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이탈리아 역사 67. 로마 문제의 격화 - 교황령 축소와 라테라노 궁 이전을 중심으로

SSSCH 2025. 6. 20.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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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를 획득한 이탈리아 왕국에게는 이제 마지막 난관이 남아 있었다. 바로 로마였다. 영원한 도시 로마는 여전히 교황의 세속적 지배 하에 있었고, 프랑스군이 이를 보호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통일의 완성을 위해서는 반드시 로마를 차지해야 했지만, 그 과정에서 가톨릭 세계 전체와 충돌할 위험이 있었다. 1866년 이후 로마 문제는 이탈리아 정치의 최대 현안으로 떠오르며, 교황과 국왕 사이의 갈등은 점점 더 심화되어 갔다.

교황령의 영토적 축소

1860년대 중반 교황 비오 9세가 다스리는 교황령은 이미 크게 축소된 상태였다. 한때 이탈리아 중부의 광대한 지역을 차지했던 교황령은 이제 로마와 그 주변 지역, 그리고 라치오 일부만 남아 있었다. 1860년 사르데냐군이 마르케와 움브리아를 점령한 이후, 교황의 세속적 권력은 급격히 위축되었다.

교황령의 영토 축소는 단순히 정치적 문제가 아니었다. 이는 가톨릭교회의 경제적 기반을 크게 흔들었다. 교황청의 주요 수입원이었던 토지세와 관세 수입이 급감했고, 이는 교회 운영과 자선 사업에 심각한 차질을 빚었다. 더욱이 이탈리아 각지에서 수도원과 교회 재산이 몰수되면서 교회의 경제적 위기는 더욱 깊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 비오 9세는 점점 더 보수적이고 방어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 1864년 발표된 '오류 목록(실라부스)'에서 그는 자유주의, 사회주의, 합리주의 등 근대적 사상들을 모조리 이단으로 규정했다. 이는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었지만, 교황으로서는 마지막 남은 영토라도 지켜내야 한다는 절박감의 표현이었다.

프랑스군의 보호와 국제적 딜레마

로마를 지키고 있던 것은 나폴레옹 3세가 파견한 프랑스 원정군이었다. 1849년 로마 공화국을 진압한 이후 프랑스군은 계속 로마에 주둔하면서 교황의 세속적 권력을 보호하고 있었다. 이는 프랑스 내 가톨릭 세력의 정치적 지지를 얻기 위한 나폴레옹 3세의 계산된 정책이었다.

하지만 1860년대 들어 이 정책은 점점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1859년 동맹국이었고, 나폴레옹 3세는 이탈리아 통일을 지지한다고 공언했었다. 그런데 로마 문제에서는 정반대 입장에 서 있는 모순적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더욱이 프로이센의 부상으로 독일 문제가 긴급해지면서, 프랑스로서는 이탈리아에 묶여 있을 여유가 없었다.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1864년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에 9월 협정이 체결된다. 이 협정에 따르면 프랑스는 2년 내에 로마에서 철수하되, 이탈리아는 교황령을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이탈리아는 수도를 토리노에서 피렌체로 옮겨 로마에 대한 야망을 포기한 듯한 인상을 주기로 했다.

하지만 이 협정은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이탈리아 국민들은 수도 이전을 로마 포기로 받아들여 격렬히 반발했고, 교황청은 여전히 이탈리아의 위협을 느꼈다. 프랑스 또한 가톨릭 세력의 비판을 받으며 정치적 부담만 늘어났다.

가리발디의 로마 진군 시도

1867년 가리발디가 다시 한 번 로마 진군을 시도한다. 이번에는 1860년 남부 원정처럼 정부의 묵인을 받지 못했다. 라타치 정부는 국제적 고립을 우려하여 가리발디의 행동을 막으려 했지만, 영웅적 명성을 지닌 가리발디를 완전히 통제하기는 어려웠다.

가리발디는 로마 주변에서 봉기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의용군을 조직한다. 하지만 이번 원정은 처음부터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우선 1860년과 달리 로마 내부에서의 지지가 미약했다. 교황의 영향력이 여전히 강했고, 시민들 대부분은 정치적 변화보다는 안정을 원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국제적 고립이었다. 나폴레옹 3세는 9월 협정 위반을 구실로 다시 프랑스군을 로마에 파견했고, 이탈리아 정부도 가리발디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1월 3일 멘타나 전투에서 가리발디군은 교황군과 프랑스군의 연합 부대에게 참패를 당한다. 새로 도입된 샤스포 소총의 위력 앞에 가리발디의 의용군은 속수무책이었다.

