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이탈리아 역사 69. 초기 자유주의 정부와 트란스포르미스모 정치 - 지역주의와 클라이언트 정치의 확산

SSSCH 2025. 6. 20.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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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점령으로 영토적 통일을 완성한 이탈리아는 이제 진정한 국가 건설이라는 더 어려운 과제에 직면했다. 1870년대부터 1890년대까지 이탈리아를 지배한 자유주의 정부들은 근대 국가의 기본 틀을 만들어가야 했지만, 동시에 심각한 내부 갈등과 구조적 문제들을 해결해야 했다. 특히 트란스포르미스모(trasformismo)라고 불리는 독특한 정치 문화가 형성되면서 이탈리아 정치는 타협과 기회주의가 지배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통일 이후의 정치적 과제들

1870년 로마 점령 이후 이탈리아 정부가 직면한 과제는 산적해 있었다. 우선 법적・행정적 통합이 시급했다. 통일 이전까지 이탈리아 반도에는 서로 다른 법체계와 행정제도가 존재했고, 이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은 복잡하고 어려운 작업이었다. 사르데냐-피에몬테의 알베르토 헌법과 법체계를 전국으로 확대 적용하는 것이 기본 방침이었지만, 지역별 특수성을 고려해야 하는 현실적 어려움이 있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사회적・경제적 통합이었다. 북부의 발달된 공업 지역과 남부의 낙후된 농업 지역 간의 격차는 갈수록 벌어지고 있었고, 이는 정치적 불안정의 원인이 되었다. 또한 교황과의 갈등으로 인해 가톨릭 신자들 상당수가 정치 참여를 거부하고 있어, 국민적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재정 문제도 심각했다. 독립전쟁과 통일 과정에서 막대한 비용이 들었고, 이제는 근대적 인프라 구축과 군사력 강화에 더 많은 예산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경제력은 다른 유럽 열강에 비해 크게 뒤처져 있어, 재정 확보가 큰 난제였다.

자유주의 우파의 집권과 정책

1870년대 이탈리아 정치는 자유주의 우파가 주도했다. 마르코 민겔리-루폴로, 조반니 란차, 마르코 테프텔로 등이 차례로 총리를 맡으면서 보수적 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이들의 기본 철학은 제한된 정부, 자유방임 경제, 질서 유지였다.

자유주의 우파는 우선 법질서 확립에 주력했다. 남부 지역에서 계속되고 있던 브리간테 활동을 강력히 진압하고, 중앙 정부의 권위를 확립하려 했다. 이를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투입하는 강경책을 사용했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법은 남부 주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남북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경제 정책에서는 자유무역을 추진했다. 관세를 낮추고 외국과의 통상을 확대하여 경제 성장을 도모한다는 것이 기본 방침이었다. 특히 영국과의 관계를 중시하여 영국 자본의 유입을 적극 유도했다. 하지만 이는 이탈리아 국내 산업의 경쟁력 약화를 가져왔고, 특히 남부의 전통 수공업이 큰 타격을 받았다.

교육 정책에서는 의무교육제 도입을 추진했다. 1877년 카시-파에타 법이 통과되면서 9세까지의 초등교육이 의무화되었다. 이는 국민적 통합과 근대화를 위한 중요한 조치였지만, 실제 시행에서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특히 남부 지역에서는 학교 건설과 교사 확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문맹률이 여전히 높았다.

자유주의 좌파의 부상과 개혁 시도

1876년 의회선거에서 자유주의 좌파가 승리하면서 이탈리아 정치에 변화가 일어난다. 아고스티노 데프레티스가 총리에 취임하면서 좌파 정부가 출범했다. 자유주의 좌파는 우파보다 더 진보적인 개혁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좌파 정부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선거법 개정이었다. 1882년 선거법 개정으로 유권자 자격이 대폭 확대되었다. 기존에는 높은 재산 기준과 교육 수준을 요구했지만, 개정법에서는 이를 크게 완화하여 유권자 수가 60만 명에서 200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는 중간계층의 정치 참여를 확대하는 중요한 조치였다.

