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이탈리아 역사 70. 산업화와 남부 문제의 심화 - 토리노-제노바 공업축과 토지세 갈등

SSSCH 2025. 6. 20. 22:01
반응형

통일 이후 이탈리아는 근대화의 길을 걸어야 했지만, 그 과정에서 지역 간 불균형이 더욱 심화되는 모순적 상황을 맞게 된다.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한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이탈리아는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발전은 주로 토리노-제노바를 잇는 북서부 공업 지대에 집중되었고, 남부는 오히려 더욱 낙후되어 갔다. 특히 세제 정책을 둘러싼 남북 갈등은 새로 통일된 국가의 통합성을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통일 이후의 경제적 도전

1870년 로마 점령으로 정치적 통일을 완성한 이탈리아는 이제 경제적 통합이라는 더 어려운 과제에 직면했다. 통일 이전 이탈리아 반도는 여러 개의 독립된 경제권으로 분할되어 있었고, 각 지역마다 서로 다른 화폐, 도량형, 관세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은 단순히 제도적 통일을 넘어 경제 구조 자체의 변화를 요구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지역 간 경제 발전 수준의 격차였다. 북부, 특히 피에몬테와 롬바르디아 지역은 이미 18세기부터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해 있었고, 근대적 은행과 교통망도 어느 정도 갖춰져 있었다. 반면 남부 지역은 여전히 봉건적 농업 경제에 머물러 있었고, 근대적 산업 기반은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이러한 격차는 통일 과정에서 더욱 벌어졌다.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이 주도한 통일은 자연스럽게 북부의 경제 체계와 제도를 전국에 확산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는 남부 지역의 전통적 경제 구조를 급격히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새로운 경제 체계에 적응하지 못한 남부는 더욱 낙후되어 갔다.

재정 상황도 어려웠다. 통일 전쟁과 인프라 건설에 막대한 비용이 들어갔지만, 이탈리아의 경제력은 이를 뒷받침하기에 부족했다. 국가 부채는 급속히 늘어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높은 세율을 부과해야 했다. 문제는 이러한 세 부담이 지역별로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북부 산업화의 시작

1870년대부터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본격적인 산업화가 시작되었다. 특히 토리노와 제노바를 잇는 지역은 이탈리아 산업화의 중심축으로 자리잡았다. 이 지역이 산업 발전의 중심이 된 데는 여러 가지 유리한 조건이 있었다. 우선 알프스에서 흘러내리는 풍부한 수력을 이용할 수 있었고, 제노바 항구를 통해 원료 수입과 제품 수출이 용이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본과 기술, 그리고 숙련된 인력이 집중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사보이 왕가와 피에몬테 귀족들이 축적한 자본, 프랑스와 스위스에서 유입된 기술, 그리고 오랜 수공업 전통을 가진 숙련 노동자들이 산업화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통일 정부의 정책적 지원도 북부 산업화를 가속화하는 요인이었다.

섬유업이 가장 먼저 발달했다. 1870년대 비엘라 지역의 모직물 공업과 베르가모 지역의 면직물 공업이 크게 성장했다. 이들 업체는 처음에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기계를 수입했지만, 점차 자체 기술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특히 알레산드로 로시, 에르메네질도 제냐 등의 기업가들은 품질 향상과 기술 혁신에 투자하여 국제 경쟁력을 확보했다.

철강업과 기계공업도 점차 발달하기 시작했다. 1884년 설립된 테르니 철강회사는 이탈리아 최초의 대규모 철강 기업이었고, 토리노와 밀라노 지역에서는 각종 기계 제조업이 성장했다. 이러한 발전은 철도 건설과 군사력 강화 정책에 힘입은 바가 컸다.

토리노-제노바 공업축의 형성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토리노-제노바를 잇는 지역은 명실상부한 이탈리아의 공업 중심지로 자리잡는다. 이 지역의 산업 발전은 단순히 개별 기업의 성장이 아니라 상호 연관된 산업 클러스터의 형성이라는 특징을 보였다. 원료 공급, 부품 생산, 완제품 조립, 유통에 이르는 전체 가치사슬이 이 지역에 집중되었다.

토리노는 기계공업과 금속가공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1899년 설립된 피아트(FIAT)는 이 지역 산업 발전의 상징이었다. 조반니 아녤리가 설립한 피아트는 처음에는 소규모 자동차 제조업체였지만, 곧 이탈리아 최대의 공업 기업으로 성장했다. 피아트의 성공은 단순히 한 기업의 성과가 아니라 토리노 지역 전체의 산업 생태계가 뒷받침한 결과였다.