멘타나 패배는 가리발디 개인에게는 물론이고 이탈리아 통일 운동 전체에 큰 타격이었다. 무력을 통한 로마 해방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명확해졌고, 이는 이탈리아 정부로 하여금 다른 해결책을 모색하도록 만들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와 교황 무오설

1869년 교황 비오 9세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다. 이는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300년 만에 열리는 전 세계 가톨릭 주교들의 대규모 회의였다. 공의회의 표면적 목적은 교회 교리의 정리와 현대적 도전에 대한 대응이었지만, 실제로는 교황의 권위를 극대화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공의회에서 가장 논란이 된 것은 교황 무오설이었다. 이는 교황이 신앙과 도덕에 관한 사항을 가르칠 때는 절대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교리였다. 이 교리는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프랑스와 독일의 많은 주교들이 반대했고, 심지어 일부는 공의회를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1870년 7월 18일 교황 무오설이 공식 교리로 선포된다. 이는 교황의 영적 권위를 최고조로 끌어올린 사건이었지만, 동시에 세속적 권력의 상실을 정신적 권위로 보상하려는 시도로도 해석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교황 무오설이 선포되는 바로 그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시작되어 로마의 정치적 운명이 다시 한 번 바뀌게 된다.

라테라노 궁 이전과 상징적 의미

교황령이 축소되면서 교황청의 거주지도 변화를 겪었다. 전통적으로 교황들은 라테라노 궁을 주된 거주지로 사용해왔다. 라테라노 궁은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대부터 교황의 공식 거주지였으며, '세상 모든 교회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라테라노 대성당과 함께 가톨릭교회의 상징적 중심지였다.

하지만 1860년대 들어 교황 비오 9세는 점점 더 바티칸 궁에 머물기 시작했다. 바티칸은 성베드로 대성당 옆에 위치해 있어 라테라노보다 더 안전하다고 여겨졌다. 또한 바티칸 언덕은 로마 시내와 약간 떨어져 있어 이탈리아 세력의 압박을 덜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거주지 변화는 단순한 실용적 선택이 아니었다. 라테라노에서 바티칸으로의 이전은 교황권이 방어적 자세로 전환했음을 상징했다. 라테라노는 로마 시민들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어 교황의 세속적 권력을 보여주는 공간이었다면, 바티칸은 순수하게 종교적 권위에 집중할 수 있는 성스러운 영역이었다.

더욱이 바티칸에서는 교황이 점점 고립된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비오 9세는 자신을 '바티칸의 죄수'라고 부르며 이탈리아 왕국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이는 훗날 교황과 이탈리아 국가 간의 갈등이 얼마나 깊어질지를 예고하는 신호였다.

가톨릭 세계의 분열

로마 문제는 이탈리아 내부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이 이 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고, 이는 국제 정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페인 등 전통적 가톨릭 국가들은 교황의 세속적 권력 보호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다.

하지만 각국의 현실적 이해관계는 복잡했다. 프랑스는 독일 통일 과정에서 프로이센과의 대결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했고, 오스트리아는 1866년 패배 이후 내부 개혁에 몰두하고 있었다. 스페인은 내전과 정치적 혼란으로 해외 문제에 개입할 여력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톨릭 세계 내부에서도 의견이 갈리기 시작했다. 일부는 교황의 세속적 권력 포기가 오히려 교회의 영적 권위를 높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대로 전통주의자들은 세속적 권력 없이는 교황의 독립성을 보장할 수 없다고 맞섰다.

