조반니 지올리티를 중심으로 한 중립파는 전쟁이 이탈리아에게 너무 큰 부담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반면 시인 가브리엘레 다누치오와 같은 극렬한 민족주의자들은 "아름다운 전쟁"을 외치며 참전을 강력히 요구했다. 특히 다누치오는 "이탈리아가 역사의 무대에서 위대한 역할을 하려면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젊은이들을 선동했다.
결국 이탈리아는 1915년 5월 런던 조약을 통해 연합국 편에서 참전하기로 결정했다. 이 조약에서 이탈리아는 승리할 경우 트렌티노, 남티롤, 트리에스테, 이스트리아, 그리고 달마티아 연안 일부를 얻기로 약속받았다. 이것이 바로 '이탈리아 이른덴타(미회복 이탈리아)'의 핵심이었다. 이른덴타는 단순히 영토 확장이 아니라 "모든 이탈리아인을 하나의 국가 안에 모으겠다"는 민족주의적 이상이었다.
이손조 전선의 지옥 같은 전투
이탈리아가 참전한 후 주요 전장은 이손조 강 일대였다. 이 지역은 험난한 알프스 산맥과 카르스트 고원이 만나는 곳으로, 군사적으로 매우 어려운 지형이었다. 이탈리아군은 루이지 카도르나 장군의 지휘 하에 오스트리아-헝가리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카도르나는 전형적인 구식 장군이었다. 그는 정면 공격과 포병 공격에 의존하는 전술을 고집했고,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극도로 엄격한 군기를 적용했다. 탈영이나 항명에 대해서는 즉석에서 총살형을 내리는 '데치마지오네(10명 중 1명을 뽑아 처형하는 형벌)'까지 시행했다. 이러한 가혹한 군기로 인해 이탈리아 병사들은 "뒤에서는 장교의 총을, 앞에서는 적의 총을" 맞을 위험에 처해 있었다.
1915년부터 1917년까지 이손조 전선에서는 무려 11차례의 대규모 공격이 이어졌다. 특히 1916년의 6차 이손조 전투에서는 고리치아를 점령하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그 대가는 참혹했다. 수만 명의 이탈리아 병사들이 바위투성이 고원에서 목숨을 잃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도 마찬가지로 큰 피해를 입었다. 병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며 참호 속에서 몇 달씩 버텨야 했다.
카포레토 대참패와 국가적 위기
1917년 10월 24일, 이탈리아 역사상 최악의 군사적 패배가 일어났다. 카포레토 전투에서 독일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연합 공격을 받은 이탈리아군은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이 공격에는 당시 중위였던 에르빈 롬멜도 참여했는데, 그는 나중에 '사막의 여우'로 불리며 2차 대전에서 명성을 떨쳤다.
카포레토 패배는 단순한 군사적 패배를 넘어 이탈리아 사회 전체를 뒤흔들었다. 30만 명의 이탈리아 병사들이 포로로 잡혔고, 수십만 명이 도망쳤다. 베네치아 평원의 상당 부분이 적군 손에 넘어갔고, 베네치아 시민들은 피난을 떠나야 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거의 붕괴 직전까지 갔다.
이 위기 상황에서 이탈리아 국민들 사이에는 묘한 단결 의식이 생겨났다. "조국이 위험에 처했다"는 인식 하에 계급과 지역을 초월한 저항 의지가 나타났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무기여 안녕』에서 묘사한 것처럼, 카포레토 패배는 이탈리아인들에게 전쟁의 참혹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조국애를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피아베 강의 기적적 방어
카포레토 패배 후 카도르나는 해임되고 아르만도 디아즈 장군이 새로운 총사령관이 됐다. 디아즈는 카도르나와 달리 병사들의 복지와 사기에 신경을 썼다. 그는 가혹한 군기를 완화하고, 병사들에게 더 나은 음식과 휴가를 제공했다. 또한 "조국 방어"라는 명확한 목표를 제시하며 군대를 재건했다.
피아베 강은 이탈리아의 마지노선이었다. 만약 이 방어선마저 뚫린다면 이탈리아는 정말로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1918년 6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했을 때, 이탈리아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피아베 강 전투는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영웅적인 방어전 중 하나로 기록된다.
이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은 강을 건너려는 적군을 막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부교를 파괴하고, 포병으로 강변을 쓸어버렸다. 특히 아르디티(이탈리아 특수부대)는 야간 기습 작전으로 적진을 교란시켰다. 이들은 검은 제복을 입고 단검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정예부대였다. 피아베 방어선이 유지되면서 이탈리아는 마침내 전세를 역전시킬 기회를 잡았다.
