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0년은 이탈리아 역사에서 획기적인 해가 된다. 오랫동안 지연되어온 로마 문제가 마침내 해결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해결은 이탈리아의 계획된 행동이라기보다는 유럽 정세의 급변에 따른 우연한 기회를 포착한 결과였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라는 예상치 못한 변수가 로마의 운명을 바꿔놓았고, 이탈리아는 신속하게 움직여 천년 숙원을 달성하게 된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발발
1870년 7월 19일 프랑스가 프로이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유럽의 정치 지형이 완전히 바뀐다. 나폴레옹 3세는 비스마르크의 교묘한 외교술에 말려들어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를 빌미로 전쟁을 시작했지만, 이는 치명적인 실수였다. 프로이센은 이미 오스트리아를 제압하고 독일 통일의 마지막 단계만 남겨둔 상태였고, 프랑스와의 전쟁은 이를 완성하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탈리아 정부는 처음에는 이 전쟁에 중립을 유지하려 했다. 프랑스와는 1859년 이래 동맹 관계였지만, 로마 문제 때문에 관계가 소원해진 상태였다. 프로이센과는 1866년 동맹의 경험이 있었지만, 그때의 굴욕적 패배 기억도 있었다. 무엇보다 이탈리아는 아직 국력이 약해 대규모 전쟁에 참여할 여력이 부족했다.
하지만 전쟁 초기부터 프랑스군의 열세가 명확해지자 이탈리아의 계산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8월 2일 스피헤렌에서, 8월 6일 뵈르트와 슈피헤렌에서 프랑스군이 연이어 패배하면서 나폴레옹 3세의 제국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탈리아로서는 로마를 차지할 천재일우의 기회가 다가오고 있었다.
프랑스군의 로마 철수
8월 19일, 예상했던 일이 현실이 된다. 나폴레옹 3세가 로마 주둔 프랑스군의 철수를 명령한 것이다. 프로이센군의 공세가 거세지면서 프랑스는 모든 가용 병력을 본토 방어에 투입해야 했다. 1849년 이래 21년간 교황의 세속적 권력을 보호해온 프랑스군이 드디어 로마를 떠나게 되었다.
프랑스군의 철수 소식은 이탈리아 전역에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각지에서 로마 진군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가리발디는 다시 한 번 의용군 조직을 선언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라치아 정부가 신중한 접근을 택했다. 1867년 멘타나에서의 참패를 교훈삼아 무모한 모험보다는 외교적 명분을 확보한 후 행동하기로 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우선 교황 비오 9세에게 협상을 제안했다. 교황의 영적 권위는 보장하되 세속적 권력은 포기하고, 이탈리아 왕국의 보호 하에 종교적 자유를 누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교황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세속적 권력 없이는 교황의 독립성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협상이 결렬되자 이탈리아 정부는 무력 사용을 결정한다. 하지만 이를 침략이 아닌 '질서 회복'이라는 명분으로 포장했다. 로마에서 무정부 상태와 혼란이 일어나고 있으므로 이탈리아군이 개입하여 평화를 회복한다는 논리였다.
라파엘레 카도르나의 로마 진군
9월 11일, 라파엘레 카도르나 장군이 이끄는 이탈리아군 5만 명이 교황령 국경을 넘어 로마로 향한다. 카도르나는 이탈리아 독립전쟁의 베테랑으로, 1866년 쿠스토차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군사적 능력을 인정받고 있던 인물이었다. 이번 작전에서는 그동안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신중하면서도 결단력 있는 지휘를 보여준다.
교황군의 저항은 예상보다 미약했다. 총 1만여 명의 교황군 중 절반은 외국인 용병이었고, 나머지도 대부분 훈련이 부족한 민병대였다. 더욱이 프랑스군이 철수한 후 사기가 크게 떨어진 상태였다. 교황군 지휘관 클레테르만 장군은 상징적 저항만 하고 항복하라는 교황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
이탈리아군은 9월 19일 로마 외곽에 도달한다. 하루 동안의 포위 끝에 9월 20일 새벽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탈리아군의 주공격 목표는 포르타 피아(Porta Pia) 성문이었다. 이곳은 로마 성벽에서 상대적으로 방어가 약한 지점으로 판단되었고, 실제로 교황군의 저항도 다른 곳에 비해 약했다.