하지만 여전히 전체 인구의 7% 정도만이 선거권을 가질 수 있었고, 노동자와 농민 대부분은 정치 과정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더욱이 문맹률이 높은 남부에서는 실질적인 정치 참여가 제한적이었다. 이는 이탈리아 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경제 정책에서 좌파는 보호무역주의로 방향을 전환했다. 1878년부터 관세를 단계적으로 인상하기 시작했고, 1887년에는 프랑스와 관세전쟁이 벌어질 정도로 보호주의 정책이 강화되었다. 이는 국내 산업 보호라는 명분이 있었지만, 동시에 소비자 부담 증가와 국제 경쟁력 약화라는 부작용도 낳았다.

트란스포르미스모의 등장과 확산

1880년대부터 이탈리아 정치에는 트란스포르미스모라는 독특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는 정치적 원칙보다는 실용적 타협을 중시하는 정치 문화로, 좌파와 우파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특징을 보였다. 데프레티스가 이러한 정치 스타일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트란스포르미스모의 핵심은 의회 내에서의 유연한 연합 형성이었다. 정당보다는 개인적 관계와 지역적 이해관계가 더 중요했고, 정책 결정은 원칙보다는 타협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는 안정적인 정부 운영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동시에 정치적 원칙의 약화와 기회주의의 확산을 가져왔다.

이러한 정치 문화는 이탈리아의 특수한 상황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었다. 통일 이후 이탈리아는 지역별, 계층별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교황과의 갈등으로 인해 상당수 국민이 정치 참여를 거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명확한 정치적 대립보다는 유연한 타협이 더 현실적이었다.

하지만 트란스포르미스모는 정치의 질을 떨어뜨리는 부작용도 있었다. 정치인들은 원칙보다는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게 되었고, 유권자들과의 연결고리도 약화되었다. 이는 훗날 이탈리아 정치의 고질적 문제가 되었다.

지역주의의 심화와 남북 갈등

통일 이후 이탈리아에서는 지역주의가 오히려 더 심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중앙 정부의 정책이 주로 북부의 이익을 반영하면서 남부 지역의 불만이 커졌고, 이는 정치적 갈등으로 이어졌다. 남부 출신 정치인들은 중앙 정부에서 소외되었고, 이는 지역 대표성의 문제를 제기했다.

특히 세제 정책에서 지역 간 갈등이 두드러졌다. 통일 정부는 재정 확보를 위해 높은 세율을 부과했는데, 이는 상대적으로 소득이 낮은 남부 지역에 더 큰 부담이 되었다. 또한 군 복무 의무, 염세(鹽稅) 등 각종 의무와 세금이 남부 주민들에게는 과도한 부담으로 느껴졌다.

이러한 불만은 정치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남부 출신 의원들은 지역 이익을 대변하는 활동을 강화했고, 때로는 정부 정책에 강력히 반발했다. 하지만 이들은 조직적인 정당을 형성하지는 못했고, 개별적이고 분산적인 저항에 그쳤다.

북부 지역에서도 지역주의적 성향이 나타났다. 밀라노, 토리노 등의 경제계는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고, 이는 중앙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결과적으로 이탈리아 정치는 국가적 비전보다는 지역적 이해관계에 따라 좌우되는 경향이 강해졌다.

클라이언트 정치의 확산

트란스포르미스모와 함께 이탈리아 정치에 뿌리내린 것이 클라이언트 정치였다. 이는 개인적 관계와 상호 부조에 기반한 정치 문화로, 남부 지역의 전통적 사회 구조와 결합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정치인들은 유권자들에게 개인적 혜택을 제공하는 대신 정치적 지지를 받는 거래 관계를 형성했다.

클라이언트 정치의 핵심은 '호혜성(reciprocità)'이었다. 정치인은 지지자들에게 일자리, 공공사업, 각종 특혜 등을 제공하고, 지지자들은 선거에서 표를 제공하는 교환 관계였다. 이는 특히 국가의 역할이 제한적이고 개인적 관계가 중요한 남부 지역에서 더욱 일반화되었다.

이러한 정치 문화는 몇 가지 문제를 야기했다. 우선 정책의 일관성과 효율성이 떨어졌다. 정치적 결정이 국가적 이익보다는 개인적・지역적 이해관계에 따라 좌우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부패와 특혜의 온상이 되었다. 공정한 경쟁보다는 개인적 연줄이 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하지만 클라이언트 정치는 이탈리아의 특수한 상황에서는 나름의 기능도 했다. 중앙 정부의 권위가 약하고 지역 간 격차가 큰 상황에서, 개인적 관계를 통한 이익 배분은 어느 정도 사회적 안정을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또한 소외된 지역이나 계층에게도 정치적 혜택이 돌아갈 수 있는 통로를 제공했다.