비토리오 베네토 승리와 전쟁 종료
1918년 10월 말, 이탈리아군은 비토리오 베네토에서 결정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이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내부적으로 분열되고 있었다. 체코인, 헝가리인, 슬라브인들이 각각 독립을 요구하며 제국군의 결속력이 크게 약화됐다. 많은 체코 및 슬라브 병사들이 이탈리아군에 투항하거나 아예 전선을 이탈했다.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은 30만 명의 포로를 잡는 대승을 거뒀다. 이 승리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완전히 무너졌고, 1918년 11월 3일 빌라 주스티 휴전협정이 체결됐다. 이탈리아는 마침내 오랜 숙적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무릎 꿇린 것이다.
전쟁이 끝나자 이탈리아 전체가 승리의 환호에 휩싸였다. 트렌티노와 트리에스테 같은 '미회복 지역'이 드디어 이탈리아로 돌아올 희망이 보였다. 가브리엘레 다누치오는 "이탈리아의 승리는 로마 제국 이후 최대의 영광"이라고 찬양했다. 하지만 이 승리감은 곧 평화회의에서의 실망으로 바뀌게 된다.
생제르맹 조약과 '절름발이 승리'
1919년 파리 평화회의에서 이탈리아는 예상보다 훨씬 적은 보상을 받았다. 생제르맹 조약에 따라 트렌티노, 남티롤, 트리에스테, 이스트리아는 확실히 획득했지만, 달마티아의 대부분과 아드리아 해 연안 도시들은 새로 생긴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넘어갔다. 특히 피우메(현재의 리예카) 문제는 이탈리아에게 큰 상처가 됐다.
이탈리아 대표단을 이끌던 비토리오 올란도 총리는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과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윌슨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이탈리아의 과도한 영토 요구를 거부했다. 올란도는 분노하며 일시적으로 평화회의를 보이콧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언론과 민족주의자들은 이를 '절름발이 승리(비토리아 무틸라타)'라고 비난했다.
특히 가브리엘레 다누치오는 "이탈리아가 60만 명의 전사자를 낸 대가로 받은 것이 이것뿐이냐"며 격분했다. 그는 1919년 9월 의용군을 이끌고 피우메를 불법 점령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이 사건은 후에 무솔리니의 파시즘에 큰 영감을 주었다. 다누치오의 피우메 통치는 15개월간 지속됐는데, 이 기간 동안 그는 로마식 경례, 검은 셔츠, 대중 선동 등 후에 파시스트들이 모방할 많은 요소들을 선보였다.
전쟁의 사회적 충격과 변화
제1차 세계대전은 이탈리아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65만 명에 달하는 전사자는 거의 모든 가정에 상흔을 남겼다. 특히 농촌 지역의 피해가 컸는데, 젊은 남성들의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으면서 전통적인 농업 사회가 크게 흔들렸다.
전쟁 중 군수산업이 급속히 발달하면서 북부 공업지대에는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등장했다. 피아트, 안살도 같은 기업들은 전쟁 특수로 크게 성장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면서 이들 여성 노동자들은 대부분 일자리를 잃어야 했다. 귀환하는 남성 병사들과 여성 노동자들 사이의 일자리 경쟁은 사회적 긴장을 높였다.
무엇보다 전쟁은 이탈리아인들의 국가 의식을 크게 강화시켰다. 남부 출신 병사와 북부 출신 병사가 같은 참호에서 싸우면서 지역주의를 넘어선 '이탈리아인'이라는 정체성이 형성됐다. 하지만 동시에 전쟁의 참혹함을 경험한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기존 정치 체제에 대한 불신도 깊어졌다.
또한 전쟁 중 군대에서 여러 계급이 섞이면서 민주주의 의식도 확산됐다. 귀족 출신 장교와 농민 출신 병사가 함께 싸우면서 전통적인 신분질서가 흔들렸다. 이러한 변화는 전후 정치 혼란의 배경이 됐다.
결론
제1차 세계대전은 이탈리아 현대사의 분수령이었다. 이탈리아는 이 전쟁을 통해 '이탈리아 이른덴타'의 상당 부분을 달성하며 명실상부한 유럽의 주요 국가로 부상했다. 트렌티노와 트리에스테 같은 미회복 지역을 되찾음으로써 통일 과업을 거의 완성했다.
하지만 전쟁의 대가는 혹독했다. 65만 명의 전사자와 막대한 경제적 손실은 이탈리아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특히 '절름발이 승리'라는 인식은 민족주의 세력들의 분노를 자극했고, 이는 곧 파시즘 등장의 토양이 됐다. 카포레토 패배와 피아베 방어선 사수는 이탈리아인들에게 영웅적 기억과 동시에 트라우마로 남았다.
전쟁을 통해 이탈리아는 비로소 진정한 '국민국가'가 됐지만, 동시에 극단적 민족주의와 정치적 불안정의 씨앗도 심어졌다. 생제르맹 조약으로 얻은 것과 잃은 것의 균형은 향후 20년간 이탈리아 정치를 지배할 핵심 쟁점이 됐다. 전쟁 영웅들과 불만 세력들이 만들어낼 '붉은 이년'과 파시즘의 시대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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