포르타 피아 돌파와 로마 점령
9월 20일 오전 5시, 베르사글리에리(저격수) 부대를 선두로 한 이탈리아군의 공격이 시작된다. 포르타 피아 성문 주변에서 벌어진 전투는 비교적 짧았다. 교황군은 상징적 저항만 하고 곧 후퇴했고, 오전 6시 20분 포르타 피아 성벽에 첫 번째 포탄이 명중한다.
이 포탄은 '아름다운 포탄(Bella Botta)'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된다. 성벽에 뚫린 구멍을 통해 베르사글리에리 부대가 로마 시내로 진입했기 때문이다. 오전 10시, 포르타 피아에서 약 50미터 떨어진 성벽이 무너지면서 이탈리아군의 로마 진입이 본격화되었다.
교황군의 저항은 예상보다 빨리 끝났다. 클레테르만 장군은 오전 10시경 백기를 들고 항복을 선언한다.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은 49명이 전사하고 141명이 부상했으며, 교황군은 19명이 전사하고 68명이 부상하는 경미한 피해에 그쳤다. 이는 교황 비오 9세가 과도한 유혈사태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로마 시민들의 반응은 복잡했다. 일부는 이탈리아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했지만, 상당수는 조심스러운 관망 자세를 취했다. 수세기 동안 교황의 신민으로 살아온 로마 시민들에게는 갑작스러운 변화였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불안했다. 더욱이 교황이 바티칸에 스스로를 가두며 저항 의사를 표명하자 많은 시민들이 혼란에 빠졌다.
교황의 '바티칸 감금' 선언
포르타 피아 돌파 소식을 들은 교황 비오 9세는 즉시 바티칸 궁으로 피신한다. 그리고 자신을 '바티칸의 죄수'라고 선언하며 이탈리아 왕국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선언이 아니라 가톨릭교회 전체의 입장을 정하는 중대한 결정이었다.
교황은 바티칸 밖으로 나가기를 거부하고, 이탈리아 정부와의 모든 협상을 중단했다. 또한 세계 각국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이탈리아 왕국에 대한 불복종을 호출했다. 이는 이탈리아 내 가톨릭 신자들을 매우 곤란한 처지에 빠뜨렸다. 그들은 교황에 대한 종교적 충성과 국가에 대한 정치적 의무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다.
비오 9세의 '감금' 선언은 국제적으로도 큰 파장을 일으켰다.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페인 등 가톨릭 국가들은 이탈리아를 강력히 비난했고, 일부는 외교 관계 단절까지 검토했다. 하지만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라는 급박한 상황에서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기는 어려웠다.
로마 주민투표와 이탈리아 편입
이탈리아 정부는 로마 점령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주민투표를 실시하기로 결정한다. 10월 2일 실시된 투표에서 로마 시민들은 이탈리아 왕국 편입에 대해 의견을 표명했다. 투표 결과는 압도적이었다. 투표자 1만 3,681명 중 1만 3,316명이 찬성했고, 반대는 단 46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결과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우선 투표율이 매우 낮았다. 당시 로마의 유권자는 약 16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실제 투표에 참여한 사람은 10분의 1도 안 되었다. 이는 많은 로마 시민들이 교황의 지시에 따라 투표를 보이콧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투표 과정에서 이탈리아군의 존재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있다. 비록 직접적인 압박은 없었지만,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유로운 의사 표현이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탈리아 정부는 이 투표 결과를 근거로 로마 편입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10월 9일, 이탈리아 정부는 공식적으로 로마를 이탈리아 왕국에 편입시킨다고 발표한다. 로마는 이제 이탈리아의 한 지방이 되었고, 교황의 세속적 권력은 바티칸 언덕의 작은 영역으로 축소되었다.
수도 이전 결정과 그 의미
로마 점령이 완료되자 이탈리아 정부는 수도를 피렌체에서 로마로 이전하기로 결정한다. 이는 단순한 행정적 조치가 아니라 깊은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로마는 고대 로마 제국의 수도였을 뿐만 아니라 서구 문명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새로 통일된 이탈리아가 이러한 역사적 유산을 계승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수도 이전에는 실용적인 이유도 있었다. 피렌체는 임시 수도로서의 역할은 했지만,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에는 지리적으로 적합하지 않았다. 로마는 반도의 중앙에 위치해 있어 남북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고, 행정 중심지로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1871년 7월 2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공식적으로 로마에 입성한다. 이는 이탈리아 통일의 완성을 알리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국왕은 퀴리날레 궁을 새로운 왕궁으로 정하고, 이곳에서 통일 이탈리아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가톨릭 세계의 반발과 문화투쟁
로마 점령은 가톨릭 세계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 천년 이상 지속되어온 교황의 세속적 권력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이다. 각국의 가톨릭 세력들은 이를 종교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였고, 이탈리아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이탈리아에 대한 비난 여론이 거셌다.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상황에서 동맹국이었던 이탈리아가 등을 찌른 격이라는 인식이 퍼졌다. 비록 공식적으로는 중립을 지켰지만, 프랑스의 약화를 틈타 로마를 차지한 것은 배신행위라는 비판이 일었다.