제노바는 조선업과 해운업, 그리고 화학공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지중해 최대의 항구 중 하나인 제노바항은 원료 수입과 제품 수출의 관문 역할을 했고, 이를 바탕으로 관련 산업들이 발달했다. 안살도(Ansaldo) 조선소는 이탈리아 해군의 주요 공급업체가 되었고, 몬테카티니 화학회사는 비료와 화학 제품 생산의 선두주자였다.

밀라노는 금융과 상업의 중심지로서 산업화를 뒷받침했다. 밀라노 증권거래소는 이탈리아 자본 시장의 중심이 되었고, 각종 은행과 보험회사들이 집중되었다. 또한 패션과 디자인 산업의 기반도 이 시기에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산업 집중은 북부 지역의 경제력을 크게 강화시켰다. 1890년대 말 이탈리아 전체 공업 생산의 70% 이상이 북부 3개 주(피에몬테, 롬바르디아, 리구리아)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는 남부와의 격차를 더욱 벌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남부 경제의 구조적 문제

북부의 급속한 산업화와 대조적으로 남부 지역은 여전히 농업에 의존하는 후진적 경제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통일 이후 남부 경제가 오히려 더 악화되었다는 점이었다. 이는 여러 가지 구조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우선 토지 소유 구조가 문제였다. 남부는 대토지 소유제(라티푼디움)가 지배적이었는데, 소수의 대지주가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대부분의 농민은 소작농이나 일용 노동자였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농업 생산성 향상을 위한 투자가 이루어지기 어려웠고, 농민들의 구매력도 매우 낮았다.

통일 정부의 정책도 남부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했다. 자유무역 정책으로 인해 남부의 전통 수공업이 북부나 외국 제품과의 경쟁에서 밀려났다. 특히 나폴리와 팔레르모의 비단업, 칼라브리아의 올리브유 가공업 등이 큰 타격을 받았다. 또한 국가 주도의 인프라 투자도 주로 북부에 집중되어 남부는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다.

금융 제도의 차이도 남부 경제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었다. 북부에는 근대적 은행들이 설립되어 산업 자본을 공급했지만, 남부에는 여전히 전통적인 고리대금업이 지배적이었다. 이는 남부에서 근대적 기업의 설립과 성장을 어렵게 만들었다.

교육과 기술 수준의 격차도 심각했다. 북부에 비해 남부의 문맹률은 훨씬 높았고, 기술 교육 기관도 부족했다. 이는 숙련 노동력 부족으로 이어져 산업 발전의 걸림돌이 되었다.

세제 정책과 남북 갈등

통일 이후 이탈리아 정부의 세제 정책은 남부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정부는 막대한 통일 비용과 근대화 투자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높은 세율을 부과해야 했는데, 문제는 이러한 세 부담이 지역별 경제력과 비례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가장 논란이 된 것은 토지세였다. 통일 정부는 카다스트로(지적) 제도를 전국에 통일 적용하면서 토지세를 부과했는데, 이 과정에서 남부가 상대적으로 과중한 부담을 지게 되었다. 북부는 산업화로 인해 토지 이외의 소득원이 늘어나고 있었지만, 남부는 여전히 토지가 주요 자산이었기 때문이다.

더욱 문제가 된 것은 세금 징수 방식이었다. 북부에서는 화폐 경제가 발달해 있어 현금으로 세금을 납부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남부에서는 여전히 물물교환이 일반적이어서 현금 납부가 어려웠다. 이로 인해 많은 남부 농민들이 토지를 팔아 세금을 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염세(鹽稅)도 큰 논란거리였다. 소금은 생활필수품이면서 동시에 식품 보존에 필수적인 것이었는데, 정부는 이에 높은 세금을 부과했다. 이는 특히 염장 식품에 의존하는 비율이 높은 남부 주민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남부에서는 '소금 밀수'가 성행할 정도로 염세에 대한 저항이 컸다.

징병제도 남북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통일 정부는 국방력 강화를 위해 전국적으로 징병제를 실시했는데, 이는 농업 노동력에 의존하는 남부 농가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더욱이 북부 출신들은 교육을 받아 장교가 될 기회가 많았지만, 남부 출신들은 대부분 사병으로 복무해야 했다.

브리간테리즘의 지속과 정부의 대응

남부의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적 불만은 브리간테리즘(brigantaggio)이라고 불리는 무장 저항으로 이어졌다. 1861년 통일 직후 시작된 브리간테 활동은 1870년대에도 계속되었고, 이는 남부 문제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브리간테들은 단순한 산적이 아니라 복합적 성격을 가진 저항 세력이었다. 일부는 부르봉 왕조의 복귀를 꿈꾸는 정치적 반란군이었고, 일부는 사회적 불평등에 항거하는 사회적 저항 세력이었으며, 또 일부는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무법자가 된 농민들이었다. 이들의 활동은 남부 사회의 깊은 모순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정부는 브리간테 문제를 군사적 진압으로 해결하려 했다. 1863년부터 '특별법'을 제정하여 남부 일부 지역에 사실상의 계엄령을 선포했고, 대규모 군대를 투입하여 브리간테들을 소탕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고, 남부 주민들의 중앙 정부에 대한 불신은 더욱 깊어졌다.