프란체스코 크리스피의 개혁 시도

1887년 프란체스코 크리스피가 총리에 취임하면서 이탈리아 정치에 새로운 변화가 시도된다. 크리스피는 시칠리아 출신으로 가리발디의 천인대에 참여했던 혁명가 출신이었다. 그는 기존의 트란스포르미스모 정치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보다 원칙적이고 강력한 정부를 지향했다.

크리스피의 가장 중요한 개혁은 행정 제도의 현대화였다. 그는 중앙 집권적 행정 체계를 강화하고, 공무원제도를 개선하여 능력주의를 도입하려 했다. 또한 사법부의 독립성을 강화하고, 부패 척결을 위한 각종 조치를 시행했다.

정치 제도 개혁에서도 의미 있는 변화를 추진했다. 1888년에는 지방자치제를 도입하여 지방 정부의 자율성을 확대했다. 이는 중앙 집권화와 모순되는 측면이 있었지만, 지역의 특수성을 인정하고 민주주의를 확산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크리스피의 개혁은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기존 정치 세력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이 위협받는다고 느꼈고, 지방의 유력 인사들도 중앙 통제 강화에 반발했다. 결국 크리스피는 1891년 스캔들에 휘말려 사임하게 되고, 그의 개혁 시도는 중단되었다.

사회주의 세력의 등장

1880년대부터 이탈리아에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 사상이 전파되면서 노동자와 농민들 사이에서 조직적인 정치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는 기존의 자유주의 정치 구조에 새로운 도전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1882년 밀라노에서 이탈리아 노동자당이 창당되었고, 1892년에는 제노바에서 이탈리아 사회주의 노동자당(후에 이탈리아 사회당)이 결성되었다. 필리포 투라티, 안나 쿨리시코바, 클라우디오 트레베스 등이 지도자로 나서면서 사회주의 운동이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자들은 기존 정치 체제의 근본적 변화를 주장했다. 보통선거권 확대, 8시간 노동제, 사회보장제도 도입 등을 요구하면서 노동자와 농민의 권익 보호를 위해 활동했다. 이들의 등장은 이탈리아 정치 지형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사회주의 세력은 아직 소수에 불과했고, 선거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더욱이 내부적으로도 온건파와 급진파 사이의 갈등이 있어 통일된 행동을 취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이들의 등장은 기존 정치 세력들에게 새로운 과제를 제기했다.

가톨릭 운동의 조직화

교황청이 이탈리아 정치 참여를 금지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가톨릭 세력들은 나름의 조직화를 추진했다. 1874년 오페라 데이 콘그레시(의회 사업회)가 설립되면서 가톨릭 사회 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이들은 직접적인 정치 참여는 하지 않았지만, 사회・경제・문화 활동을 통해 영향력을 확대해 갔다.

가톨릭 운동의 핵심은 사회 문제 해결이었다. 노동자 상호부조회, 농민 협동조합, 저축은행 등을 설립하여 서민들의 생활 개선에 기여했다. 또한 가톨릭 신문과 잡지를 발행하여 교회의 사회 교리를 전파했다.

이러한 활동은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가톨릭 세력이 조직적인 사회 활동을 통해 영향력을 유지하면서, 장기적으로는 정치 참여의 기반을 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1890년대 후반부터는 일부 지역에서 비공식적인 정치 참여가 시작되었다.

결론

1870년대부터 1890년대까지의 이탈리아 정치는 근대 국가 건설의 어려움을 그대로 보여준다. 영토적 통일은 이루었지만 진정한 국민적 통합은 여전히 요원했고, 지역주의와 클라이언트 정치라는 구조적 문제가 뿌리를 내렸다. 트란스포르미스모로 대표되는 이 시기의 정치 문화는 안정성을 제공했지만 동시에 정치적 원칙의 약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이 시기는 이탈리아 민주주의의 기초가 다져진 시기이기도 했다. 선거권의 점진적 확대, 지방자치제 도입, 사회주의와 가톨릭 운동의 조직화 등은 모두 정치 참여의 확대를 의미했다. 비록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이탈리아 사회의 다양한 세력들이 정치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 시기에 형성된 정치 문화와 제도는 20세기 이탈리아 정치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지역주의, 클라이언트 정치, 정치적 타협주의 등은 이탈리아 정치의 고유한 특성으로 자리잡았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이탈리아 정치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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