독일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비스마르크는 이탈리아의 로마 점령을 묵인했지만, 독일 내 가톨릭 세력들은 강력히 반발했다. 이는 훗날 독일의 '문화투쟁(Kulturkampf)'에도 영향을 미쳤다. 가톨릭교회와 세속 권력 간의 갈등이 유럽 전체에서 격화된 것이다.
이러한 국제적 반발은 이탈리아의 외교적 고립을 심화시켰다. 유럽의 주요 가톨릭 국가들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이탈리아는 새로운 동맹을 모색해야 했다. 이는 훗날 독일・오스트리아와의 삼국동맹 체결로 이어지는 배경이 된다.
보장법과 교황 문제 해결 시도
로마 점령 후 이탈리아 정부는 교황과의 관계 정상화를 위해 노력했다. 1871년 5월 13일 이탈리아 의회는 '보장법(Legge delle Guarentigie)'을 통과시킨다. 이 법은 교황의 종교적 권위를 보장하고, 바티칸에서의 자유로운 활동을 허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보장법에 따르면 교황은 외국 군주에 준하는 예우를 받고, 바티칸에서 완전한 자치권을 누릴 수 있었다. 또한 이탈리아 정부는 교황청에 연간 325만 리라의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이는 상당한 금액으로, 교황청의 운영비를 충당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교황 비오 9세는 보장법을 단호히 거부했다. 이는 이탈리아 정부가 일방적으로 제정한 법이며, 교황의 독립성을 제대로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교황은 세속적 권력의 완전한 회복 없이는 어떤 타협도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교황의 거부로 인해 이탈리아 내에서는 '교황 문제'가 지속되었다. 가톨릭 신자들은 교황의 지시에 따라 이탈리아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고, 이는 새로운 국가의 통합에 큰 장애가 되었다. 이 문제는 1929년 라테라노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58년간 지속되었다.
결론
1870년 9월 20일 포르타 피아 돌파는 이탈리아 통일사의 마지막 장을 장식하는 극적인 사건이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라는 예상치 못한 기회를 포착하여 마침내 로마를 차지함으로써 리소르지멘토의 꿈이 실현되었다. 사르데냐-피에몬테에서 시작된 통일 운동이 60년 만에 로마에서 완성된 것이다.
하지만 이 승리는 새로운 갈등의 시작이기도 했다. 교황과의 관계 악화는 이탈리아 사회에 깊은 균열을 만들었고, 이는 오랫동안 이탈리아 정치의 발목을 잡았다. 또한 로마 점령 과정에서 드러난 국제적 고립은 이탈리아로 하여금 새로운 외교적 선택을 강요했다.
그럼에도 1870년 9월 20일은 이탈리아인들에게 자긍심의 원천이 되었다. 분열되어 있던 반도가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었고, 고대 로마의 영광을 되찾았다는 상징적 의미는 컸다. 포르타 피아는 단순한 성문이 아니라 새로운 이탈리아 탄생의 상징이 되었으며, 매년 9월 20일은 국가 기념일로 기려지게 되었다.
'History > Europ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탈리아 역사 70. 산업화와 남부 문제의 심화 - 토리노-제노바 공업축과 토지세 갈등 (1) | 2025.06.20 |
---|---|
이탈리아 역사 69. 초기 자유주의 정부와 트란스포르미스모 정치 - 지역주의와 클라이언트 정치의 확산 (0) | 2025.06.20 |
이탈리아 역사 67. 로마 문제의 격화 - 교황령 축소와 라테라노 궁 이전을 중심으로 (0) | 2025.06.20 |
이탈리아 역사 66. 제3차 독립전쟁과 베네치아 획득 - 프로이센 동맹에서 쿠스토차 패배까지 (0) | 2025.06.20 |
이탈리아 역사 65. 1866년 제3차 독립전쟁과 프로이센 동맹을 통한 베네치아 획득 및 쿠스토차 패배의 교훈 (2) | 2025.06.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