하지만 군사적 진압만으로는 브리간테리즘의 근본 원인을 해결할 수 없었다. 경제적 빈곤과 사회적 불평등이 지속되는 한 새로운 저항 세력이 계속 등장했다. 1870년대 말에 가서야 브리간테 활동이 대부분 진정되었지만, 이는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주와 사회 변화

남부의 경제적 어려움은 대규모 인구 이동을 촉발했다. 1880년대부터 남부 농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북부 도시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이는 이탈리아 사회 전체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밀라노, 토리노, 제노바 등 북부 공업 도시들은 급속한 인구 증가를 경험했다.

이러한 내부 이주는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를 야기했다. 북부 도시들은 갑작스런 인구 증가에 대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주택 부족과 생활환경 악화가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또한 남부 출신 이주민들과 북부 원주민들 사이의 문화적 갈등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해외 이주였다. 1880년대부터 시작된 대규모 해외 이주는 주로 남부와 북동부 농촌 지역에서 일어났다. 미국,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으로 수백만 명의 이탈리아인들이 이주했는데, 이는 이탈리아 역사상 전례 없는 규모였다.

해외 이주는 이탈리아 경제에 복합적 영향을 미쳤다. 한편으로는 과잉 인구 문제를 완화하고 이주민들의 송금으로 외화를 확보할 수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젊고 건강한 노동력의 유출로 인한 손실도 컸다. 특히 남부 지역은 이미 부족한 인적 자원이 더욱 줄어드는 악순환에 빠졌다.

정부의 남부 정책과 한계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탈리아 정부도 남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나름의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1876년 집권한 좌파 정부는 남부 개발을 위한 각종 정책을 추진했지만, 그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가장 중요한 정책은 철도 건설이었다. 정부는 남부와 북부를 연결하는 철도망 확충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했다. 1884년 로마-나폴리 간 철도가 완성되었고, 1895년에는 바리까지, 1901년에는 브린디시까지 철도가 연결되었다. 이는 남부의 교통 여건을 크게 개선시켰다.

하지만 철도 건설만으로는 남부 경제의 근본적 변화를 가져오기 어려웠다. 철도는 주로 농산물을 북부로 운송하는 데 이용되었고, 이는 오히려 남부를 북부의 원료 공급지로 고착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철도 건설 과정에서 대부분의 자재와 기술이 북부나 외국에서 조달되어 남부 지역 경제에 미치는 파급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농업 개혁도 시도되었지만 성과는 미미했다. 정부는 대토지 소유제 개혁과 농업 기술 개선을 추진했지만, 기득권 세력의 저항과 자금 부족으로 인해 실질적 변화를 이루지 못했다. 오히려 일부 정책은 대지주들의 이익만 증대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교육 정책에서는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 의무교육제 확대와 함께 남부에도 학교가 늘어났고, 문맹률이 점진적으로 감소했다. 하지만 여전히 북부와의 격차는 컸고, 특히 여성 교육은 크게 뒤처져 있었다.

결론

1870년대부터 1890년대까지의 이탈리아는 근대 자본주의 국가로의 전환기를 겪었다. 북부 지역의 급속한 산업화는 이탈리아를 유럽의 공업국 대열에 합류시켰고, 토리노-제노바 공업축은 이탈리아 경제의 성장 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발전은 지역적으로 극도로 불균등했고, 남부는 오히려 더욱 낙후되어 갔다.

특히 세제 정책을 둘러싼 남북 갈등은 새로 통일된 국가의 통합성을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였다. 토지세, 염세, 징병제 등을 둘러싼 남부의 불만은 단순한 경제적 문제를 넘어 정치적・사회적 갈등으로 확산되었다. 이는 이탈리아가 명목상의 통일을 넘어 실질적인 국민 통합을 이루는 데 큰 걸림돌이 되었다.

이 시기에 형성된 남북 격차와 남부 문제는 이후 이탈리아 역사 전반에 걸쳐 지속되는 구조적 문제가 되었다. 산업화의 혜택이 북부에 집중되고 남부가 상대적으로 소외되는 패턴은 20세기에도 계속되었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이탈리아 사회의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시기의 경험은 이탈리아가 근대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성장통이기도 했으며, 이후 더 포괄적이고 균형잡힌 발전 전략을 모색하는 교훈이 되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