특히 프랑스 내에서는 이 문제를 둘러싸고 정치적 대립이 격화되었다. 가톨릭 보수파는 나폴레옹 3세에게 교황 보호를 위한 더 적극적인 조치를 요구했고, 자유주의자들은 시대착오적인 교황의 세속적 권력을 더 이상 지지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탈리아 내부의 갈등

로마 문제는 이탈리아 내부에서도 복잡한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정치적으로는 모든 정파가 로마 통합을 지지했지만, 그 방법론을 둘러싸고는 의견이 엇갈렸다. 온건 자유주의자들은 외교적 해결을 선호했고, 급진파들은 무력 사용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욱 복잡한 것은 종교적 갈등이었다. 이탈리아 국민의 압도적 다수가 가톨릭 신자였지만, 동시에 통일 이탈리아의 국민이기도 했다. 이들은 교황에 대한 종교적 충성과 국가에 대한 정치적 충성 사이에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러한 갈등은 특히 로마와 그 주변 지역에서 심각했다. 로마 시민들은 수세기 동안 교황의 신민이었지만, 이제는 이탈리아 통일의 완성을 위해 입장을 정해야 했다. 많은 로마 시민들이 정치적으로는 통일을 지지하면서도 종교적으로는 교황에 대한 충성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

이는 이탈리아 정부에게도 큰 부담이었다. 무력으로 로마를 점령할 경우 국민 상당수의 종교적 감정을 해칠 위험이 있었고, 이는 새로 통일된 국가의 통합에 치명적 타격이 될 수 있었다.

경제적 측면의 로마 문제

로마 문제는 정치적・종교적 차원뿐만 아니라 경제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교황령의 축소로 교황청의 재정은 크게 악화되었지만, 동시에 이는 이탈리아 경제에도 영향을 미쳤다. 로마와 라치오 지역이 이탈리아 경제권에서 분리되어 있는 것은 전체적인 경제 통합에 장애가 되었다.

특히 철도 건설에서 이 문제가 두드러졌다. 이탈리아 정부는 반도 전체를 연결하는 철도망 구축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로마를 거치지 않고는 남북을 효율적으로 연결할 수 없었다. 교황령을 우회하는 철도 건설은 비용도 많이 들고 효율성도 떨어졌다.

또한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지리적 중심지로서 상업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고대부터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교통 중심지였고, 근대에도 이러한 지위는 변하지 않았다. 로마 없이는 이탈리아의 완전한 경제 통합이 어려웠다.

교황청 입장에서도 경제적 고려사항이 있었다. 세속적 권력을 상실할 경우 교회 재정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미 이탈리아 각지에서 교회 재산이 몰수되고 있는 상황에서, 마지막 남은 교황령마저 잃는다면 교회 운영 자체가 위험해질 수 있었다.

국제법적 지위의 애매함

로마 문제의 또 다른 복잡한 측면은 국제법적 지위의 애매함이었다. 교황령은 중세 이래 독립적인 정치 실체로 인정받아왔지만, 19세기 국제법의 기준으로는 그 지위가 모호했다. 교황은 종교적 지도자이면서 동시에 세속적 군주였는데, 이러한 이중적 지위는 근대 국제 체계에서는 이례적인 것이었다.

더욱이 교황령의 영토적 기반이 계속 축소되면서 그 정치적 실체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로마와 그 주변 지역만으로는 독립 국가로서의 실질적 기능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군사력도 미약했고, 경제적 자립도 불가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각국은 교황령을 어떻게 인식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가톨릭 국가들은 여전히 교황의 세속적 권위를 인정했지만, 실용적 관점에서는 이탈리아 통일의 필연성도 이해했다.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은 대체로 이탈리아 편에 섰지만, 유럽 정치 균형을 고려하여 직접적인 지지는 자제했다.

이러한 국제법적 애매함은 로마 문제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명확한 법적 근거나 국제적 합의 없이는 어떤 해결책도 모든 당사자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결론

1866년 이후 로마 문제는 이탈리아 통일 과정의 마지막이자 가장 복잡한 난제로 부상했다. 단순히 영토를 획득하는 문제가 아니라 종교와 정치, 전통과 근대, 국가와 교회 간의 근본적 갈등이 얽혀 있는 복합적 사안이었다. 교황령의 영토적 축소와 라테라노 궁에서 바티칸으로의 이전은 이러한 갈등의 심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들이었다.

이 시기 교황과 이탈리아 국왕 간의 대립은 단순한 정치적 경쟁을 넘어 두 개의 서로 다른 세계관이 충돌하는 양상을 보였다. 교황은 중세적 신권 정치의 마지막 보루를 지키려 했고, 이탈리아 국가는 근대적 세속 국가의 원리를 관철하려 했다. 이러한 갈등은 결국 1870년 프랑스군 철수와 함께 극적인 해결점을 맞게 되지만, 그 과정에서 누적된 상처는 오랫동안 이탈리아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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